30대 건축인이여, 꿈의 날개를 펴라

<Refuge, 인천 건축가 30대의 꿈>展 리뷰

 

 

1년 동안 국내에서 개최되는 건축전시의 수가 적지 않은 반면 전시의 의의가 의미 있게 전달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획이 치밀하지 못한 까닭이 하나이며, 행정기관과 건축단체와 대학이 주도하는 전시가 주종을 이루는 풍토가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획자의 수적 열세(건축계에 건축전시 전문기획자란 존재하는가?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 짚어볼 논제이기도 하다)와 기회의 부족이 배경을 이룬다. 후자의 경우 대체로 건축전시의 기획자가 필요하지 않은 전시의 형태를 띤다. 틀에 박힌(건축상 수상작의 전시 또는 단체 회원전), 결과물 보고형(대학 과제전 등)의 그래서 사회적으로 무관심으로 일관되는 전시의 행태에서 일탈한 건축전시의 빈곤은 우리 건축문화의 허약한 체질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해 12월 초 인천 학생교육문화회관 내 가온갤러리에서 개최된 <Refuge, 인천 건축가 30대의 꿈>전(2008.12.2~12.7)을 계기로 모처럼 건축전시에 있어서의 기획자의 역할을 제고할 수 있었다. 또한 건축전시의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과 문제점을 깊숙이 들여다볼 기회가 되었으며, 이 같은 전시의 유의미한 성과에 대하여도 궁구할 수 있었다.

 

건축의 언어, 감통과 불통의 난제

건축전시는 어렵다. 출품자가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는 한 어지간히 건축공부가 되어있는 사람조차도 작가의 생각을 따라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시장에 내걸은 패널과 건축모형 그리고 영상물로 크게 나뉘는 전시행태는 어느 건축전시에서나 쉽게 만나게 되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 안에 담아놓은 언어들이다. 흔히 건축도면이라고 하는 것도 전시장을 찾은 일반인들에겐 낯선 언어다. 도면을 채우고 있는 각종 치수와 기호들 그리고 외국어로 표기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 일제강점 하에 잘못 길들여진 수많은 일본말이 오늘날에조차 건축공사판에서 통용되고 있듯이 현재 국내 건축디자인계에서 상용되는 많은 언어들은 글로벌화의 영향권 하에서 영어중심으로 뒤바뀌고 있다. 우리말 중간 중간에 영어 단어를 끼우지 않으면 소통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도면 위에 새기는 언어들은 외국어 일색이다. 우리말에서 건축개념의 어원을 찾고 궁리한 결과를 도면에 담는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수년 전부터 대학이 브랜드 가치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외국에서의 석․박사학위자를 우선 선발하게 됨으로써 학생들은 선진교육의 모델이 국외에서 비롯하며, 그들이 쓰는 언어를 일상화해야함과 동시에 그것으로 무장될 필요를 암암리에 강요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겉멋에 빠져 있는 집단적 병리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는 ‘이상한 엘리트이즘’의 한 본보기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을 병리적으로 보기 보다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건축언어의 상용화가 세계시장에서의 우리 건축디자인과 기술력의 활로를 찾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전제되었다는 주장도 펼칠 수는 있을 것이다.

 

<Refuge, 인천 건축가 30대의 꿈>전시는 인천을 건축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30대 건축인들을 한 자리에 모은 건축전시였다. 인천에서 태어났거나, 인천에서 공부했거나, 인천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30대 건축인들을 찾아내었다는 의미에 고무되는 것은 아마도 전문 장르의 계층적 분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인천지역사회 일부 인사에 국한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이들이 건축전시를 통하여 무엇을 이 사회에 전달하고자 했는가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 그 면에선 이들의 공통주제로 던진 <꿈>과 <Refuge>는 너무 건축 내부지향적이다. 그건 이번 전시의 행태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전시장 바깥세계와의 소통에 무게중심을 두기보다는 여타의 건축전시가 그러했듯 건축가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골몰한 집단주의의 한계를 노정시켰다.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건축언어의 공통점은 건축의 사회적 소통과는 무관했다. 심지어 전시된 건축모형까지도 일반인들에겐 접근하기엔 너무 어려운 전시물이었다.

 

인천을 건축의 고향으로 삼는 30대 건축인들의 존재를 확인케 하는 합창 자체는 너무 소중한 결실이었지만 그들의 합창이 건축사회뿐 아니라 시민사회에까지 전시의의를 공명시키는 감통의 단계로까지 전개되지는 못한 전시였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이들 30대의 집단적 건축지성이 인천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꿈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모았다는 사실이다.

 

30대 건축인, 건축가로서 그들의 위상

무엇이 이들을 모이게 했는가? 인천이라는 지역 연고(출신)에 한정하여 30대 건축인들을 모았다는 발상은 참신했다는 평가(그것은 인천 지역 내 문화계 인사들로부터의 환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와 동시에 전시 참여 작가 중에서조차 특정 지역의 굴레로 묶인다는 것에의 거부감이 채집되었는데 당장은 엇갈린 반응의 이유가 궁금해진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건축에서 지역성을 논점으로 대화하는 것의 부적절함을 당연시 하는 풍조에 젖어 들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분위기로 말미암은 연유가 부정적 입장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한 지역이라는 전시 초대작가의 범주가 견고하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건축계에서 30대란 대체로 기업의 조직문화 내에 귀속된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찾는 것이 손쉽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 건축의 칼라를 지우고 기업의 이윤창출에 동원되는 직임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는다. 20대를 상징하는 백수문화와 30대의 팔짱문화는 근거리에서 세대 간 특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결과 20대의 창조적 파괴력은 30고개를 넘어가는 지점에서 쉽게 고사되고 정작 30대를 맞아서는 사회체제에 가장 순종적인 세대의 특징을 끌어안기 마련이다. 건축디자인을 주업으로 하는 건축인들의 세계에서는 이 같은 세대 간 특이점이 유난히 크게 드러난다. 솔직히 30대 건축인 중에서 건축가라는 포지셔닝을 무기로 사회에 적절히 적응하고 있는 존재를 식별해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데 독립 건축가로서 활동하는 수가 예상외로 적다는 것이 이유가 된다.

 

그러다보니 이번 <Refuge, 인천…>전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이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주제의식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이는 통상의 20대에서 경험한 바 있는 아카데미즘의 편린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크게는 전시를 통하여 소통코자 하는 분명한 목표의 부재와 작게는 익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전시의 관람을 유도하여 건축과 사회와의 경계 지우기를 기대하는 심리를 무시한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20대의 전시기획자 장재경이 30대 건축선배들을 불러 모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그가 전시초대의 글을 통해 밝히고 있는 ‘20대에 꾸었을 사라진 꿈의 복원과 저항정신의 신생’을 알리는 전시라는 시각이 주된 관전 포인트로 작동한다면 말이다. 전시 참여 작가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위치를 일탈하여 다시 20대의 정신세계로 거부감 없이 회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다시 건축의 언어를 추어올리며 꿈의 부재를 자가 치유하는 고단한 과정을 겪은 것이다. 그들은 벽장 깊숙이 감춰두었던 꿈의 복원을 통하여 건축가로서 30대의 자신을 정위시킨다. 나는 건축가인가?

 

그럼,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저항’이란 무엇인가? 그것의 실체가 궁금하다. 인천의 글로벌도시 담론의 허구를 지적하는 공동전선이 이들이 저항하는 첫 번째 대상인 듯한데 내용으로 들어가서 보면 팩트(fact)가 거세된 또 다른 글로벌 담론의 허구가 강하게 배어 있다. 문제의 발단은 참여 작가들이 전시에 앞서서 일련의 워크숍과 같은 공동 프로그램을 운용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어설프게 이해하거나, 도시 이해의 단계를 무시한 용감무쌍함이 이 전시의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저항정신을 밀어낸 격이다. 그러면 인천 바깥에서 찾은 저항정신은 어떤가? 소통코자 하는 대상의 부재는 여기서도 함정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말하는 저항은 건축가로서의 존재감 상실로부터의 본능적 저항일 뿐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에 걸었던 기대감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건축가 30대 출사표

건축가 30대’란 입추(현실)를 맞이하는 것과 같다. 아직 남아있는 더움(몽상)이 결코 끝나지 않음을 기억하는 시간이자, 완연해질 가을을 준비하는 환희의 순간, 또는 그 슬픔을 알아차려버린 절기인 셈이다. 그래서 건축가 30대는 처서(處暑)와 같을 것이다.(김준모)

 

13년의 세월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위치, 생각, 가치관, 목표. 그래도 아직 변하지 않는 건 여전히 내 삶의 반 이상이 건축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고,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를 위해 하루하루가 빠르게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건축가 30대의 꿈은 열정과 이성 사이의 가느다란 경계선을 따라 걷는 것 같다.(김순주)

 

인천에서 태어나 30년을 인천에서 살았다. 이 도시는 내 집이며, 고향이며, 학교였다. 건축가 30대 처음으로 밖에서 인천을 보기 시작했다. 서른 살이 훨씬 넘어버린 도시의 기억과 잠재들이 다른 도시들을 제련한다. 건축의 꿈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비우기를 반복하며 담금질하는 30대. 오늘 다시 인천에 서다.(김종현)

 

20대 내가 몰두했던 숫자는 8m였다. 늘 탄젠트 값을 구하고 거기서 인천의 마력을 깨우쳤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경계부분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단순한 ‘선’이 아니라 ‘영역’임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탄젠트 값 위에 “lost”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난 시인이 되었다. 건축가 30대, 이제부턴 땅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소용수)

 

그토록 내 심장을 옭아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스스로의 자유를 향한 갈증으로 20대를 보내고, 30대에 비로소 그 꿈이라는 것을 향해 첫발을 들여놓는다. 그래서 이런 말 쓰기가 너무 힘들다. 20대를 늘 꿈이란 말로 달래다가 막상 30이 되니 그 책임감이 바위처럼 무거워진다.(윤새봄)

 

낯선 도시 인천에서 건축을 배운지도 5,800일 정도가 지났다. 회의가 생긴다. 뭘 위해 날짜를 세며 살아 왔는지에 대해‘꿈’은 이뤄지라고 꾸는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달으면서도 꿈과 현실의 협상인지. 아님 현실의 지배인지 판단하기 힘든 이 시간, 건축가 30대의 변은 이 문제를 푸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하경우)

 

성경 한 구절,“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이사야 51장1절 하반절>. 원도시건축 8년차가 된 나는 아무 형상이 없는 커다란 원석에서 떠낸 돌로부터 이력서 한 줄의 나로 다듬어 졌다. 진짜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그‘꿈’이라는 것. 30대에 다시 꿈을 꾸게 된 나는 용감해지고 싶을 뿐이다.(홍덕기)

 

1997년의 겨울과 2008년 겨울의 차이. 책상에 쌓여 처리되길 기다리는 서류와 도면을 나태하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열정의 세기를 측정하는 몸속의 기관이 둔해져 가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낀다. 공모전에, 턴키에, 허가에, 지쳐 잠들 때, 꿈을 꾸게 하는 신경마저 작동하지 않음을 슬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40이 훌쩍 넘어가기 전에 아직도 과거 진행형인 내 거울을 다시 꺼내 보고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가를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이태상)

 

어렵다. 20대나 30대나 마찬가지다. 다만 20대의 어려움은 도전으로 다가왔고, 30엔 어렵기에‘타협’을 넘보게 된다. 현실이 꿈과 접속되는 굉장한 순간을 포착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꿈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는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내 30대의 변명은 내가‘젊은 건축가’도 아직 못됐다는 자성이다.(이종훈)

 

20대부터 도면과 도시 공간의 괴리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었다. 도시와 거리공간, 그리고 그 속의 건축과 사람들을 가슴 속에서라도 짝을 지어주기 위해 이 짓을 시작했다.‘시티 스케치(City Sketches)’는 때론 혼자, 때론 가족과 함께 도시를 바라본 사적인 기록이다. 이런 짓은 일탈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 대한 집착이라 봐야 옳다.‘line weight’로부터 일상으로 돌아가 유연한 시각을 획득하려는 욕망 같은 것이다. 30대의 건축여정은 진짜 “부드러운” 건축가이고 싶다.(조경훈)

 

인천을 달릴 때 만나게 되는 주변의 공장풍경들과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바다는 내가 20대에 만난 인천의 첫 풍경이었다. 그 이후로 인천의 바다가 그저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과 인천은 힘겨운 성장통 속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애정 어린 시선을 갖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인천에서 성장한 30대 건축가들의 의미 있는 여러 시선들이 이곳에 담겨있다. 우리의 시선은 낮은 자세이기는 하지만 다분히 저항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인천을 둘러싼 최근의 큰 기획들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이 그러하고, 이제는 개발의 뒤안길로 전락해 버린 듯한 인천의 여러 장소를 바라보는 오랜 애정들이 그러하다. 10여 년의 터울을 갖는 작업을 꺼내놓는 이번 기획이 민망하지만은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권형표)

 

인공물이 반드시 자연의 형태나 메커니즘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미생물의 ‘Shelter’가 된 해변가의 유리병처럼, 그저 온전한 인공물인 채, 자연에 겸손하게 놓여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침식이 일어날 수 있는 관계와 가능성에 있다. 그리고 시간이다. 무분별한 인천의 확장이 ‘침식’이라는 자연의 작동방식에 의해 멈칫거릴 때, 인천의 ‘인천다움’이 숭고하게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생태도시는 확장이 둔화되고 침식이 가속화되는 순간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박종대)

 

이 전시는 늦기 전에 지연(地緣)의 고리라도 잡자는 어설픈 해프닝이 아니다. 연어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회귀하듯 건축가의 책무를 통해 내 지적인 고향, 인천으로 돌아가는 첫 번째 반환점일 뿐이다. 인천이 가르쳐 준 도시의 기억에 대한 무한한 해석가치를 되새김하고 진행 중인 내 건축 인생이 인천에서 만들어졌다는, 그래서 그 토대에는 인천과 같이 아픈 도시를 바라보며 꾸어야했던 그 꿈이 받쳐주고 있다는 위안을 갖게 해주는 숭고한 행위이다.(김태중)

 

20대엔 꺼지지 않는 연구실 불빛을 보며 건축의 열정을 키웠다. 하루 3시간씩만 디자인하라는 충고를 되새기며 늦은 밤, 연구실을 나서며 바라 본 밤하늘, 그 하늘에 샛별같이 빛나던 꿈을 지금도 본다. 30에 다시 꿈을 꾸어야 할 이유는 없다. 현재(Present)는 언제나 꿈의 선물(present)이기 때문이다.(성주애)

 

[Motherland] 인천에서 열정과 저항을 배웠다. 그리고 인천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 새로운 세상을 탐하려 했지만 내가 건축하는 어떤 세상에서도 인천이 묻어난다. 뉴욕의 맨해튼에서도, 아프리카의 사막에서도 내 작업은 언제나 인천의 도시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겹쳐진다. 추염부열(趨炎附熱)할 마음은 없다. 다만 인천을 떠나 저질렀던 모든 건축 행위가 인천을 담고 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감히 주장하고 싶을 뿐이다. 가슴이 다시 따뜻해진다. 내 건축의 모향(母鄕)이기 때문이다.(남건욱)

 

열정을 식히지 않기 위해,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짓은 생산이었다. 그 생산품들이 옳은 건지 아닌지 판단할 기운조차 없을 정도로. 포기하지 않는 것만도 내겐 버겁다. 인천도 잊고, 내가 인천에 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냥 무표정하게 세상과 투쟁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갑자기 깨닫게 됐다. 인천을 떠난 후 수 년간의 내 모든 작업과 포기하지 못하는 비겁함조차 인천을 향해 있음을.(이윤희)

 

처음 건축을 시작했을 때 건축은 나에게 막연한 이상으로 다가왔다. 지금 건축은 그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이 심연(深淵)임을 깨우쳐 준다. 그 심연을 가로질러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정을 가르쳐 준다. 30대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꿈과 가능성의 애매한 차이, 희망과 현실의 높은 벽, 창조의 희열과 비통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건축에 열광하고, 건축을 증오하며 내면의 긴 여행을 시작하라고.(백상훈)

 

30대 후반의 모순(Paradox)의 두 면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본다. 20대에 꿈꾸어왔던 건축에서의 이상과 현실의 구체적인 실체와의 대립은 비단 건축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건축이 선을 통해 경계를 생성하는 구축의 작업과 연결을 통해 관계를 맺어가는 행위쯤으로 여겨질 때 30대의 나의 모습은 바람에 몸을 맞기며 현실과 꿈의 절박함 사이를 가로지르는 외로운 줄타기쯤이 아닐까? 이 위험한 줄타기의 시간에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선 나에게 무모함(Recklessness)과 어리석음(silliness)은 덕목이라고 되뇐다. 현실의 무거움을 밀쳐내고 이상의 가벼움을 부여잡으며 오늘도 나는 숨을 죽이고 어리석게도 이 선(line) 위에서 무모한 곡예를 하고 있다. 자유로이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균형 잡힌 40대의 나와 나의 건축을 준비하며.(전유창)

 

‘꿈? 난 아직도 그것만 먹고 산다’는 공장장과 불모지를 개척하며 후배들이 넓은 세계로 나오길 바라는 선배, 아직 젊다며 우리는 아직 세상과 타협할 수 없다는 친구 놈과 선배들의 꿈을 일깨우기 위한 칼을 쥐고 있는 후배들… 그들이 위태한 나를 숨 쉬게 하는 내 죽은 심장의 붉은 꽃이다. 그들과 함께 30대의 꿈을 시작하려 한다.(씨애틀, 김정희 )

 

20대 초반의 내게 건축이 던져주었던 질문들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거대한 세상을 품을 듯, 철학, 미학, 역사의 담론 사이를 오가는 생각과 대화에 밤을 지새우곤 했다. 30대가 된 지금. 건축이 가진 매력의 대부분은 그저 종이 안에 갇혀 있는 순간적인 감상과 의견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곳 저곳에서 빌려 온 현란한 어휘들과 논리로, 건축은 스스로를 경계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은 여집합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일말의 수단조차 잃어버린 듯 한 것은 아이러니다. 저 혼자 엘리트가 돼버린 건축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아마 30대에는 더 이상 “작가”나 “이야기꾼”이 되기 위한 시간이 없을 것 같다. 그냥 얌전히 그 진가를 이해하는 정도의 독자로, 청자로 남고 싶다. 자신의 건축적 “감상”을 종이 밖에서 현실화 시킬 수 있을 때, 자신을 건축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기에 난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김지운)

 

인천에서 태어나고, 초,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쳤다. 그래서 내게 인천은 익숙한 집이자, 일상 자체였다. 하지만 석사 논문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도시 읽기, ‘인프라아키텍쳐바니즘’의 프레임은 나의 안식처(refuge)를 평생의 전쟁터로 바꿔 놓았다. 인천에서 멀어져 서울 직장에서 새롭게 시작된 30대에, 내 30은 인천을 떠났다고 믿고 싶은데도 떠나지 못하는 도착증의 지경에 빠져있는 것 같다.(심경아)

 

누군가 말했다. 완만한 경사로를 걷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태되는 자신이 싫다고. 하지만 건축은 언제나 내게 말한다. 열정만 있다면 마치 액체가 끓는점이라는 임계점을 넘어 공기 중으로 퍼져버리듯이 나 또한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인천에서 뜨겁게 보냈던 20대의 열정과 무모함을 가진 채, 언제 다다를지 모르는 임계점을 향해 나의 30대는 시작되고 있다.(최해안)

 

<Refuge>, 그리고 다시 <꿈>

‘우리의 시선은 낮은 자세이기는 하지만 다분히 저항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인천을 둘러싼 최근의 큰 기획들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이 그러하고, 이제는 개발의 뒤안길로 전락해 버린 듯한 인천의 여러 장소를 바라보는 오랜 애정들이 그러하다.’는 권형표의 언급에서처럼 이들은 인천의 도시와 건축에 담긴 문제의식을 양분으로 하여 건축가의 길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따라서 이들은 30대 건축가의 존재감을 자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세대의 집단적 욕망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앞에서 이 전시가 저항적이기보다는 유순한, 미온적 태도로 일관했다고 비판했지만 그들의 작가적 잠재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전시는 30대 후반의 건축가 4인을 주목하고 있어 특히 흥미로웠다. 문훈(문훈건축발전소 소장), 봉일범(국민대 교수). 이의성(창조건축 이사), 전유창(아주대 교수)씨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전시장 내에서 특별 부스에 초대되었는데(개막 후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이 전시가 탈권력의 재구조화에 실패한 증거라고 비꼬기도 했지만), 이들에게서 공통점이 있다면 4인 모두 해외파라는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그중 이의성 씨는 모포시스의 중심멤버로서 이대 앞 선타워빌딩을 설계하고 현장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며(그는 인하대 국제 워크숍 초청강사를 역임한 자격으로 이번 전시에 초대되었다), 최근 귀국하여 창조건축에서 전략 디자인 및 도시설계부문 이사의 역을 수행하고 있다. 전유창 씨는 인하대 건축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유학생의 신분으로 일본 신건축사가 주최한 국제공모전 대상 수상자의 경력을 소유하면서 주목되었던 건축인으로 근년에 귀국 후 아주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봉일범 씨는 교수 임용 전, 10권의 <지어지지 않은 20세기, 건축> 전집을 완간한 바 있는 신세대 이론가이자 건축디자이너로서 주목되었다. 문훈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트 액티비스트로서 건축과 영화, 미술 장르의 접점을 아우르는 전시와 출판 행위를 통하여 건축의 외연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는 인물이다.

 

이들은 30대 초중반에 이미 디자이너 혹은 저술가의 대열에서 자신들의 이름이 호명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시절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전시가 이들을 집중 조명하고 있는 배경에 이 같은 개인 이력이 참조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의 꼼수가 있었다면 전시장의 4/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30대 초중반의 건축인들에게 이들 4인의 존재를 먹잇감으로 내놓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차별화 된 전시부스는 이 전시를 하나의 게임으로 관전하는 포인트가 된다.

 

이들 중 건축 저널리즘에 작업세계의 노출빈도가 적었던 2인에게 특별히 시선을 모아 보자.

봉일범의 작업 <MAZY(1999), WAVY(2005), FLORY(2008)>는 인천의 특정 계획 부지를 대상으로 한 작가의 연대기적 사유(그는 30대 초반 3차원의 미로에 심취되었던 시기의 흔적과 30대 중반 컴퓨팅의 기술에 흥분했던 시기의 흔적 그리고 30대 후반 인천의 화려한 미래를 궁구하는 동시간대의 꿈을 표현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의 고리를 표현했다. 그가 보여주는 꿈의 궤적은 건축가로서의 성장바로미터가 곧 건축가의 자기 논리를 세우는 연속된 과정이어야 함을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그는 이른 나이에 건축책의 저술(및 번역)행위를 통해서 건축론의 기초를 튼튼히 한 건축인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이번 전시는 그의 디자인 경향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리였다.

 

전유창의 작업 <Urban P/Flat-form>은 노들섬 공연예술센터 계획안을 통해서 땅과 사람을 균형감 있게 묶어주는 이벤트 장으로서의 건축공간을 제시했다. 그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노들섬(그것은 이미 자연공간으로서의 상징적 기표로 작동 중이다)에 또 하나의 인공대지(건축)를 대지의 종축과 엇물리게 얹어 놓음으로써(건축행위란 대지 위에 새기는 시계바늘이라는 의미를 함의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껏 한강수의 흐름에 순응해온 지형적 특질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은 한강에 정박한 항공모함과도 같은 유비적 건축을 통해서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자연공간)과 새로 개입시키려는 것(인공의 건축판)과의 대비와 거대한 지붕판의 군데군데에 격자형의 크고 작은 오프닝을 통한 환유형 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건축에서의 원시성과 현대성을 공명시켰다.

 

그 외에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30대 초중반 작가들 중에서 남건욱+이윤희, 권형표+김순주, 김준모, 박종대+윤새봄+김정희, 서창범, 심경아+이종훈, 이태상 씨 등의 작업내용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풍요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공간으로 주어진 프로젝트에 충실하고 있다. 대체로 그들의 건축에서는 선명한 디자인의 목표와 그것을 엮는 잘 짜인 내러티브 공간의 특질로 드러난다. 계획부지에 대한 기층 사회의 안이한 문제의식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건축의 실현보다는 구축의 입론에 착안하여 건축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방법을 좇는다. 이러한 특질이 공유되는 배경에는 대학에서 만난 그들의 스승, 구영민(인하대 건축과 교수)씨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번 전시를 완성하는 데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는 암막(暗幕)으로 존재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의 자기 존재를 부인했지만 그의 건축적 관심과 이상은 전시에 참여한 상당수 30대 건축인들에게서 고스란히 찾아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건축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도구라는 시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태도를 오늘의 한국 건축에 현재화 시키고 있는 건축가이자 비평가이며, 이론가이다. 그러한 그의 건축관은 인천을 고향으로 하는 건축인재를 잉태하고 키워내는 중요한 모판의 구실을 하고 있으며, 글로벌 도시담론의 허구에 매달리는 인천의 건축적 저항의 기점이란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인천이 그의 건축관과 국제적으로 광역화한 건축네트워크에 대한 정보를 중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인천에 없는 것>이라는 지역신문 칼럼에서 인천의 건축가 세우기를 주장했다. 그의 존재감을 염두에 두었던 까닭이다.

 

이번 전시는 서울로 모아지는 중앙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천의 건축판이 문화적 단층을 축적하는 데에는 충분히 의미 있는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전시를 통해서 보여준 개인적 역량은 향후 의미 있는 건축전시의 출현을 기대케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건축전시의 기획자는 보다 넓고, 깊게 세상을 들여다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주제의식이 선명한 전시의 기획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또한 대중과의 소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획이 가능해질 때라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전진삼, <와이드AR> 7호, 2009년 1-2월호, WIDE ISSU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