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삼의 건축탐정 AQ (인천 편)
페이퍼컴퍼니라고 하면 실체는 없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의 형태를 의미한다. 페이퍼건축도 다르지 않은데 실제로 지어지지 않는 건축을 드로잉 또는 모형작업으로 보여주는 건축이다. 현재는 너무 유명해진 서양의 현대건축가들 그러니까 피터 아이젠만, 렘 콜하스, 자하 하디드 등도 한때는 페이퍼건축가였었다. 그들이 종이 위에 그려놓은 도발적이고 치밀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건축적 상상의 공간이 철학과 만나고, 영화와 만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반구축적 저항정신이 존중되었고 어느 사이 대가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그어대는 선, 면과 꺾고 접는 모든 행위가 의미를 생산한다. 바로 오늘날의 모든 건축가들이 꿈꾸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지.
반장의 설명을 듣고서 AQ-2는 그제서야 자신이 생각해온 페이퍼건축의 정의가 무척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심코 종이로 만드는 건축의 한 형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마트면 드로잉을 하거나 모형을 만들거나 간에 주재료를 종이로 하는 것이 페이퍼건축이야 하고 아는 척을 할 뻔했으니 말이다. 가슴이 뜨끔했다.
차는 구, 인천양조장 앞에 멈춰 섰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우측으로 우각로가 연결되는데 한 50미터쯤 앞에 미술공간으로 재단장한 스페이스 빔 전시장이 있고 그곳에서 페이퍼건축전이 한창이었다. 솔직히 AQ-2는 이곳에 미술공간이 위치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서라기보다 특별히 이곳이 미술공간임을 알려주는 그 흔한 간판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이전부터 그래왔던 것 마냥 별다르게 고쳐지지 않은 파사드의 무심하다할 정도로 침묵하는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 찾아오려고 했다면 필시 무신경하게 이 집 앞을 휙 지나쳤을 것이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곳이 미술공간이라는 정보를 담은 작은 크기의 전시장 문자판과 철문에 그려진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멍하니 서있는데 금반장이 AQ-2의 허리를 찌르며 전시장 내부로 밀어 넣는다. 10월 18일까지 열리는 현역 건축가 YMK와 JHP의 2인전(‘상상의 대지 탐사전’)이 한창이었다. 인천에서 최초로 열리는 기성건축가 2인의 주제가 있는 기획전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것들이 뭐란 말인가? 명색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금반장의 탐정사무소에 입사한 AQ-2에게도 이 전시가 결코 만만히 다가설 수 있는 전시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은 전시모형의 크기에서 놀랐고, 전시모형의 설치 방법이 가히 충격이었다. 또한 패널과 모형이 의미하는 바에 기가 꺾였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성, 라퓨타>를 연상시키는 모형도 눈에 띄었고, 거대한 지구의 단층에 기생하듯 붙어 있는 소형 모형들의 복합체와 그것을 지탱하는 건설현장의 안전구조물에도 위압되었다. 또한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의 아크릴판과 그 주변에 그려진 지하세계의 이미지 판들이 중첩되면서 바로 직전까지 지녀왔던 현실건축과 크게 유리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AQ-2는 현실과 상상의 접경지대에서 그것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반장은 스페이스 빔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AQ-2는 본격적으로 전시패널과 모형에 붙어 있는 액자의 내용들을 꼼꼼하게 읽을 필요성을 느꼈다. 전시모형을 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이상한 기운을 받으며 결코 쉽지 않은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갔다.
정재은 감독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위한 네 개의 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수부두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슬럼을 배회하고 있는 자신을 전시물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친절하지 못한 전시물들은 AQ-2를 힘겹게 했다. JHP의 전시패널에 표현된 공포(두려움)의 도시 인천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구체적인 문제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흑백 톤의 드로잉은 단순했지만 그 안으로의 여행은 너무나 난해했다. 바로 이 전시장이 위치한 배다리를 처음 만났을 때 초현실적 공간에 놓여 있는 작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그래서 대지로부터의 이상한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었다는 JHP의 술회를 전해 듣고서야 AQ-2는 막연하지만 인천이라는 도시공간에 왜 이 같은 추상적이며 저항하는 공간의 이야기가 요구되었는가를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실재하는 기념비적 건물들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휘둘려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상징물로 드러내게 되지. 그 바람에 권력 바깥의 힘없는 도시공간의 사유들은 쉽게 짓밟히거든. 문제는 그 순간에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가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게지. 페이퍼 건축가들의 거침없는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야.” 어느 새엔가 AQ-2의 옆으로 다가온 금반장이 말했다.(계속)
나오는 사람
YMK(실명_구영민): 인하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1957년생. 한국건축가협회 초대작가, 중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의 대학에서 초빙교수 및 교환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 UIA 국제공모전 제4지역 전문가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대표 작품집으로 『Poetics of Crack』,『Garden in the Machine』이 있고, 현재 비평집『간극의 단층』출간을 앞두고 있다.
JHP(실명_박준호): 정림건축 소장, 1962년생. 뉴욕공대 및 프랫 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프랫 대학원 건축과를 졸업했다. 한국건축가협회 초대작가 및 <건축가>지 편찬위원.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서울건축학교 투터를 역임했다. 삼양사사옥 현상설계 대상 및 새빛안과병원으로 경기도건축문화상을 수상했다.
[인천신문, 제374호, 2007년 10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