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건축의 轉化

공룡사무소 10년 호경기, 그리고

국내에서 건축사사무소 직원이 1천 명을 웃도는 빅 브라더스(big brothers)의 시대가 개막된 지도 10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소위 한국에서도 ‘공룡사무소=초대형 프로젝트’ 계약의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되어 있고, 작은 건축사사무소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특별한’ 프로젝트들이 저들 공룡의 배를 채우기 위해 마련된 육질 좋은 식단이라면 틀린 얘기도 아닐 것이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10년에 걸쳐 건축사사무소의 양극화는 최고점에 도달하여 기형적 건축생산구조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으나 통상의 공룡사무소들은 정치적 이념형의 차이와 무관하게 저들의 건축설계시장은 양 정권의 비호 하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서조차 호경기를 누려왔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그런데 요즘 공룡사무소들 일각에서 일거리가 없다느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등등의 소문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국제적 금융위기와 국내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불거지면서 PF시장이 죽고, 턴키시장이 대폭 축소된 여파이겠지만 육식공룡들이 초식시장에 까지 기웃거리면서 그나마도 초식성의 키 작은 건축사사무소 설계시장의 질서가 무너질 판이다.

건축설계업을 지망하는 대학 건축학과 졸업생들의 다수가 선호하는 빅 펌(big firm)들이 건축사사무소 대졸 초임의 연봉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직업으로서의 건축가가 적당 수준의 물질적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것은 분명히 이전 시대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사이 미래의 건축가를 길러내는 대학의 교육시스템도 건축학 5년제로 정착이 되면서 설계교육의 현장성 강화와 디자인의 질적 발전이 연계된 사회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전국적으로 건축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문화의 중심 키워드로서 건축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무릇 공룡사무소들의 무차별적 식탐의 긍정적 효과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건축설계시장의 규모가 천문학적 단위로 커짐에 따른 수혜를 일차적으로 대학이 받게 되고, 대학은 이를 토대로 우수한 재원들을 공룡사무소로 밀어내는 식으로 건축생태계가 구조화 되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대학은 예비 작가의 탄생 프로그램을 준비하기보다 예비 직장인의 공급을 우선시 하는 몰염치한 교육환경을 구축해왔다. 그런 과정에서 작은 사무소들은 프로젝트와 인력난을 동시에 견뎌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음이다.

진공청소기라는 유행어가 고스란히 공룡사무소에 적용되어 작은 사무소의 경력자들을 무분별하게 빨아들이던 것도 같은 시기에 일어난 세태였는바 건축생태계 교란의 일차적 책임과 함께 시장의 경쟁논리에 급급하여 건축의 윤리적 관점을 무시한 채 건축을 신자유주의의 선전도구로 전락시킨 이차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공급자 중심의 건축생산이 더 이상 시장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부동산의 거품이 너울처럼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작금의 정황을 살펴보건대 오늘날 공룡사무소 대부분에서 10년 이래 최대 위기감에 휩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자칫 우리 ‘건축의 위기’라는 판단으로 기울어질까 보아 염려된다.

 

글로벌 트라우마(trauma)

공룡사무소가 안고 있는 실제적 문제는 국내 설계시장의 위축된 분위기이기보다 다국적 건축설계회사의 국내 진입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에 있다. 최근 용산국제업무지구 설계발주과정에서 국내 건축사사무소들이 전면 배제된 채 외국 설계업체의 하청업자 역할로 전락한 발주 사례에서 공룡사무소의 현주소가 극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한국건축의 세계화와 국내건축설계업의 국제경쟁력 강화 노력에 반하는 시행주체의 부당한 발주행태와 이를 알면서도 제지하지 못하는 편법과 관행의 불공정한 건축행정에 국내 건축계가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걸까?

지자체와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벌이는 대규모 대단지 초고층건축의 개발 사업에 외국 설계업체와 건축가들이 대거 진출해 있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 일상화된 배면에는 명품건축 지상주의에 빠진 우리 사회의 단면이 농축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학도 가세하고 있는데 공통적인 것은 명품 브랜드를 앞세운 공격적 마케팅의 전략이 지역과 장소의 정체성보다 우위를 선점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지자체마다 아시아의 허브 도시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도시, 국제도시라는 미명 하에 현대건축은 장소성의 익명화를 강조하는 탈 지역적 추세로 나아가는 한편 상징성을 갖는 초고충 건축물‘과 ‘국제업무지구’라는 표준화된 도시계획으로 천착된 글로벌 도시화의 폐단이 전국의 광역도시와 대도시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기념비성을 강조한 도시화의 최전선에서 건축은 지역경제의 규모와 비전을 견인하는 상징적 언어이자 투기자본에 의한 거품의 크기를 표상화 하는 바로미터로도 작용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리즘의 환상을 부추기는 명품건축이 지역의 대표성을 가짐과 동시에 기존의 건축된 상황을 철저히 부정하는 사태로 몰고 간다. 글로벌 코드에 꿰맞춰지지 않은 결과라면 더 이상 건축의 시간성은 무의미하다는 논리가 비판 없이 주입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건축설계의 주체 또한 국내인에 한정지을 이유가 없다는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의 생각이 더욱 공고해진 것도 국내 건축사사무소들의 입지를 좁히는 원인이 되었다. 1980년대 이래 국내 건축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외국의 건축설계회사들이 선진건축문화의 일단을 보여주고 상대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했던 국내 건축기술과 설계기법의 발전에 촉매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젊은 건축인들이 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도 이를 방증하는 것이다.

그 시절 한때나마 대기업의 수장들이 나서서 자사의 사옥 건축과 대형 상업시설의 건립을 통하여 국외의 선진건축문화의 수입을 주도하며 한국건축문화 발전의 시금석이 되었다는 무용담을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당대 한국최고의 건축가들이 저들 앞에서 건축가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등 수모를 당했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그 시절의 정황이 극복되어야 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건축계는 여전히 글로벌리즘의 적자가 아닌 피해의 당사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의 기업과 자본, 권력층이 한국의 건축가들을 불신하고, 건축제도를 악용하여 외국 건축설계회사들의 브랜드를 선호-일방적으로 수입-하며, 국내 건축사사사무소를 단순 서비스업의 대행사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사이 우리 건축의 대외 신인도는 자력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국내외적으로 불황의 시대를 겪는 과정에서 전체 건축계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는 등 안팎으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간지대의 건축가들

건축의 대형화와 수직화, 복합화가 외국설계회사와의 합작의 형태로 구성된 공룡사무소들의 주요 먹잇감으로 시장의 성격을 규정해온 지난 10년 간, 한국건축계의 저변에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양 시기에 걸쳐 세계경제의 변혁기와 외환위기의 시대를 거쳐 오며 위기 극복을 위한 수순의 일환으로 오늘날 공룡사무소의 발흥이 예정되어 있었다면 다른 한쪽에선 작가주의적 건축의 경향을 주도하는 작은 건축사사무소들의 존재감이 한 축을 담당하며 자력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글로벌 도시담론에 휩쓸리기보다 건축의 자주성, 진정성, 실험성에 시선을 두고 자신의 건축세계를 공고히 하는 시간으로 할애해 왔다. 1990년대 초반 선배세대의 리더십부재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생한 4.3그룹의 출현과 그룹 활동, 1990년대 후반 비평적 시각의 건축저널리즘에 기반 한 30대 건축가들의 출현과 개별적 활동, 2000년대 초반 새건협을 중심으로 한 4, 50대 건축가들의 출현과 공공적 활동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이들은 공히 글로벌리즘의 저항세력이기보다 건축 및 건축단체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혁파하며 건축(가)의 존재를 알리고 각인시키는 계몽세력으로서 정위될만하였다.

특히 이들 중 소수의 건축가가 주축이 되어 2010년대의 개막을 전후해 수차례 국외에서의 한국현대건축에 대한 주제전시를 수행하게 되는 바 이들의 자구노력으로 2000년대에 급팽창한 공룡사무소의 대척점에 서 있는 우리 건축의 중심세력으로서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건축시장의 대형화와 공룡사무소의 밀월로 생존의 위기감에 내몰려 있던 작은 건축사사무소의 반전이 국제건축전이라는 기획으로 이어진 것인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국제건축전을 통한 작가주의적 경향의 3, 40대 젊은 건축가들의 출현을 ‘중간지대에 선 건축가들’이라고 진단하는 흥미로운 견해도 등장했다.

“개발신화와 얄팍한 디자인 경제주의의 중간지대, 대형건축사사무소와 ‘허가방’의 중간지대,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공룡복합건축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와 중간건축이 서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서 있는 지점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이 우리 도시의 현실에 깊이 발을 담그고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는가에 한국건축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 (김성홍, ‘한국건축의 새로운 지평’ 서문 11p, 201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들 ‘중간지대 건축가들’ 다수가 글로벌 건축시스템에 익숙한 유학파라는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2000년대 후반 미국의 금융위기와 경기침체, 유럽 발 경제위기의 가속 등으로 국내로 발길을 돌린 유학파 젊은 건축가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한국건축문화의 지형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기가 좋고 건축설계의 기회가 잦은 한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유학파 간의 경쟁구도가 형성되고, 국내 설계시장에 대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선배 건축가들을 위협하는 한편 디자인 협력자로서의 공동 작업에 뛰어드는가 하면, 일찌감치 대학의 전임교원으로 흡수되어 교육과 현장의 사이를 넘나드는 건축가들의 층이 두터워졌음이다.

적어도 글로벌 도시건축에 대한 담론생산의 가능성과 건축디자인의 질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폭넓게 조성되고 있다할 것이다. 정부도 이들 젊은 건축가들의 출현을 주시함과 동시에 국내파 젊은 건축가들의 발굴에 지속적이며, (예전에 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변화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건축의 주제의식은 자유롭고 풍요하다. 한옥의 가치 발견을 통한 대중화와 실험, 단위주거 및 공동주거시스템의 연구, 대중 속으로 찾아가는 디자인, 페이퍼 아키텍춰(paper architecture), 건축디자인 영토의 확장, 소외계층 및 건축행위를 통한 공공성의 회복, 건축과 미술-대중문화의 경계 허물기 등 건축의 확장성에 시선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

역설적이지만 지난 10년 외국 유명 스타건축가들이 점령한 한국건축문화의 선단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만한 것들은 여러 가지다. 이를테면 저들이 보여주는 건축의 창조성에서가 아니라 건축이 여전히 존중되는 공공재이자 창작의 소산이며, 건축가 또한 자본권력과 대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직업이라는 것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다. 대다수 한국의 건축가가 시나브로 경험해보지 못한 건축행위의 목표지점을 저들은 이 땅에서 온전히 대접받고 있다. 단지 선진문화와 상업적 교환가치로서의 건축을 생산하는 탁월한 디자인 능력과 그것의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의 허물만 탓할 것이 아니다. 동일 이상의 수혜를 우리 건축가들의 몫으로 돌릴 수 있다.

나는 이 땅의 3, 40대 젊은 건축가들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읽는다. 그리고 애정을 보낸다. 이제까지 내가 만난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공히 건축의 행위를 통해 허무주의자이기를 벗어던진 엘리트들이자,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줄 아는 소셜니스트(socialist)들이란 믿음이 큰 까닭에서다. 글로벌 경쟁에 휩쓸리기보다 경쟁을 즐길 줄 알고, 기회를 중시하며, 다가온 기회는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겸손함과 실력이 그들에게서 읽혀지기 때문이다.

국내에 진입하려는 외국의 건축설계회사가 대형 조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발주자들이 접촉하는 외국의 건축가들 중에는 젊고 유능한 아뜰리에형 건축가들도 다수 포진해 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작가주의 경향의 건축가들 사이에서의 본격적인 경쟁의 시대가 개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경쟁사회에서는 단지 외국인이라는 명패와 저널리즘에 소개된 건축가의 유명세보다 건축(가)의 개성과 건축디자인 단계와 결과, 사후 관리체계의 차별화된 서비스 면면이 평가의 지표가 될 것이다.

공룡사무소들의 부침은 세계경제의 풍향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위험한 만큼 기회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건축사사무소의 대형화가 국내건축설계시장 중심의 마케팅을 펼쳐온 것이라면 이후는 세계시장 속에서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 수순이다. 그러기 위해선 작금의 국내용 빅 파이브(big 5), 빅 텐(big 10)의 존재의미보다는 다국적 빅 투(big 2), 빅 쓰리(big 3)의 설계조직으로 거듭나는 실질적 구조조정의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단지 이 땅에 지어지는 건축이라고 해서 응당 한국의 건축가가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아야한다는 등식은 지워버려야 한다. 굳이 외국의 건축 용병을 쓰려고 하는 발주자의 입장을 제도로 묶기보다는 우리 건축을 향유하는 대중의 확보와 건축물 발주 능력이 있는 상위 1%를 향한 지속적이며 차별화된 건축 교육과 홍보, 계몽의 기회를 통해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가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는 한 한국건축의 세계화는 요원한 목표이자 세계시장 속에서 한국건축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에 족쇄로 작용할 뿐이다.

 

[전진삼, 건축, 1201, 대한건축학회 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