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전의 색깔을 찾아가는 프로세스

건축가와 시각매체를 다루는 작가들과의 협업전시라는 점은 특별한 이슈가 될 수 없다. 그것이 기대수준 이상의 결과를 도출했다 손치더라도 작업형식에 의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미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특정 전시공간을 무대로 하는 예술장르 간 또는 학제 간 협업의 사례를 수없이 많이 접해오고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특히 금번 ‘스페이스코디네이터’의 경우처럼 참여 작가들 간에는 다소 거리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바깥의 시선으로는 시각예술이라는 공통의 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 일군의 전문작가라는 집합은 공동전선의 목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평가는 냉혹하게 내려질 것이라는 점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전시장에서 이들의 협업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애초의 프로그램처럼 건축가와 짝짓기 한 시각예술의 작가가 공동의 전선으로 주제에 접근한 사례다.(김동진, 정수진, 김영섭_전시방 Made in Korea Bang) 둘은, 건축가는 개념을 제공하고 작가의 방식으로 작업을 완성한 경우다.(이수열, 이현호, 이배경_통시성, 소유, 지연, 순환, 재생) 셋은, 짝짓기한 건축가 및 작가가 개별적으로 작업에 임하는 방식이다.(봉일범, 권기범, 김정주_Highway wonderland) 이들 세 개의 부류는 초기 기획의도와 다르게 설정된 결과일 수 있다. 적어도 처음엔 첫 번째 형식을 선호했을 법하다. 그러나 각각의 방식이 결과를 좌우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참여작가들이 취한 일련의 작업태도가 생산해낸 결과물들이 본인들 스스로도 납득할만한 결과로 도출되었는가에 있다.

금번 전시의 전체 주제는 <공적 공간, 사적 공간>이다. 이들은 금번 집합전을 통해서 공간의 내면과 외연을 탐구하는 듯 보인다. 개인과 집단, 개인과 일반인, 개별과 집합, 개성과 공동성, 독자성과 우연성 등등에 이르는 공간 가치의 발견이 주된 방향이고, 그 안에서 건축과 도시의 사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나열, 현상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 등을 드러내고 있다. 각각의 작업들이 담은 내용에 관한 한 참여 작가들의 입을 빌려오는 것이 평자(評者)의 생뚱맞은 편견보다 나을 테지만 중요한 건 이들의 집합전을 통해서 전체 주제에 대한 해석이 특기할 만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관념의 세계로부터 끌어낸 공간의 두 개 양상에 대하여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공통된 태도라면 그것을 다시 관념의 세계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정도. 그래서 하나, 의심되는 것은 참여 작가들이 금번 주제를 너무 가볍게 받아들였거나, 반대로 목표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너무 무겁게 받아들였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집합전의 취지를 살리는 데에 공동의 주제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이스코디네이터’라는 이 집단의 힘은 작지 않다. 공간전달자, 공간기획자, 공간조정자, 공간책임자 등등 이들 집단이 함의한 세계인식은 우리 건축계가 안고 있는 폐쇄적 집단주의의 폐해를 극복해보려는 자구적 의도로 읽힌다. 의도적인 제도권에의 저항의지이기보다 작업의 기회를 생산하기 위한 제도 순응적 전략이 이 집단의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집단의 향방은 당장의 주제전에 있기보다는 그것을 계기로 집합되는 작가들의 네트워크에 있다고 본다. 그것이 이념지향형이기보다는 작가지향형이라는 데에서 이 집단이 응시하고 있는 목표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바람에 서로 다른 작업의 방법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접촉과 충돌의 공존이 아닌 접촉의 미묘한 관계로 인상 지워지게 된 것이 금번 전시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충돌을 피하여 비켜서기와 같은 작업방식이 용인된 것도 이 집단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해서 이 집단의 초기화 단계를 보는 시선들에서 긴장감이 상쇄되고 있는 점은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충돌이 금번 집합전의 열쇠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상 일부 팀에선 충돌의 표증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짝짓기라는 형식으로 말미암아 암묵적이나마 충돌방지선이 그어진 셈이고, 그러하기에 참여 작가 간 상호 존중의 작업태도가 이 전시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하므로 전시장 분위기는 집합의 긴장감보다는 팀 간의 우호적 영역성으로 도출되고 있었다. 동시에 전시된 작품과 작품 간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애매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은 것이다.

전시오픈을 한 달 앞두고 열린 비평가워크숍 자리에서 제기한 바 있지만 금번 전시가 다른 장르의 작가들이 함께 모여서 벌이는 단순 교류전이 아닌 집합전의 성격이 강하므로 전시장을 중심으로 참여 작가들의 공동 작업전이 흥미로운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냐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 매개역할을 스페이스코디네이터 운영진의 개입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고, 그로써 개별 팀 단위의 작업이 주는 메시지의 한계를 넘어 전체 주제에 다가서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말한 배경은 당연히 본 전시의 무게중심이 주제해석과 그것에 관한 공동작업의 결과물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번 전시의 시종 주제보다는 형식 실험에 대한 참여 작가들의 관심이 지대했다고 여겨진다.

각 팀의 주제해석이 결여되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해석이 집합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다는 관전평이다. 그 결과 전체 주제가 설정된 근본적인 물음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전체 주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한 참여 작가들의 치열한 내부 논의와 조정이 부재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스페이스코디네이터 운영진이 말하고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시 제안’은 참여 작가들의 개별 작업이 보여주고 있던 작업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고 보인다. 게다가 노출빈도가 너무 높아서 아무도 신경 써서 들여다보지 않을 전체 주제 <공적 공간, 사적 공간>의 통념을 뒤엎는 것이거나 주제어와 주제어 사이의 ‘쉼표( , )’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은다거나 등등의 모습으로 도출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종 결과물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다행한 것은 스페이스코디네이터의 금번 전시와 같은 일련의 작업이 다년간 연속적 프로그램으로 기획되고 있다는 점이다. 색깔이 분명한 작가들이 개별단위의 작업방식을 접은 채 집합의 방법론을 찾고 있는 작업의 내용은 전시뿐 아니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럴 때에 비로소 이 집단의 성격도 제자리를 찾았다 할 것이다. ‘스페이스’에 관한 보다 적극적인 기획과 해석으로 작업무대의 외연을 넓히기를 바란다. 주지하다시피 공간을 주제로 세상과 만나는 방식은 어지간해서는 새롭다는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

 

[전진삼, 2009 ‘스페이스코디네이터’전시_<공적 공간, 사적 공간>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