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김(金)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정림건축을 통해 읽는 한국현대건축의 표정

 

 

1967년 설립한 정림건축이 올해로 47년의 발걸음을 뗀다. 서울에서 세계건축가연맹의 총회가 열리는 2017년, 이들 집단은 50년의 기념비적인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김정철, 김정식 형제 사무소로 알려져 있는 이 건축설계회사의 초창기 비사가 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의 기록 1권 『김정식 구술집』(도서출판 마티, 2013)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정림(正林)이라는 이름은 우리 형제가 다 바를 정(正)자 돌림이었거든요. 그리고 수풀 림(林)은 형제가 숲을 이룬다는 뜻에서 수풀 림(林).(중략) 일단 부르기도 좋고, 바르게 숲을 이루어서 번성한다는 뜻도 있고 여러 가지로 그게 좋겠다고 해서 정림으로 이름을 택했습니다.(김정식, 2013)

 

사무소 개업은 김정식(정림건축 명예회장)이 그의 형 김정철과의 의논을 통해 1967년 단독으로 회사를 만들면서 출발하였으며 정작 김정철은 개업 후 3년이 지난 70년 초에 정림건축에 본격 합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로는 초대형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8천 평 규모의 인천의 대성목재 합판공장 설계를 필두로 기라성 같은 선배 건축가들을 제치고 당선한 외환은행 본점 등의 설계로 업계의 중심에 진입한 이들에게 당대 건축의 본좌로 통하던 김중업과 혜성같이 나타난 신예 건축가 김수근은 극복하기에 부담스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 정림건축은 한국현대건축의 태두라 일컫는 두 거장의 그림자를 딛고 한국건축의 최정상에 서서 김(金)의 시대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현대건축은 김중업, 김수근, 김종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김정철, 김정식 형제가 바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림건축은···건축에 대한 기본을 지키고, 본연에 충실해왔으며, 앞으로도 “건강한 건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정림건축, 2014 연하장)

 

정림건축사관학교에 대하여

본지 2013년 9/10월호(통권 35호)에서 목천김정식문화재단(이하, 목천재단)의 행보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나는 김정철, 김정식 형제의 존재감에 대하여 재론해야할 이유를 찾아냈다. 솔직히 이전까지 이들 형제가 이끌던 정림건축의 시절에 대하여 깊은 시선을 두지 아니하였던 바라 그것이 부정확한 정보로부터의 선입견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정식이 자신이 만들고 키워낸 모체 정림건축에서 이탈하여 디엠피건축(디엠피건축은 김정식의 맏사위 문진호와 정림건축 재직 시 회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라 칭해도 부끄럽지 않을 박승홍의 연대로 설립된 사무소로 당당히 이 시대의 젊은 건축인들이 주목하는 건축사사무소로 우뚝 섰다.)을 설립하는 시점을 전후해서였다. 그때도 여전히 풍설에 의존한 채 이들 형제의 갈라섬의 이유에 대한 진실게임에만 귀를 열어둔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이들의 건축시대사적 궤적을 따라잡기보다는 재미삼아 이웃집 싸움질 보는 양 했다. 동시에 디자이너 개인의 이름이 드러나기보다는 정림이라는 집단의 이름으로 디자인의 크레딧을 정리해온 저간의 행태에 대하여 조직이라는 무덤 속에 파묻히고 있는 젊고 유능한 건축가들의 이름을 호명해 내고픈 얄팍한 허영심이 작용했다. 정황이 이러했으니 이들 형제가 정림건축을 통해 이룬 업적을 외면했음은 물론이려니와 김정철 사후 이어지고 있는 정림의 행보와 목천재단을 통해 노익장을 불태우고 있는 김정식 선생의 초기 작업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던 것이다.

 

김정식이 문진호와 박승홍과 함께 정림건축을 나와 디엠피건축을 설립하는 시점에 정림건축은 사외 인물 중 이필훈과 이충노를 영입하여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하며 디자인 경영의 혁신과 시스템의 정비를 통해 위기의 정림을 바로 세운다. 그리고 다시 이 둘의 체제를 이어서 현재의 김진구, 경민호 공동대표 체제를 통해 비로소 사내 출신 인물 중심의 후계구도를 정립하였다.

 

정림건축은 형제간의 우애와 신앙심을 바탕으로 했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자라난 게 아닌가 해요.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어요.(중략)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는 생각 많이 했습니다. 정림건축이 건축의 사관학교라는 말이 들릴 정도로 좋은 인재들이 많이 모였어요. 신입사원 교육 뿐 아니라 1년차, 3년차, 5년차, 이렇게 교육을 자꾸 시킵니다. 의무적으로 받아야 해요. 그렇게 인재를 양성해내니 인재의 풀이 생긴 거지요. 결과적으로 디자인이란 게 사람이 해야 하는 거잖아요.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가가 중요하지 아틀리에가 아닌 한 혼자의 능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거든요.(김정식, 2013)

 

큰 조직의 건축사사무소가 아틀리에와 비교되는 것이 인력풀이 풍부하다, 라는 점에서 쉽게 수긍되지만 건축의 사관학교라는 표명은 이례적이다. 연차별 교육 프로그램에 의거하여 양질의 인력을 배양하여 건축 사회에 내보낸다는 경영철학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조직을 위한 조직에 의한 인력관리 측면에서 의의를 찾는 편이 좋을 듯하다. 건축 사회를 위한 좋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의미하고는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당선의 배후에 신예 디자이너 박승홍의 이름을 거명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외부 수혈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럼 정림건축사관학교는 내수용에 불과했다는 나의 지적은 정당한가.

 

전술했듯 김정철과 김정식의 결별 이후 새 경영진 또한 외부로부터의 영입이었다는 사실은 건축인재의 요람임을 천명했던 정림건축사관학교가 여러 면에서 자기 한계를 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때까지 정림건축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던 수뇌부가 조직을 동반 이탈한 상태였으므로 지도부의 외부 수혈은 크게 문제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절체절명 위기 상황에서 정림건축의 오너십(ownership)이 선택한 자기 사람 심기 전략은 자체로 혁신의 상징성과 생존을 향한 강한 정신력으로 표출되었다. 정림건축의 회생 프로그램은 고비를 넘기며 결과적으로 제2의 전성기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 기업의 창업주가 그러하듯 성공적으로 이어갈 후계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김정철 회장 생전에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필훈, 이충노 편대가 단순 외부 처방전은 아니었다는 점이며 그런 배경 하에 새 리더십을 향한 내외의 의구심은 오래지 않아 기우였음이 증명되었다. 김정철 사후 생성된 정림건축문화재단의 독립된 운영과 기존 정림건축 내부 구성원의 재정비를 통한 구심력이 회복되었던 것이다. 과도기의 특수 임무를 직전 수뇌부가 완벽하게 맡겨진 중임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정림 출신의 새 공동대표 체제

그리고 2011년 현재의 김진구, 경민호 체제로 새 진용을 짜면서 업계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일찌감치 건축판에 이름이 회자되어온, 오리지널 정림사람으로서의 김진구(61) 대표가 아닌 젊은 피 경민호(48) 대표에게로 모아졌다. 그를 아는 주변인들은 어렵지 않게 경 대표의 친화력, 영업력 등에 방점을 찍었다. 하루아침에 화제의 중심에 선 경 대표는 이타미 준 건축과 서울건축을 경유하여 1994년 정림건축에 입사 후 17년 만에 대표의 자리에 오른 초고속 승진의 기염을 토한다. 이 글의 작성을 위해 나는 두 차례 그와의 면담을 가졌다.

 

위기관리 능력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극단적 혁신보다는 중간자 역할을 기대했을 거구요. 회사를 안정적으로 꾸려가기 위해선 구세대와 젊은 세대의 조화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 오너십의 깊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경민호, 인터뷰 중)

새 대표 체제에 맡겨진 임무는 지속가능한 회사를 구현하는 것으로 이를 시스템적으로 어떻게 현실로 정착시킬 것인가가 과제로 던져졌다. 이직률이 낮은 정림건축 내부 정황상 장기 근속자에 대한 적절한 예우가 현실적 문제로 직면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보직과 연령 불문 능력과 건강이 뒷받침되는 한 계속 사무소에 남을 수 있는 평생직장 시스템을 구축하여 디자인, 기술, 고객관리의 파트너로서 시니어급 임직원들이 정년 이후에도 공존할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킨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정림건축의 특별함이다.

 

경 대표는 큰 조직의 사무소가 생존하기 위해선 건축의 본질적 어빌리티(ability)를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설계사무소의 본질은 좋은 건축을 잘 해야 하는 곳이며, 영업력 이전에 생산하는 디자인이 우수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방법론적으로는 다양성에 대한 전문성을 키운다는 전략이다. 해외사업, 주거, 의료시설, 복합대형프로젝트, 기타 시설(호텔 등)의 부문별 특화를 위해 자체 세미나를 수행해오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래 도시와 건축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집단으로서 정림건축의 위상을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실천방안으로 현재 장기 발전 실행 매뉴얼을 작업 중에 있다고 했다. 산업의 변화와 시스템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디렉션을 제공함으로써 당장 앞으로 다가온 창립 50주년과 이후 정림건축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디자인/기술/마케팅 파트 공히 전문성을 갖추고 활동할 수 있게끔 시스템 구축을 우선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기회가 많은 회사를 만들자

지난 해 10월 경민호 대표는 박근혜대통령 인도네시아 국빈방문 경제사절단 71인의 일원으로 수행하고 돌아왔다. 산업자원통상부가 주관한 이 경제사절단은 수행할 기업을 공개모집 했는데 건축계에선 정림건축과 희림건축의 대표가 참가하였다. 통상의 대통령 경제사절단이 청와대 혹은 외교부 중심으로 모집되었을 시 대기업 중심의 수행이었던 것에 반해 중소·중견기업에 비중을 둔 이 사절단에 건축사사무소 대표자로서 선택되었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이 없지 않았다.(희림건축 정영균 사장은 베트남 경제사절단 참가 이후 두 번째다.)

 

일본의 경우 경제사절단을 모집할 때 니켄 세케이, 가지마 등 건축계의 큰 조직의 책임자가 거의 매번 동행해오고 있습니다. 외국에 진출할 때는 건축가, 도시 인프라를 개척하는 전문가 수행이 당연시 되는 문화이지요. 제3국가에의 원조자금 지원과 동시에 건축과 리서치 전문가들의 참여를 필수로 하고 있는데 이는 산자부, 환경부가 주도하고 건축가, 엔지니어 등이 순발력 있게 조응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국익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건축가의 위상, 사회적 대우를 인위적 조정을 통해 상승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보다는 전문가 집단이 여러 형식으로 국가의 발전과 사회 변화에 주도적인 모습으로 비출 수 있게끔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지요.(경민호, 인터뷰 중)

 

정림의 혼, 정림건축의 미션

정림건축은 2002년 이래 사무소 작업과 경향성에 대한 연간보고서 『Junglim Architecture Works』를 11권 째 발행해오고 있다. 또한 해비타트 설계 봉사 및 자원 봉사, 정림스튜디오와 연계한 장학제도 및 각 대학 도서 기부, 협회나 학회 후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김정철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설립한 정림건축문화재단(이하, 정림재단)은 정림학생건축상, 《건축신문》, 포럼앤포럼, 라운드테이블, 어린이·청소년 건축학교, 김정철건축문화상을 기획, 주관해오고 있는 등 건축판의 활력을 매개하고 있는 센터로 부상하며 학생 및 젊은 건축가 그리고 타장르 아티스트, 학자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림건축의 미션’을 실행하는 공익법인이라는 기치로 인해 종종 정림건축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없지 않다.

 

목천재단, 정림재단, 정림건축 모두가 두 분 창립자가 뿌리내린 한 나무에 열린 열매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해가 없지 않아요. 그러나 외부 시각과 다르게 재단은 정림건축의 마케팅 홍보를 염두에 둔 기관이 절대 아닙니다. 내부사정을 잘 아는 분들로부터 오히려 정림건축과 정림재단 둘 간의 교류가 너무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정도입니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서로 구속하는 관계는 없을 겁니다. 같은 얼굴로 보이는 것까지는 말릴 수 없지만 철저히 독립체로서의 제 위치를 지킬 겁니다.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다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지요.(경민호, 인터뷰 중)

 

김정철, 김정식 형제 간 다른 성품의 차이에서 오는 불협화음이 끝내 사업체 분리의 수순을 거치게 되었지만 정작 정림건축 내부자들이 느끼는 두 사람의 이미지는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정림의 혼이라는 아우라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후배들의 인식이 그걸 증거한다. 디자인 결정과정과 세대교체에 대한 이견 등이 표면적으로나마 형제의 갈라섬의 배경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의 정도의 심각성을 간접 경험하는 것은 아래 기술된 김정식의 회고에 잘 드러나 있다.

형과 내가 프로젝트를 하면 서로 간섭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끼어들어서 간섭하니까 프로젝트 담당하는 간부는 혼란스러운 거예요. 크리틱 할 때도 자꾸 충돌하고,(중략) 형이 나한테 재떨이를 던지기까지 했어요. 나도 말 안 듣는다고.(중략) 결국 프로젝트를 나누게 되면서부터 큰 마찰은 없었어요. 그래도 개념의 차이는 많아서 크리틱 할 때는 사정없이 얘기 했지.(김정식, 2013)

 

80년대 후반부터 세대교체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게 나 혼자의 생각으로 되는 게 아니고 형과 일치되어야 하니까 형과 얘기를 많이 했어요.

첫째는 후배에게 다 물려줄 것이냐 하는 거였어요. 정림의 재산이 만만치 않게 있었다고. 지적재산권도 그렇고 정림의 빌딩 등 건물 자산, 또 정림의 이름, 네임벨류라 하죠. 그런데 이런 것을 다 물려준다는 것이 가능한 건지 아니면 그냥 와서 일만 맡아달라고 해야 하는지 이런 논의를 10년 이상 해온 거 같아요. 이게 의견일치가 안돼요. 나는 이것들을 다 맡기고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 했고 형은 그걸 찬성하지 않고. 의견이 갈려서 우리의 의견 일치도 힘들었지만 누구에게 맡기냐도 큰 고민이었다고. 디자인 회사이니까 디자인 잘 하는 사람이 할 거냐, 그거와는 관계없이 경영을 잘 할 사람이냐, 그게 헷갈리는 거예요. 둘 다 잘 할 수 있는 후배를 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김정식, 2013)

 

결과적으로 김정철, 김정식 형제의 결별은 한국현대건축에서 이들 형제의 존재감을 재조명케 하는 계기가 됨은 물론, 두 개의 성격 다른 재단과 건축사사무소의 운영을 통해 이전 시기 이들이 이룩한 건축의 업적과 별개 의미에서 특별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면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제껏 설립 후 반세기의 역사를 지닌 건축사사무소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경험한 바 없고, 이 땅에 건축의 새로운 활로와 지평을 마련한 채 신·구세대를 아우르며 지속적인 건축문화 커뮤니티를 가져본 기억이 김수근의, 김수근에 의한 1970∼80년대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그나마도 과거지사이고 보면, 유명을 달리 한 김정철과 현역 노장 건축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정식의 존재로부터 찾을 수 있는 건축문화의 일단은 소중하기 짝 없다 할 것이다.

 

현대건축의 맥락 안에서 정림건축의 본산으로부터 분기한 목천파로써의 디엠피건축과 목천재단을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정림이라는 이름의 거목이 건재하기에 분파의 생성에 대하여 도타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랬으면 한다. 둘이 다르지 않은, 하나의 본산으로부터 발전적으로 파생된, 결국은 하나라는 넒은 의미에서 인식의 공유와 그로부터 더 큰 협력의 힘을 건축 사회에 나눠줄 수 있는 정림건축 가계도의 완성은 한국현대건축의 표정을 한층 명랑하게 만들 것이다. 그랬으면 한다. 지금처럼 상호 견제의 미덕을 즐기며, 우리 건축 토양의 부족한 지점을 찾아내고 보양해온 역할이 오래도록 뿌리내리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뿌리 깊은 나무로 정림의 숲이 무성해질 때라야 비로소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한국현대건축사에 있어서 김(金)의 시대에 대한 의미 부여가 빛을 발할 것이다.

 

취임 후 사장실부터 없앴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표 2인의 개실은 유지하는 것으로 했지만 이 또한 최소화하고자 했습니다. 궁극에는 임직원이 수평적 관계로 조화하며, 회사의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오픈 시스템으로 안착되어야 하겠기에 취한 결정이었어요. 우리는 탄탄한 조직을 기반으로 기후변화에의 대응, 친환경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새로운 기술, 솔루션의 개발에 앞장선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디자인과 기술력, 서비스의 품질에서 최고 평가를 받는 세계적 건축설계 전문기업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경민호, 인터뷰 중)

 

[<와이드AR> 37호, 2014년 1-2월호, 전진삼의 para-doxa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