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俳優)가 되려는 건축전문가

“바그너가 어디에 속하는지를-음악의 역사에는 속하지 <않음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음악사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악 속에서의 배우의 등장>입니다. 생각하게 만들고 공포감까지 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공식화한다면 <바그너와 리스트>라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이보다 더 위험하게 음악가의 성실성이, <진정한> 음악가가 도마 위에 올려진 적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명백히 알 겁니다. 커다란 흥행, 대중에 대한 성공이 진정한 음악가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러한 것을 얻으려면 배우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빅토르 위고와 리하르트 바그너, 이 두 사람의 의미는 똑같습니다. 몰락하는 문화 속에서 대중의 손에 결정권이 주어져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소위 진정함이라는 것은 불필요하고 해로우며 시대의 흐름을 저지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배우만이 <커다란>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로써 배우들에게는 <황금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에게, 그리고 그라는 종족에 유사한 모든 사람에게도 도래한 것입니다. 바그너는 북과 피리를 울리며 연주 예술가, 공연 예술가, 감상 예술가들의 맨 앞에 서서 행진합니다.”

 

이 다소 긴 문장은 F.니체의 글 ‘바그너의 경우’에서 인용(F. 니체, 김대경 옮김, 『비극의 탄생/바그너의 경우/니체 대 바그너』, 청하, 1992, pp.182~183.)한 것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한국건축계의 단면을 들여다보기에 족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전문가 사회에 배우 열풍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의 설명이 그렇다.

 

요즘 우리 건축계는 국내외적으로 무성하게 사건을 만들고, 화제를 낳고,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이전의 어느 시기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래서 늘상 붕 떠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만치 오늘날의 문화판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건축’의 위상은 한껏 부풀려져 있다.

 

중앙과 지방의 크고 작은 도시 공히 행정의 선단에서 건축가의 모습이 쉽게 포착되고, 이들의 도시 비전과 건축적 아이디어가 정책에 옮겨지면서 오래전부터 많은 건축가들이 꿈꿔오던 이상적인 도시 구현을 위한 전문가의 공조 체제가 가시화되고 있다할 것이다.

 

서울시는 초대 총괄건축가(city architect)로 승효상 이로재 대표를 선임하여, 서울의 도시공간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가 시장에서 그를 보좌하는 대리인 체제인 민간 건축전문가로 선회함을 공식화 했다. 이미 선정 운용하고 있는 공공건축가들의 대표성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서울의 도시 비전을 개인 건축가의 이미지와 철학에 의존한다는 천명이기에, 공인 승효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향후 전개될 양상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가하면 주요 건축단체들은 경쟁적으로 지자체 또는 공공기관과 손잡고 유수의 세계대회를 유치하면서 한국 건축의 글로벌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17년 UIA 세계건축대회 서울 유치는 대표적이며, 9월 19일 개막한 제13회 도코모모 세계대회는 그 서막을 알린다는 면에서 상징적이다.

 

문제는 세계대회를 치루는 과정에서 한국건축계의 역량이 강화되는 순기능만큼 역효과도 예상된다는 점이다. 일회적 이벤트의 성과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행사는 진행될 것이고, 한국건축의 연보에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기록될 것이고, 미미한 수준이더라도 건축에서의 국제경쟁력이 강화되었다, 라는 허명을 덧씌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UIA 서울 세계건축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조차 한국건축의 숙원 과제 중 하나인, 건축사 직능3단체의 통합이 이익집단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요원한 과제로 남는다거나, 세계대회 추진 및 준비과정에서 회원 간 불신과 반목으로 단체 내 갈등이 위기감으로 고조된바 있는 도코모모코리아의 경우, 서울 도코모모 세계대회 이후 단체 존폐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날 수 있다는 분위기에서 건축계에서의 세계대회 유치와 실행의 과정은 기형적 한국건축의 상황을 표면화시키는 악재(惡材)이자 동시에 곪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약재(藥材)로 작동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눈 깊은 이들은 모두(冒頭)에서 이미 간파했겠지만 작금의 한국건축계에는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다. 개인의 명성에 기대고, 개인주의로 닿을 수 있는 최정점을 향해 치달으며 일희일비하는 일부 건축계 리더들의 행보가 주변인의 눈을 거스르고 있다.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결정해야 근성이 풀리는 리더에 질질 끌려가는 모(某)단체는 조직과 연대에 대한 기본 인식의 부재로 고사(枯死) 상태에 직면해 있다. 리더십에 대한 경험과 지혜가 부족한 까닭이다. 입으로는 공공성을 강조하지만 행동은 자기중심적이며 독선적인 리더십이 문제다. 조직 내에 견제세력도 없다. 정부기관과의 유착이 개인의 리더십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 되긴 하겠지만 그로써 조직문화를 견인하려는 발상은 우매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사회는, 미디어는 건축가를 배우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마치 바그너가 그랬듯이 건축의 황금시대를 여는 길목에서 일부 건축가는 팝스타처럼 변장한 자신의 모습에서 경쟁력을 확인한다. 언론의 힘에 기대어 스타탄생을 기도한다. 권력을 탐하고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명감으로 치장된 화려한 옷을 걸치고, 그렇게 배우가 되어가는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이에 장년과 노년의 구분이 없다. 건축가가 모여 있는 곳이면 온통 사명감으로 넘쳐흐르고, 사적 네트워크가 공공의 이름으로 강화된다.

 

은연중에 건축가의 활동은 부의 축적과 분배의 시각으로 판단되었고, 사회적으로 받는 예우의 문제에 집착하기에 이르렀다. 건축전문가라는 자격에 대한 보상과 신비주의, 배타성으로 인해 공공선이나 사회적 책임보다 엘리트 의식에 쉽게 빠져든 채 대중과 유리되어왔던 이전까지의 직능의 한계를 자각하게 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건축의 업역 또한 신자유주의의 경쟁적 시장체제에 노출되면서 건축가(집단)의 사회적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한 경쟁과정의 산물로 자리매김한 결과였다 . 건축의 진정성 논의는 시장논리에 파묻혀 버리고 건축가의 지위는 어느새 사업가의 이미지로 대체되고 권력 지향적이 되어갈뿐더러 제도 순응적 건축서비스 공급자로 물러앉은 정황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는 건축분야에서 사회적 정의라는 공동체적 가치의 추구를 통해 건축가 스스로를 정위함이 어려운 이유가 된다.

 

그런 연유로 일부 건축전문가가 저 스스로 배우로 드러나기 위한 전략을 강구하고, 공적 조직을 사유화하고, 미디어를 통한 자기선전에 급급하는 등 정신분열적 행동을 보이는 것을 건축가 개인에 대한 유감이라고 일축하기엔 우리 건축계가 앓고 있는 병증(病症)이 심히 우려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대학에서의 예비 건축가 교육이 여전히 소수의 엘리트를 키워내는 과정이고, 성공한 사례 중심으로 강의되고 있는 터라 정치적 수완이 리더십으로 작동하는 건축사회의 운용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가당치 않을 수 있다. 더욱이 저들의 리더십에 투명성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적 이익과 공공선을 구분하지 못하는 리더십과 그것에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행태가 가능한 것은 건축인의 삶으로부터의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무르익지 못한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까지의 공공성이 정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란 진단은 곱씹을 만하다. 입으로는 공공성을 담지만 행동은 여전히 개인주의 성향에 머물러 있는 우리 건축계의 한계적 상황도 여기에 근거한다.

 

건축(전문)가, 당신은 배우인가?

 

[<와이드AR> 41호, 2014년 9-10월호, 전진삼의 para-doxa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