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정년에 도전하는 석좌교수 건축가 조성룡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초대 원장, 조성룡과의 대화

 

 

성균건축도시설계원(SKAi, 이하 성균건축원) 초대 원장으로 취임한 건축가 조성룡(64)교수를 동숭동 <ubac도시건축집단>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석좌교수로 박혀 있다. 정확히는 석좌초빙교수다. 현재 성균건축원은 서울 명륜동 소재 디자인대학원의 소속으로 되어있으나 그의 대학 내 신분은 당분간 건축학과 교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성균건축원에는 그와 함께 정기용(63)석좌교수와 김영섭(58)교수가 포진하고 있다.

 

성균건축원은 유학이념의 구현을 바탕으로 설립된 민족사학 성균관대학교가 21세기 한국사회와 동아시아의 가치와 지혜를 성찰적으로 전망하며 세계와 교류하는 터전으로 설립된 대학원 과정의 교육시스템이다. 이들은 공공성과 공동성을 추구하면서 사회가 요청하는 올바른 건축가상을 구현하고 건축과 도시공간설계의 수준을 향상하며 국제적 수준의 설계 및 기술개발을 도모하면서 지속가능한 건축과 도시공간의 창출에 기여하겠다는 교육목표를 내세운다. 그러기 위해서 관련 학문분야와 통합연구의 태도를 견지하며 관련 산업과는 상호협력하고, 국제적 네트워킹을 통해 한국건축의 위상을 정립하여 지구촌에서 한국건축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뿐 아니라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고자 한다는 설립취지를 밝히고 있다.

 

조성룡 교수는 서울건축학교(sa)의 초대 교장으로 10년간의 활동을 통하여 대학건축교육의 대안과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해오는데 앞장 서온 대표적인 교수 건축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전임교원 이상의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교육활동에 전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교수의 정년이 65세인 것을 감안해보면 통상의 대학 기준으로 그는 떠날 채비를 해야 맞을 연배임에 분명하다. 그런 것이 작용했을 터다. 명분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전임교수 제의를 거절하고 대신 정년 보장이 불명확하나 성과에 따라서 무한정년에 도전해볼 수 있는 석좌교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나이에 전임교수 자리에 욕심을 내다보면 후배들이 들어앉을 자리가 없잖아요.”

 

일찍이 일본 도쿄의 갤러리 마에서 기획한 “마당의 사상, 신세대 한국건축 3인전”에 초대된 건축가 중 한 사람이며, 2006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 등으로 활약했고,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선수촌 국제설계경기 당선(1983),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01), 김수근문화상(2003) 등을 수상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건축가로서 탄탄한 명성을 쌓아온 그가 끊임없이 건축교육에 관심을 두어 온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생각해온 대학의 역할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사회가 실기해온 ‘중간기록 부재’의 환경을 극복하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의 교육, 연구, 체험의 결과가 곧장 사회로 환원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되는 거지요. 그러나 실무를 해오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학은 현실적응 면에서 간극이 너무 크다고 보았지요.”

 

조 원장은 일본의 저명한 건축잡지 『도시주택』의 사례를 꺼내들었다. 60~80년대에 걸쳐 대학의 우수한 연구인력과 건설사의 지원시스템을 결합하여 일본인의 시각으로 전 세계 도시와 건축, 주거의 방대한 자료를 조사연구하고 그 결과를 실무에 접합시키는 가교 역할을 했던 것, 학교 연구실 서재 한켠에는 그의 건축여정에 빛을 밝혀준 기백권의 『도시주택』이 꼽혀 있다. 바로 그런 교육환경을 조성하자는 발상이다. 요즘 부쩍 떠 있는 화제어 ‘실용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신실증주의적 사고관이 읽히는 대목이다.

 

“다산 선생이 사진기를 가지고 작업했단 사실을 아나요? 어디선가 카메라 옵스큐라의 방식을 응용하여 벽에 비춘 바깥세계의 영상을 그림으로 옮겼단 기록을 본 적이 있어요. 조선 사대부가에서 실용과학에 탐닉했던 고증이 아닐 수 없지요.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가 성균건축원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교육의 형태가 말이죠.”

 

고려시대와 조선왕조를 연결하는 1천년의 시간대가 공존하는 수도 서울은 그 긴 시간만큼 유학의 본거지로서 도시와 건축이 조영되어온 유서 깊은 역사도시다. 바로 그 중심에 성균관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조 원장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정기용 선생과는 서울건축학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분이 관여했던 함양의 녹색대학에서 그 뜻을 펼쳐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요. 이후 건축과는 무주로 이전했어요. ‘풍경, 풍토, 풍수’를 교육의 근간으로 하는 학과를 만들어 우리 건축의 특질을 재정립해보는 계기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학부과정이라는 점이 걸렸지요. 결과적으론 교육 참여와 동시에 실무를 해야 하는 우리로선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있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어서 중도 하차를 한 격이 되고 말았지요. 그럴 즈음 성대에서 제의를 받았던 겁니다. 그 전까지는 솔직히 별 생각 없었어요. 김 교수야 성대 1회 졸업생이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우리야 뭐 별다른 연고가 있을 턱이 없었지요. 총장님과의 대화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성균관의 정체성과 우리가 찾고 있던 과제가 일치한다는 생각으로 모아졌어요. 바로 유학의 근본으로 조영된 이 나라가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근대화과정 이후 역사적 단절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연속적인 맥락에서 회복하자는 것이었고, 총장님도 그러한 우리의 밑 생각에 흔쾌히 동조한 겁니다.”

 

그럼, 한국예술종합교(이하 한예종)의 연구소 지위로 제도권에 편입된 서울건축학교와는 어떤 차이를 두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곳은 현재 이종호 소장이 전담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건축학교의 존재가 부인되지 않는 한 그 체제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던 조 원장을 포함해서 성균건축원의 구성원 면면들이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서울건축학교 원년멤버들의 분열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모르고 하는 소리지요. 이종호 교수와는 어떤 형식으로든 공조하기로 약속했어요. 굳이 두 학교의 차이를 말하자면 인적네트워크의 구성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한예종은 문화예술 장르의 아티스트들과의 교육적 연대가 인적 네트워킹의 중심이라면 성균건축원은 다양한 학제간 인력의 네트워킹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한예종이 예술지향적이라면 성균건축원은 실용주의적이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둘은 서울건축학교를 모태로 하는 이란성 쌍둥이라는 답변이다. 개원 첫 학기를 맞은 올해는 건축도시디자인과에 10명을 모집했는데 공고 후 1주일도 안 되어서 정원을 초과하는 기대이상의 지원‘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건축도시디자인과는 건축과 도시의 이론 과목과 설계과목 등 3개의 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강사는 3인의 내부 교수진과 해당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평가되는 외래교수들이 각 과정별로 2~3주씩을 분담하여 가르친다. 이 학과는 풀타임으로 운영되며 2년 간 이론과 실무 교육의 병행을 통해서 졸업 후 당장 필드에서 소임을 다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이 된다.

다른 하나는 공공건축 거버넌스 과정으로 행정 및 기술직 공무원과 건설사 기획담당부서원 및 민간 건축전문인들을 모집대상으로 한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느니만큼 야간수업으로 이뤄지며 실기보다는 이론 위주의 교육방식이 준비되고 있다. 이번 학기는 모집하지 않았다. 2009년도에 개설될 예정이다.

 

조 원장은 성균건축원이 이전의 서울건축학교가 전용할 공간과 전담 교수 인력의 부재로 인하여 하지 못했던 여러 과제들을 적절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공공건축리서치 과정을 통해서 최적의 방법론을 개발하고 기존의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및 건설 및 건축사사무소가 운영하고 잇는 기업연구소 등과의 연계를 통해서 실질적인 과업을 수행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같은 작업을 통해서 우리 땅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공간과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며 지속가능한 건축과 도시만들기와 지역적인 풍토와 풍경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접근하여 한국건축의 잠재성을 특별한 가치로 바로 세운다는 것이다.

 

조성룡, 정기용, 김영섭. 한 대학 한 공간에 둥지를 틀은 3인의 건축가는 3인 3색의 건축철학을 구현해온 우리 건축의 대표주자들이다. 건축도시설계원을 설립한 성균관대학교의 실험은 성공할 것인가? 현재의 기류는 우려보다 희망이 앞선다. 일단은 공공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이들의 실천적 삶의 궤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응원이 크다. 유교에 바탕을 둔 철학적 사고와 실용적 해법의 제시에 무게를 두고 있는 성균건축원의 교육이념이 구체성을 띠고 드러나기까지에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외적으로 성균건축원의 개원을 알리는 초청강연이 지난 3월 28일 명륜동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조병두홀에서 개최되었다. 그날 강연자로 나선 사람은 와로키시(Waro Kishi, 58) 교수였다. 김 교수는 그를 안도타다오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일본건축가로 소개했다. 그는 1993년 교토에서 성균건축원과 같은 형식의 이론과 실무를 연결하는 교육시스템(Kyoto Institute of Technology)을 도입하여 운영해오고 있는 교수 건축가이기도 하다. 현대건축의 유행적 판도에 휩쓸리지 않고 일본건축의 풍토와 모더니즘건축의 원리들을 통합적으로 자기 건축의 현대적 언어로 승화시켜오고 있는 건축가이다.

“나는 교토의 건축가입니다.”

강연에서 그가 뱉은 일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가 성균건축원의 첫 번째 초청강연자로 나선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인터뷰 및 정리: 전진삼(와이드AR 발행인)

 

[<와이드AR> 3호, 2008년 5-6월호, 와이드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