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건축의 수난, 예고된 재앙?

건축계가 쉬쉬할 수밖에 없는 이유

 
서울 장충체육관 건너편, 건축가 김정수에 의해 설계된 장충교회가 어느 날 갑자기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교회건물이 공사 중에 있다. 1980년대 중반 박길룡의 화신백화점 철거와 김중업의 제주대학교 본관의 철거를 신호탄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근현대건축의 소중한 유산이 한둘이 아니다. 김중업의 대표작이라 평가되었던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이 건축계의 끈질긴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이 사라졌고, 2000년대 초반에는 르 꼬르뷔제의 샹디갈 행정청사 장관블럭 입면디자인을 수행했던 그의 행적이 묻어나는 초기작 인천해무청사는 지역사회와 건축계의 관심 밖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사라졌다. 김수근의 한국일보 사옥은 그의 후배들이 계승하여 운영하고 있는 공간사옥에서도 한눈에 잡히는 서울시내 한복판에 서있었지만 이렇다 할 대응 없이 도심지 재개발사업에 밀려 근년에 사라져버렸고, 일일이 거명하기에도 벅찬 1세대 한국현대건축가들의 작품들이 훼손, 변형, 철거되는 수순을 밟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한국현대건축의 수난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1세대 건축가 작품의 수난. 예정되었던 수순?

김정수(1919~1985). 알루미늄 커튼월 공법의 명동성모병원, 종로 YMCA 빌딩과 직경 80m의 대공간을 만들어낸 철골 돔구조의 장충체육관, 여의도국회의사당, 콘크리트 패널이 리듬감 있게 반복되는 입면으로 완성시킨 PC공법 적용의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을 설계한 김정수는 1세대 한국현대건축가들 가운데 특히 신공법, 신기술의 구축술에 천착한 작가로 분류된다. 그가 이룩한 건축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뚜렷한 연구물(기록 작업)이 명료하게 추적되지 않는 것은 무척 의문되는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건축학계와 건축사회 내부에서의 저급한 관심이 이 건축가의 존재를 밝혀주던 건물들을 빠른 속도로 지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독특한 양식을 선보였던 감리교신학대학 내 웰치교회가 새로운 채플을 건립한다는 이유로 2002년 철거되었고, 최근엔 장충교회가 같은 운명을 맞았다. 표면적으로 교회가 요구하는 기능실의 부족, 즉 교육관, 주차장 등 부대시설의 확충을 목적으로 신축이 결정되었고 그 결과 철거되는 비운을 맞은 것이다. 새 건물의 설계자로 선정된 건축가로서도 기존 건물이 갖는 건축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보존을 주장하기엔 능력 밖의 일이었으리라고 판단된다.(장충교회 건은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김수근(1931~1986). 한국현대건축의 논의에서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공간’의 의미를 확장시킨 건축가로 평가되는 이다. 초기 그의 작업내용이 일본에서 익힌 모더니즘 건축의 반향이라는 점에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동시대 건축가들에 비해 지명도 면에서 상대적으로 ‘행복한 건축가’로 불리었던 김수근의 초기작 상당수가 오늘날 멸실․훼손되었거나 철거의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세운상가가 철거를 목전에 두고 있고, 최근 외벽을 허물지 않는 조건으로 문화재심의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면서 화제가 된 타워호텔의 경우 향후 전개방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건물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미(6.25전쟁에 참전한 연합군 16개국과 한국을 상징하여 17개 층으로 건축됨)도 중요하지만 유지 보존상태가 불량했다는 점에서 건물소유주가 벌이는 리모델링 작업에 대해서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도 채집된다. 기존 건물의 건축 가치에 대한 연구 성과가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형보존을 운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리모델링 업체에 따르면 이 건물의 상층부는 호텔 기능을 유지하되 저층부는 콘도 기능을 확충한다고 한다. 현재는 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며 오래지 않아 외관에 대한 입면 조정사업이 이뤄질 전망이다. 타워호텔의 리모델링 설계는 간삼파트너스 종합건축사사무소가 진행하고 있다. 전화로 작업진척상황과 외관 디자인 관련하여 문의했으나 뾰족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일간지(이정훈 기자, ‘건축거장’ 김수근 주요작품 사라지다‘, 한겨레 2008년 5월 5일자 기사)에 보도된 여파가 컸던 탓이다.

“현 단계에선 밝힐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현재는 인허가 이전 단계다. 보다 상세한 것은 건축심의과정을 마친 후라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상황은 타워호텔 내부 대수선 공사 진행 중이다. 외부 입면 디자인 콤페에 당선한 사실은 있지만 그 안은 폐기되었으며 새로운 안으로 디자인 조정 중이다.” 설계담당 E소장의 말이다.

 

김중업(1922~1988). 현대건축의 세계적인 거장으로 꼽히는 르 꼬르뷔지에의 문하생으로 유일한 한국인 건축가의 프리미엄을 누렸던 그는 한국건축의 전통적 형태미를 현대화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표현주의 경향의 꼬르뷔지에 후기 스타일을 완성한 건축가라는 최대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건축가다. 건물 보존의 사회적 합의체 또는 시스템이 준비되지 못했던 사이에 불거진 사태로서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이 철거된 아픔은 이어지는 한국현대건축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 한국미술관도 도로확장을 이유로 건물의 일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겪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사태는 건축가 개인의 지명도를 무색케 하는 정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김중업의 존재에 대하여 조차 대학에서의 무관심이 여전하다는 점은 환기되어져야 한다. 그와 관련한 연구 성과물이 생산되었던 시간대를 추적해보면 대개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개략 10년에 걸쳐 집중되어 있다. 그 이후는 소강상태다. 건축의 역사연구에서 근대건축이 별도의 장르로 구분되어 학회를 구성한 것도 오래지 않은 것을 고려하건대 현대건축 초창기를 풍요롭게 장식했던 김중업 건축과 동시대 건축가들의 건축세계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한두 학자의 손에서 갈무리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창조적 파괴’의 현장에 서서, 다른 건축가의 시선을 만나다

장충교회 공사장 가림막에 붙은 공사안내 표지판에 설계자로 명기된 ‘공간’(Space Group)을 찾았다. 타워호텔의 리모델링이 타 건축사사무소에서 진행된다는 것만으로도 착잡함이 컸을 김수근의 후예, 공간이 장충교회를 허물고 새로 짓는 교회건물의 설계자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협력차원에서 한동대 김학철 교수의 작업을 지원했다. 처음엔 정림건축과 진행하려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상림 대표와의 논의 후 공간에서 김 교수의 작업을 마무리 짓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이전 건물이 김정수 선생의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건축가에 대하여는 뒤에 알게 되었다. 기존 건물의 기록 작업 등에 대해선 김 교수 차원에서 이미 해결되었으리란 막연한 믿음으로 재론치 않았다, 기본설계가 완성된 이후 회사 차원에서 이어받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별 고려대상이 못되었다.” 설계담당 A소장의 말이다.

원설계자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수확이었다. 이메일로 김 교수에게 작업수행 과정과 철거한 기존 건물에 대한 설계자의 입장 등을 질의했고 다음은 그가 보내온 답메일의 요지를 정리한 것이다.

“장충교회에 대한 생각은 2005년 한국건축가협회가 주최하는 건축대전에 초대작가로 출품 시 생각을 표현했다. 시간이 있으면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여유를 가질 수 없게 짜인 금년도 스케줄로 인하여 당장은 어렵다. 그리고 본관이 완공 되려면 앞으로 약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 때 가서 생각했으면 좋겠다.”

단문의 답메일에서 김 교수가 남겨준 단서는 ‘2005년 건축대전 초대작가부문에 제출한 설계자의 생각’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들춰봤다. 그 내용은 장충교회의 설계에 임하는 건축가의 시대인식을 담은 “More is Bore”라는 제하의 짧은 글이었다. 기존 건물에 대한 어떠한 의사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설계목표로 제시된 그림설명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장충교회 설계해법으로 ‘보전(保展)’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보호(保護)하면서 발전(發展)시킨다는 뜻이며, 대지축제(Site Celebration)의 개념’이라고 한자 조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기존 건물을 무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김 교수의 이 같은 언질에 감춰져 있었다. 건축된 결과로 판단 받겠다는 의사에 다름 아니다. 그는 건축가이며 교수이면서 동시에 목사이기도 하다. 장충교회측이 설계자를 결정하는데 이 같은 개인의 이력이 작용했을 터다. 당장은 답변을 유보하고 있으니 보다 상세한 질의는 이 건물이 최종 완공되는 2009년 12월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성약교회 철거 현장에 다시 서다

이제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민현식(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겪은 근년의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목해보자. 한때나마 그의 건축적 판단과 기호를 수용했던 클라이언트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6월 19일 성약교회의 철거현장을 재방문했다. 4년 전 철거한 현장은 최근까지 방치 되었다가 얼마 전에서야 공사를 시작한 모양이다. 주변은 성약교회가 건립되던 당시보다도 더 많은 모텔, 여관 등이 들어서 있었다. 정주성이 떨어지는 입지여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같은 주변여건은 교세 확장의 악재로 작용했을 것임을 쉬이 짐작케 한다. 결국 교회 측은 교인들이 떨어져 나가는 교회의 위치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다행히 의정부역 주변의 개발호재에 땅값은 부풀어 올랐다. 그 돈이면 새로 시작하고도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 섰을 법하다. 교회 측은 건물을 매각하고 밀락동에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교회 건물로 이전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당일은 오피스텔 신축공사를 위하여 건물 잔해 철거 및 반출작업 중에 있었다. 눈이 퀭하였다. 현장을 배회하는데 이전 성약교회에 대하여 잘 안다고 밝힌 K씨가 다가와 말했다.

“건축계에는 의미 있는 작품이었을지 몰라도 실사용자인 교인들에겐 불편했던 건물이었다.” 성약교회의 실험성에 열광했던 건축계 내부와 한 사람의 동조자였던 필자조차 무안해지는 비판이었다. 1997년 8월호 월간 <건축인POAR>. 제1회 크리악어워드 후보작에 민현식의 성약교회가 선정된다. 그리고 두 편의 추천 글을 대신하는 비평문을 게재하였다.

“민현식의 성약교회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그렇고 당시의 초기 의도에서도 너무 멀리 동떨어진 우리 교회에 대한 분명한 안티다. 그것은 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항의자)가 오늘의 교회에 던지는 강력한 언어적 이의제기다.”(함성호)

“민현식의 성약교회는 상식을 거부하는 건축가의 쾌거다.”(전진삼)

설계자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누가 뭐래도 민현식은 오늘날 한국건축의 지성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아니던가?

민현식은 일단 자신과 자신의 작업이 검증되지 않은 단계에 있으며, 그런 이유로 성약교회가 ‘한국현대건축의 수난’이라는 필자의 논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까지 건드릴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환기시켰다. 다음은 성약교회의 철거와 관련하여 짧게 정리해서 보내준 그의 답메일을 요약한 것이다.

  1. (교회 측은) 성약교회의 철거 등에 관하여 설계자에게 협의한 바 없다.
  2. (설계자로서) 풍문으로 듣고, 그리고, (언젠가 건축잡지) ‘C3’에 실린 사진을 보고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3. 물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집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에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제안이 기존의 교회공간형식과는 너무 달라(?), 설계 당시에도 설득이 어려웠고(다만, 목사님, 건축위원장 장로님, 그리고 청년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사가 되었지만, 일부 교인들은 반대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준공 후에도 이런 저런 소문들이 무성함을 듣고는 있었다.
  4. 단지, 현재는 좀 불편(?)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5. 또한, 이 교회의 위치(문제)이다. 아시다시피, 의정부역 부근은 말 그대로, ‘러브호텔’로 가득한 곳이다. 교회가 이런 환경에 있다는 게 좋지 않다는 정설(?)이 있었고, 물론, 주거지가 아니기 때문에 상주하는 주민은 거의 없고, 소위 교회의 부흥이 잘 될 리가 없는 입지였지만, 나로서는, 이곳의 기독교 공동체가 오히려, 이 지역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합리화(?)가 전제되었다.
  6. 물론 이 곳은 상업지역이다. 이 땅을 팔아서, 주거지역, 또는 아파트단지의 종교 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할 만큼 지가가 높은 곳이다.
  7. 이런 저런 사유로, 교회에서 이 땅을 팔고, 주거지역으로 옮기는 걸로 결정하였으리라 짐작한다.

“이 모든 사건은 실은, 설계의도와 실현이 너무 내 자신의 강한 주장에만 경도되었지 않았나 지금도 반성하고 있으며, 이 일로 하여, 깊은 성찰이 있었음을 밝힌다. 단지,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이 이 시대가 가진 문제, 특히 자본주의 또는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해야 할 근본적인 역할에 반하는 것이 아닌 가 우리 모두 성찰해볼만한 일이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논의와 대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라고 민현식은 답했다.

1년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 응했던 민현식의 발언이 눈길을 끈다.

“민 교수는 ‘집을 만들 때 진짜 문제는(형태의 아름다움보다는)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계를 중요시하는 그의 철학은 ‘비움’으로 이어진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그 속에 들어 있는 집의 기능이 고정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리라.“ (김인수 기자, ‘건축명인을 찾아서-13’, 매일경제 2007년 6월 17일자)

성약교회는 열악한 주변 환경과의 마찰을 예견하고 그것을 교회라는 공동체의 순기능을 통해 극복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뛰어든, 마치 오지의 선교사와 같은 직임을 수행했으나 급기야 지역정서에 의해서 참살당하는 수난(그것은 ‘순교’와 많이 다르다.)을 겪은 것이다. 실사용자는 끝내 건축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고, 교회는 건물매매 차익에 중심을 잃은 듯 급기야 건물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이것은 건축가의 작의가 실패했다는 비판에서 민현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과 통한다. 한편 교회건축의 정위에 대하여는 민현식이 제기했듯 자본주의 또는 교회건축의 향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후 첨예한 논의 혹은 논쟁이 필요하다는 점이 부각될만하다.

 

건축에 대한 예의의 실종?

이처럼 건축계에 불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우리 사회의 건축에 대한 예의가 실종된 정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실제적으로 자본에 종속된 건축의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 익숙한 개별 건축인과 건축사사무소들이 이런 상황에 대하여 일일이 토를 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업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로 심화될 수도 있겠고 설령 그런 인식을 바탕에 깔고 저항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칫 건축계 내부자 편들기 식의 소산으로 비추일 개연성이 높다. 문제는 그 틈을 이용해서 건물소유주는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건축가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훼손하는 행위를 일삼는 것이며 건축계는 그것을 알면서 조차 방조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으로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주장을 하는 건물소유주들의 판단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적극적인’ 방도란 문화재 지정 등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의 ‘소극적인’ 행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시간의 누적이 필요하고, 건축가치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건축가의 설계저작권이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은 건축대상을 벗어난 타 매체를 이용한 권리행사와 보호에 국한되는 것이다. 사진 및 인쇄물 등 시각자료에서만 건축가의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건물은 사라지고 인쇄물만 남는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실종된 이유를 따져보자.

한국현대건축의 ‘빛나는 유산들’이 비명에 횡사하는 배경 뒤엔 건축계 구성원들이 간과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 땅의 초기 현대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관심부재와 그로인한 연구 성과물이 취약한 결과에서 기인한다. 둘째, 어떤 건축을 남겨야 되는가에 대한 건축계 내부 합의의 부재다. 셋째, 건축의 민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마련되었다고 하는 대중을 향한 수많은 건축프로그램 대부분이 사실은 건축계의 자기 최면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고독한 건축사학자, 희망을 쏘다!

탈고 즈음하여 한 편의 좋은 연구 자료를 확보하였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발행한 『서울연구포커스』제56호(2006년 5월 15일 출판)에 ‘서울소재 초기 현대건축물의 보존 및 활용방안:1950~1960년대 대표적 건축물을 중심으로’라는 정인하(한양대)교수의 글이 실렸다.

이 연구 자료에는 근현대 건축문화유산에 관한 현행 정책의 문제점이 제기되어 있고, 서울소재 ‘초기 현대건축물의 보존 리스트’가 작성되어 있다. 또한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사례로 프랑스 문화건축물 보존정책이 주는 시사점을 열거하고 있다. 끝으로 보존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활용방안까지 세심하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항목별로 주요한 이슈를 옮겨보면 이렇다.

1)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등록기준이 건설 후 50년 경과로 정해 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현대건축물을 양산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 1세대 건축가들의 초기 작품이 멸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국이 도입하고 있는 ‘30년 법칙’과 프랑스가 적용하고 있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건물들을 대거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는 것과 크게 대조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 우리의 경우도 많은 양의 근현대건축물들이 데이터베이스화 되었으나 그것들을 분류하고 가치 평가하는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단순 열거식 건물의 목록화 작업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3)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등록문화재를 선정할 때 사회적 가치는 중시된 반면 건축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는데 이유인즉 해방이전의 건물들이 수적으로 많지 않았기에 가능했으나 향후 1950년대 이후 건물의 수가 많아 건축적 가치판단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미리부터 대비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정교수는 서울소재 초기 현대건축물의 보존리스트 33개(표 참조)를 작성하였다. 그가 활용한 선정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선정과정에서의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나 해방이전의 건물에 비해서 수도 많고 지어진 지 오래지 않아 건축계 내에서의 합의도출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50~60년대에 발간된 건축잡지들에서 인용되었던 건물과 주요 건축비평에서 인용된 건물들을 모두 조사했고, 1990년대 이후 발간된 한국현대건축에 관한 주요 책들에서 자주 인용되었던 건물들을 찾아 인용빈도를 가려 총 41개 건물을 도출해냈다. 그 다음 건축가의 지명도, 기술적 가치, 미적 가치를 충족시키는 건물들을 새로이 추가한 후 그중 지방소재 건물과 이미 멸실된 건물 및 초기 원형이 많이 훼손된 건물을 제외하여 보존 리스트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이미 전제했듯이 건축계의 합의로 구축된 보존리스트는 아니어도 건축학계 일각에서 이러한 연구 성과물을 생산해 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아도 좋다.

 

맺음말

다음은 건축계 내부의 문제다. 사라져가는 건축을 애도하고 저항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거를 전후한 건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건물 기록 작업의 일상화)가 통용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요구된다. 의정부 성약교회에서처럼 적어도 건축계가 존재 의미를 공조했던 건물이 건축가도 모르는 사이에 용도 폐기되고 결국 철거되어버리는 사태는 건축인 모두의 가슴에 파렴치한의 비수가 꽂힌 것과 같은 의미다. 그것이 어디 성약교회만의 문제이랴.

무대포로 건축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가 변형, 철거 등의 사안에 접하여 기존 건물의 가치를 음미하고, 설계 저작권자와 소통하며, 철저하게 기록하는 절차를 통하여 하나의 건물을 역사화 시키는 작업이 공명되는 사회분위기의 조성이 필요하단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건물은 대지 위에서 짓고, 허물고, 다시 짓는 순환의 고리 안에 존재한다. 그 가운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 건물부터 허접한 건물까지 종도 다양하다. 그러나 어느 건물이 오래도록 영속할 지 가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건축계가 끊임없는 예방과 치유의 규범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진삼, <와이드AR> 4호, 2008년 7-8월호, 와이드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