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중반 <공간> 편집장 재직 시 일본인 사진작가 오사무 무라이 선생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다. 김수근 선생의 경동교회 외부 전경 사진 한 컷을 위해 장시간 기계 옆을 지키고 서서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는 무용담이 늘 그 분을 따라다니곤 했다. 아날로그 건축사진 시대의 정점에 서있던 분이다. 말년에 이르러 건축사진 보다는 자연 속 사물의 촬영에 관심을 기울이며 생을 마감했던 작가의 일생을 돌이켜보면서 어느 순간 그가 평생의 직업으로서 다져온 건축사진가라는 짐을 내려놓고 매순간 자연의 사물 바라기를 통해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진솔한 모습이 두고두고 크게 다가왔다.
건축사진가의 시작은 어느 지점부터 이며, 중간과 끝은 어디인가?
이 글은 오늘날 이 땅에서 건축사진가의 대오에 서있는 일군의 작가들에게 던지는 질문지이자 질문을 보충하는 설명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작금의 건축 상황은 종과 규모의 다양성으로 크게 분화되어 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상황은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지만 특수 목적형(기업, 혁신 등) 신도시는 물론이려니와 기존 도시 및 전국의 산촌, 도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피사체로서의 건축대상이 지금만큼 풍성한 적이 있었을까? 그것은 건축사진가의 수적 성장세로만 보아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결과적으로 지난 20년 사이에 직업으로서의 건축사진가(이하, 작가)의 업역이 선명하게 정위되고, 활성화 된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그와 동시에 국내 작가의 사진작품의 질이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다. 기계의 디지털화에 따른 사진의 조작술이 첨단화되면서 어느 순간 건축사진의 질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발전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미 사진을 소비하는 주체들도 이러한 변화에 쉽게 물들었고, 사진의 순도가 현장성에 있기보다 스튜디오 모니터 앞에서 결정된다는 인식이 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반면 필름을 고집하는 작가는 시장에서조차 환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의 존재감은 자동 소멸되었다. 그 사이 작가 고유의 언어로 드러나야 할 건축사진의 구도와 디테일의 수법도 점차 차이를 지워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작가는 필자가 전술한 바 있는 다양하다는 건축대상의 표상이 결코 다양하지 않다는 혐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건축사진의 양상이 작가성향 기반에서 도구 기반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에 기분을 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해는 말라. 여전히 사진의 승패는 현장성에서 비롯된다는 작가 본연의 입장을 지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은 작가와 현장에서 만나는 대상과의 치열한 대화의 산물이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건축사진 작업의 의뢰인들이 작가를 선별하는 기준에는 작가의 개성에 기대고 있다는 확신을 세우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반대로 의뢰인 스스로가 촬영 대상에 대한 자기 주관을 확고히 한 채, 작가의 창의적 시선을 묵과하는 등의 부정적 시각이 농후하다. 건축생산 시스템이 자본과 기술력 본위로 구조화되면서 건축사진의 실체도 그 안에 별다른 저항 없이 포섭되는 방식이 눈에 띈다. 작가가 인정하든 말든 건축사진의 개성적인 프레임을 회복하는 것은 이 시대 작가 개인과 그룹 구성원의 사명이자, 책무가 되어야 한다.
작가에게서 무한대의 서비스 정신을 요구하는 세태에 맞서서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저들 의뢰인 다수는 이미 디지털 기계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준 작가의 대열에서 호시탐탐 작가의 세계를 넘보는가 하면, 사진을 보는 비평적 안목을 앞세워 작가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대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작가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단지 건축 시장의 확장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배면에는 굳이 작가별 특이점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시장의 판단이 내려진 분명한 이유가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사진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공식’화 되고, 그로부터 비용절감, 기간단축, 무한 서비스 등으로 시시각각 작가를 압박해오는 시장의 기류를 정확히 읽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금번 갤러리MOA에서의 그룹전이 작가 개개인들에게는 앞선 필자의 진술을 부정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길게는 30년, 짧게는 10년 안팎의 작가 이력을 지닌 이들 대부분이 건축사진에 관한한 고등교육의 수혜자가 아닌 자생적, 자구적 교육 프로그램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공통점과 작업의 특성에서 오는 개별적 행보를 통하여 연대감의 필요성을 갖지 못하였던 것과 그 결과 사진계 전반에서 건축사진하는 이들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 등으로 말미암아 전시기획의 출발이 어떠했든 이전 어느 시기, 어떤 전시에서보다도 사회적 포지셔닝에 대한 제고가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매우 중요하다.
여전히 우려되는 바는 통상의 그룹전이 그러하듯 그룹전 구성원들의 존재 확인만으로 전시장을 채우고 돌아서는 것이다. 작가는 출품한 사진으로 말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각자는 자신의 건축사진이 동료들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애써 설명하려고 들어야 한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러한 시도가 이 책자에 일부 수록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건축의 생산이 획일화된 시스템의 산물로서 개성을 잃고 있듯이, 그래서 자본가들은 세계적 시그니처 건축을 선호하듯이, 건축사진의 위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작가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기를 바라는 바다.
근년에 건축판에서는 ‘중간지대 건축, 건축가’라는 신선한 주장이 돌고 있다. 건축생산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 토대가 대형 개발 사업을 주도해온 자본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우리 주위의 소자본에 의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인식 하에 평소 돌아보지 않았던 키 작은 건축에 중소 건축사무소와 중소 건설회사 등이 손을 맞잡고 시장을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길모퉁이 건축’이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는 청사진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이것을 롱테일의 경제학에 의거하여 응원한 바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위 80%의 계층이 쏟아내는 물량 총합의 시각이 아니라 그것을 기회로 삼아 정성적인 작은 건축의 개성발휘로 전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적었지만 특이점(singularity)의 사각지대에서 살아온 일반 대중의 눈높이와 건축의 민도가 동반 성장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건축사진 또한 작가의 개성을 회복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 개인의 취향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식에서의 차이애서 개성을 논하는 것은 오늘 이 자리의 작가들에겐 불손한 말이다. 내가 주문하는 바는 작가 고유의 실험정신과 서사적 자기구성력을 통해 건축사진의 지평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일정한 시기에 도달하면 사진가로서 그 또한 행복한 말년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에.
[전진삼, 단행본_한국건축기행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