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舊 잡설, 수수께끼 같은 건축계, 누가 神占을 보았나

12월이다. 주변이 색깔(진영)론으로 시끄럽다. 좌파와 우파, 민족과 국가 사이의 서로 다른 주장들이 이합집산하며 기우뚱한 균형을 용납하려들지 않는다.

이종건비평집 《건축 없는 국가》가 출간되었다. 보수에 대한 저항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종건이 진보를 주창하는 비평가는 아니다. 그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대한 내밀한 관찰을 통해 건축적 삶의 비루함을 경계한다. 그가 쓰는 통렬한 비평 글을 통해 독설을 운위하는 인간들 대부분은 그가 따뜻한 비평가라는 사실을 놓치고 산다. 허접한 세상과 냉정히 선을 긋고 주체적 자아를 투영한 이종건 식 글쓰기가 우리 건축계에 널리 공명되지 못하고 배를 쥐어 잡고 한바탕 웃고 마는 잡설로 내몰리는 작금의 세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위기의 시절임을 경고한다.

‘공간사옥은 부동산이 아니다. 문화다’ 김수근의 대표작인 공간사옥의 공매일(11월 21일) 사흘을 앞두고 김수근문화재단이 주최한 기자회견장에서 공공재로 거듭나기를 기도했던 건축과 문화예술계의 염원은 미술자본의 상징적 인물인 김창일 아라리오 미술관 관장의 매입 의사가 언론에 드러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공간이 떠난 사옥이 더 이상 공간사옥일 수 없다는 언설이 가림막이 되어 새 주인은 김수근의 분신과도 같은 이 건물에 새 기능과 새 이름을 붙일 태세다. 150억 원이라는 매매가의 숫자적 가치 이상으로 의미 부여된 이 건물을 건축계가 한 마음으로 붙잡을 수 없었다는 것은 우리 안에 건축이 문화임을 스스로 부정한 방증이다.

민간자본에의 공매를 앞장서서 저지했던 승효상의 행동을 눈엣가시처럼 보는 시각은 이 집을 매각해야 공간그룹의 회생 프로그램이 정상 가동됨을 알려온 이상림의 태도를 굴절시켜 보는 시각과 수위를 같이 했다. 승효상이 발을 동동 구르며 공공의 시설로 안착시키려고 했던 저간의 행동에 진실성을 의문하는 부류가 도처에 난무했다. 그가 홀로 ‘건축 대통령’처럼 분투했으니 권한과 시선의 집중을 시기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상림은 어떠했나. 김수근과 장세양의 뒤를 이은 세 번째 공간의 수장으로서 《공간》 잡지의 매각에 이어 이 집까지 매각 처분해야 할 입장에 처함으로써 그는 공간의 정신이라 일컬어지는 두 개의 상징을 한꺼번에 전부 상실하는 최악의 경영자로 낙인찍혔다. 그뿐인가. 승효상과 이상림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엇박자를 통해 이번 공간사옥의 매각과 관련한 사태를 전후해서 건축계는 사실상 봉합되기 어려운 다층적 분열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출간 즉시 반향이 들끓었던 이상헌의 비평집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는 건축계 구석구석에 산재한 문제점들을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건설이 건축을 대체한 나라라는 통박은 현금의 한국건축계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지시한다. 그는 건축계가 소통보다는 무관심과 냉소, 상호 배제의 정치학에 물들어 있다고 판단한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말하는 아카데믹 맑시즘의 전형이 건축지식인 사회의 표정이다. 늘 남의 일처럼 건축의 사건을 응시할 뿐 구경꾼 일색인 건축계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성숙된 구경꾼의 재림을 주장하는 것이다.

날고 긴다는 중앙의 건축가들이 공공의 이름으로 관속 건축가가 되어버린 양태는 어떠한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야 건축의 행위를 반듯하게 할 수 있다는 세속적 관점을 옹호하기엔 작금의 건축계 전반에 기회주의적 사고관이 판을 치고 있다. 왜 공공이어야 하는가. 공공만이 답인가? 굳이 이해하자면 일거리가 현격하게 줄어든 상황에서 프로젝트의 금맥을 보고서도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사이 건축의 전문성도 권력화 되어 감투의 높낮이로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반면 건축가들이 몰려다니는 꼴을 못 보는 건축가들도 생겨났다. 점차 건축계에 직립형 인간은 사라지고 땅에 수평한 동물의 근성만 부유하고 있다고 폄훼하는 이들의 시선에서 이것은 또 다른 위기다.

정재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 홀’은 서울시 신청사의 건립과정을 추적하며 1편 ‘말하는 건축가’에 이어 ‘건축 신드롬’의 물살을 갈랐다. 그러나 흥행에서는 참패를 피할 수 없었는데. 왜 일까. 정 감독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예고된 상황이었다. 건축을 신드롬으로 호명하는 언론의 매도에 말려든 까닭이다. 좀 더 냉정하게 다큐멘터리 본연의 모습에 천착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섣부르게 흥행을 말하는 상업주의적 시선이 이 영화의 실체를 부정케 했다. 그래도 그녀는 깡다구로만 따지면 이미 건축가 이상의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계는 그녀에게 한 마음으로 감사해야 한다. 전국의 건축 설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구수만 헤아려도 정 감독의 영화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작금의 상황은 수수께끼다.

지난해부터 기다려지는 건축 행사가 딱 하나 있다. 행사가 지속되는 한 아무리 바빠도 이 행사만큼은 꼭 함께 할 요량이다. 중소규모 우수건설사를 대상으로 선정한  ‘건축명장’을 만나는 날이다. 통상의 건축상들이 건축가들끼리 주고받는 제도이므로 식상함이 도를 지나치고 있는 것에 반해 이는 권력 지향의 사회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건축가들이 저들의 협력자인 시공사 대표자들에게 인증패를 수여하는 행사로서 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나 상은 아닌 것이 받아든 사람은 하나같이 기분좋아하는 명패이니만큼 이미 상의 의의를 포월한다. 이 행사는 건축의 외연을 보듬는 건축가들의 기지가 돋보여서 좋고, 자기를 내려놓고 바깥을 돌아보는 태도가 의연해 보여서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건축명장 2013’ 출판 기념 행사장에 발을 들여놓는다. 시공업체 서로가 가진 기술과 경험과 인력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네트워킹 하는 동시에 건축가 무리와의 교류의 장으로 묶어보고자 하는 덜 순수한 목적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조차 나쁘지 않아 보이는 행사다.

새건협이 발행하는 《건축과 사회》의 복간은 비상업 건축저널리즘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건축 계 내부의 소리를 담아내는 매체로서 기관지의 속성과 한계가 오히려 이 잡지의 특징으로 부각된다. 정책 발언을 하고, 법과 제도를 비틀고, 전문 직능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등 상업 잡지와 확연히 구분되는 편집 태도로 건축계의 대변지 역할을 자처한다. 이미 80년대 후반에 청건협에 의해 창간되어 단명한 바 있는 《청년건축》의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지난 30년 동안 한국건축의 지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긴다면 이 잡지가 앞으로도 얼마동안은 줄곧 작금의 태도를 견지하게 될 거란 전망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다. 이 잡지의 수위는 우리 건축의 위태로움으로 통한다.

대놓고 떠들어봤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3기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표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현재까지 유령위원회로, 식물위원회로 낙인찍힌 이 위원회의 이름은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제2회 대한민국 녹색건축대전을 개최하는 기관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 바 있다. 건축 잡지 《와이드AR》(통권 34호)을 통해 나는 이 위원회가 식물위원회로 전락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이후 방비를 위해 다음과 같이 요약 주장한 바 있었다.

첫째, 위원회의 수장이 문제다. 1기, 2기 위원장 공히 건축계 내에서 리더십을 갖춘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학연으로 연결되거나 지휘하기에 편한 인물 선에서 정리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일국의 건축전문가 최상위 기구의 수장이 될 인물이라면 그만한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라야 맞다. 대통령의 정치적 입김으로 판단되는 자리라곤 하지만 위원장은 명실상부 ‘국가 건축가’라는 별칭을 더하여 임명장을 주어야 할 만큼 건축에 관한 철학과 소신과 재량이 있어야 한다.

둘째, 위원회라는 기구의 출발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위원회의 존치는 적어도 정부위원으로 참여하는 7개 부처 수장과 그의 수하들과의 항상성 있는 소통의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지만 현실적으로 조직도(組織圖) 이상의 의미를 거두고 있지 않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이라는 이름값을 못하고 국토부 산하 기구로 위상 전이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의 구조적 한계상황을 안고 있다.

셋째, 위원회에 관한 건축 사회의 무관심이다. 전술했듯 위원장의 존재감도 없고, 뭐 하는 위원회인지 궁금해 하는 이들도 없고, 당연히 위원회 위원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건축인도 소수에 불과하다. 당장은 현금의 ‘식물위원회’의 오명조차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위원회의 위상으로 전락한 것은 이 위원회가 선각자를 자임하는 건축선배, 동료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산물임에는 틀림없지만 동시에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면 건축계 수많은 종사자들은 물론, 국민적 응원을 받지 못하는 무용한 위원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넷째, 위원회의 명칭 문제다. ‘건축정책’이 배제된 채 토건국가로 치달아온 과거지사가 건축기본법에서 이 위원회의 이름을 규정하는 뒷심이 되었지만 액면 그대로 위원회의 이름치고는 건축 내부자적인 욕구가 분출된 시선만이 모아져 있을 뿐, 건축의 바깥에서 이를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과 배치되고 있음은 간과하고 있다. 건축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조차 좀 더 말랑말랑하고, 호심을 자극할 수 있는 명칭이 있었을 법한데 법률 본위의 경직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까닭에 무겁고, 범접하기에 싫은 위원회 이름으로 탄생한 것에 혐의를 물을 수 있다. 위원회의 이름은 이후 법 개정의 절차를 통해서라도 개명이 필요한 이유다.

다섯째, ‘대놓고 어용 위원회’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4대강 사업 관련 수변도시 공모 당선작 수상 취소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반환경적 4대강 사업의 실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도마에 오르고 있는 오늘날 대통령의 ‘방위대’ 위원회로 낙인찍힌 저간의 행적은 앞으로 이어질(향후 ‘식물위원회’의 오명을 벗고 되살아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며, 그렇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이 위원회의 행보에 적이 부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에서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상황에 따라 몸을 사리고, 예민한 사안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애국주의에 입각하여 엄포를 놓거나 회고적으로 자신을 극화하여 변절을 일삼는 것만큼 지식인의 공적인 모습을 더럽히는 일은 없다.” “지식인은 부편적인 원칙을 기초로 정부나 기업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며, 일상적으로 망각되거나 은폐되는 모든 사람들과 쟁점들을 대변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아야 하며, 세속적 권력이나 국가로부터 자유와 정의에 대한 품격 있는 행동 표준을 기대할 자격이 있고, 표준들이 고의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침해되었을 경우 용감하게 검증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

오늘날 우리 건축계가 앓고 있는 권력 지향적이며 동시에 종속적인 무력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행동 강령을 사이드의 언설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나마 희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진삼, 건축신문 8호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