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작 요약문]

경복궁의 모던 프로젝트

-발전국가 시기 광화문과 국립종합박물관을 중심으로(1962~1973)

Modern Project of Gyeongbokgung palace from 1962 to 1973

-focusing on Gwanghwamun gate and the National Museum in the Developmental State of Korea

 

글: 강난형(서울시립대 건축학 박사)

 

20세기 후반 아시아의 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서양과 동양, 중심과 주변부, 개발과 저개발, 문명과 문화와 같은 두 경계 사이의 관계로 독해되었다. 국제적인 학문적 성과는 상당히 축적된 형편이지만, 아시아 내부의 시각으로 아시아의 근대성을 연구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아시아의 포스트 식민주의에 대한 연구자들조차, 아시아의 근대에 대한 문제는 서구의 영향으로 인정하면서 서구만을 참조의 틀로 삼는다. 그러나 아시아의 근대성에 대한 연구는 비서구의 식민주의적 유산, 예를 들면 일본의 제국주의와 관련된 지역들을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질문들을 추가할 수 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식민지였던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근대성의 문제는 ‘세계 전체에 거쳐 굴절된 도시적 삶의 특정한 생산 양식’에 의해 발생하였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식민지의 유산과 그 이후 발전국가의 의도가 결합된 곳으로, 도시 공간의 개발 담론이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었는가를 연구할 수 있는 주요한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 건축적 실천은 국가나 건축가를 단일한 주체로써 단정하기는 힘들다. 도시 공간 안팎의 도전에 끊임없이 타협하고, 경쟁하고, 방어하고 갱신되고 재창조와 변형되는 역사적 과정 안에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 공간의 개발주도적인 산업화 과정은 근대적 이행에 따른 모방과 이행이라는 단정보다는 문화를 생산하는 과정으로 읽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본 연구는 통상적으로 ‘폐기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 놓으려는 단호한 노력’으로 이해되어 온 근대성에 대한 또 다른 태도를 제시하고자 했다. 우리는 다른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도시인들처럼 식민지의 상태에서 해방된 이후 국가 주도하에 기업을 동원한 산업화 과정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공유한다. 도시 공간을 발전국가를 통해 이해한다는 것은 아시아 도시의 문화적 횡단의 구성물로 근대성과 민족주의의 모순적 양상이 더욱 두드러지는 지구적 현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점에서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의 연구는 ‘문화적이면서 물질적이고, 지구적이면서 국가적인 양상’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경복궁의 역사를 연구하거나 모던 프로젝트의 모델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1960년대 후반 경복궁 주변에서 벌어졌던 건축 행위들의 모던 프로젝트로서의 성격과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추적하는 연구이다. 당시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이들은 경복궁 재건 사업을 모던 프로젝트와 동일시하였다. 왜 그들은 전통 건축의 가장 핵심적인 장소인 ‘궁’을 대상으로 하는 건축 행위를 가장 모던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는가?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국에서 모던 프로젝트의 기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또한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모던 프로젝트를 수행하였으며, 그것의 기반이 되는 지식이 어떠한 것들인지도 추적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 과정으로서의 모던 프로젝트를 건축의 지식과 공간 생산의 문제로 확장하고자 했다.

경복궁의 모던 프로젝트는 아시아의 근대성 형성을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서 세 가지 구축 방식을 제안한다. 세 가지 구축 요소는 ➀건축 조직: 중간 건축 조직에 의한 역사적 장소의 세속화, ➁건축 양식: 역사주의 설계를 통한 전통의 재해석, ➂건축 재료: 수공예 콘크리트 기술에 의한 기술적 실험들이다. 발전국가로서 60년대 한국은 자본, 인적·제도적 장치 등의 기초적인 토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국가의 계획을 수행하였다. 특히, 건축 전문가와 관료가 결합된 중간조직은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 재편되었으며, 궁의 안팎에서 개발 과정을 수행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중간조직이 보여주었던 의사 결정 과정은 장소와 관련된 논리를 살펴볼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또한 당시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이들의 역사주의 설계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과거(전통)와 근대인으로서의 자신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고, 근대적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감각을 표현하고자 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 주제는 아시아 도시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인 서술이다. 관료들과 건축 전문가들로 구성된 중간조직은 역사적 장소를 설정하고, 선택하고 분류하고 생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정부 주도의 프로젝트의 예로서 ‘종합민족 문화센터’는 ‘도시 개발’과 ‘문화재 보존’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하였다. 국립종합박물관을 포함한 7개의 문화 시설 계획 모두 ‘콘크리트 재료를 이용하여 전통성을 표현하기’라는 지침 아래 시행되었다.

두 번째 주제는 발전국가 시기 역사주의 설계의 재현과 변용의 양상을 살피는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와 근대성 사이의 혼란스런 관계를 드러낸다. 이 시기 국가 건축가들의 건축 지식 생산은 일제 시기 관변 학자들이 행한 작업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충돌하였다. 이유는 그 유기적 관계 안에서 문화유산 조사와 건축사론을 재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제는 콘크리트 생산의 문제를 근대 기술과 민족주의의 결합 문제로 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콘크리트는 근대의 상징으로서 사용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지극히 생산적인 재료였다. 일본 또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 의해 기계들, 원료들, 에너지 관련 산업시설을 원조 받았던 현실에서 국가 주도의 산업화과정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의 노동을 이용하여 만든 수공예 기술과 그 실험이었다.

경복궁은 생산적 모멘텀이 된 대표적 장소이다. 광화문과 국립종합박물관은 전통을 어떻게 발굴하고 그 유산과 관련 지식을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를 실험하는 실리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국립종합박물관은 경복궁을 설계 대지로 삼은 첫 현상설계로서, 설계는 건축가 강봉진이 맡았다. 국보건설단의 강봉진은 국보급의 건축물 문화재를 조사·실측하고, 건물의 비율을 조절하여 콘크리트 구조의 건축물을 제안하였다. 또한 전쟁 후 파괴된 문화재였던 광화문의 중건을 위한 설계를 실시하였다. 이처럼 콘크리트를 활용한 구조체로 수리된 문화유산들은 경복궁의 프로젝트 이후 국보건설단에 소속된 건축가들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통적 공간의 이동과 수행에서 중요한 건축 재료는 콘크리트였다. 그러나 추진위원회의 집행문서와 건축가 강봉진의 논문 등을 통해 본다면 광화문과 국립종합박물관의 건축에 있어서의 고민은 근대적 재료를 통한 신기술의 발명이 아니었다. 콘크리트는 손으로 성형이 가능한 재료로써 현장에서 실험이 가능한 재료였다. 전통 목수 이시형이 제작한 거푸집 사진, 강봉진의 도면 그리고 사전 모형 사진은 전통적인 형상을 재현하는 기술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발전국가 시기 전통 건축의 가치는 두 가지였다. 첫째, 역사에 대한 향수를 통해 전통 건축 양식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들은 식민지의 관변 학자들과는 달리 가까운 과거로써 조선을 재평가하고자 했다. 둘째, 한편으로 전통은 모방되고, 소비되는 대상이 되었다. 전통적인 장소는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에 매어 있지 않았다. 전통 건축에 대한 실측 조사와 다른 지역으로의 수행과 이동은 근대가 갖는 복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는 근대가 장소마다 다른 근대적 의미를 갖는다는 지역적 조율의 뜻을 넘어서는 것이다. 특히 발전국가의 경우, 전통적인 산물을 근대와는 다른 타자로 규정하였으며, 그로 인한 차이를 만들어 보존하고 관리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근현대 건축사의 주요한 접근 방식인 작가론 또는 작품론을 벗어나 그 대안으로 기술적 실천을 제시할 수 있다. 아직까지 근대 건축에 대한 서술은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발전적인 역사관의 시각에서 전통과 근대를 대비한다. 본 연구에서는 발전국가의 경우 근대적인 기술을 수용하고 토착화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체를 전통 건축에 대한 지식 생산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근대의 권력과 지식을 탐침으로 삼는 근현대 한국 건축의 기술사’라는 후속 연구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건축사 내에서 정체성의 형성을 위해 ‘조선’이라는 전통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왕조의 법궁이라는 장소의 상징적 가치에 기반을 둔 시각에서 경복궁 원형 공간의 파괴와 활용에 대한 과정과 의미, 원인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 안의 궁궐이 식민 통치 시설로 치환된 이후의 상황을 다룬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 이후 도시 내 궁궐의 변모를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근현대 건축사에서 조선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번역되었는가를 살펴보는 하나의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이는 발전국가의 포스트 식민주의 또는 아시아의 근대를 다룬 연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발전국가의 포스트 식민주의에 대한 연구는 일관된 이론으로 접근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식민주의에 의한 토착 문화의 전위라는 윤리적 구도와 전후 식민지 유산에 따른 토착이론의 형성이라는 실천적 구도의 대립은 이론적인 전망에 도달하기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대개의 연구에서 텍토닉스는 근대성에 기반에 둔 서구적 전통과 한국적 조건에 대한 의미 있는 관계의 지형을 만들어 주었다. 아시아와 텍토닉스의 결합은 아시아의 독창적인 근대성을 설명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될 것이다. 텍토닉스는 20세기 건축에서 지구적 개발에 대항하는 논리로 비판적 지역주의를 주창했던 현상학자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저항담론으로써 재료, 기술, 문화의 문제를 토착(전통)과 식민(근대)의 이분법적 구도로 접근하였던 기존의 텍토닉스와 달리, ‘아시아+텍토닉스’는 건축 조직, 건축 양식과 건축 재료 산업의 실천적인 면모를 통해 포스트 식민주의, 민족주의, 근대성의 혼란스러운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발전국가의 경우 근대기술을 수용하고 토착화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체로 ‘전통건축’의 지식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아시아의 근대성이라는 주제는 전위의 대상이 아닌 문화적 생산과 실천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만약 새로운 접근법으로 수정이 가능하다면 아시아-텍토닉스는 방법론으로서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해체할 지역 기반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잠재력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는 ‘상상의 고정점으로서 아시아 사회는 서로의 참조 지점’이 될 것이다.

(본문 내용 중 각주 및 도판 생략)

 

[<와이드AR> Special Edition vol.01, 2017년 3-4월호, 제9회 심원건축학술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