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작 요약문]

일본 근세 도시사
-아키치明地와 다이치代地를 통해 본 에도江戶

 

글: 이길훈

 

중국의 장안성을 표방한 도시들이 7세기 전후로 하여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되어 고대 도성들이 양산된다. 이후 중국, 한국, 일본에는 중세를 거치며 각기 새로운 도시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의 경우 고대 헤이안쿄平安京가 해체되며 중세에 존재했던 균질한 구성요소인 쵸町로 이루어진 도시 유형과 핵을 가지는 케이나이境內라는 도시 유형이 합해지며 근세의 죠카마치城下町가 탄생된다. 근세의 죠카마치城下町는 메이지유신 이후 막부가 붕괴되기 전까지 일본을 구성하던 대표적인 도시 유형이다. 전근대를 거치며 다른 양상을 보이던 동아시아의 각국 도시는 19세기 서양문물의 유입과 함께 세계 속의 근대 도시로 변모한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일본의 건축사 및 도시사를 제대로 인식한 후 한국 건축의 역사와 도시의 역사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일본도시사는 다른 동아시아의 도시사와는 다르게 그 시기를 고대, 중세, 근세, 근대로 구분하고 있다.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를 특정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의 도시사에서 특별하게 지정한 근세라는 시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의 승리로 얻어낸 압도적인 권력을 기반으로 에도에 막번체제를 확립한 시기이다. 막번체제란 중앙통일 정권인 에도 “막부”와 그 지배하에 있으면서 독립된 영국領國을 가지고 있는 “번”을 통치기관으로 하는 정치체제이다. 천황의 수도인 교토와 정치의 새로운 중심지인 에도가 균형적으로 양립하던 시기, 즉 근세라는 특정 시기와 정치적 상황은 동아시아 속에서 일본 도시가 가지는 특징이다.

 
동아시아의 중심 중국이 장안성을 표본으로 한 도성제를 동아시아의 각 도시로 전파하던 7C, 이 시기보다 조금 늦게 일본의 도시에도 이를 표방한 헤이안쿄(平安京, 현재의 교토)가 건설된다. 헤이안쿄를 근간으로 하는 교토는 사실상 794년부터 1868까지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다. 이와는 다르게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정치적 수도로 설정 한 에도는 기존에 존재했던 에도성을 근간으로 하여 건설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도성제를 표방하기 보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데아를 나타내는 새로운 형태로 건설되었다. 1603년 천하를 호령하던 영주 도쿠가와가 건설한 에도는,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천황이 두 번 도쿄로 행차하는 도쿄행행東京行幸을 통해 에도성이 도쿄의 황거가 되는 시기인 1868년까지 명실상부 일본도시사속에서 근세의 정치적 수도에 해당한다.
위와 같이 일본 근세의 정치적인 수도이자, 근대의 수도이며 도쿄의 전신인 에도라는 도시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동아시아의 도시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근세 에도의 아키치라는 공간은 거주자의 계층에 의한 토지구분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무사지武家地, 사사지寺社地, 쵸닝지町人地라는 토지 유형은 모두 아키치明地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아키치는 모든 토지 유형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토지였다. 이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키치, 즉 공지와 공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수용된 토지를 대신하여 부여된 다이치代地가 에도의 도시공간의 변용에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본연구의 첫 번째 목적이다. 또 아키치와 다이치가 전개되어 가는 배경에는 시책을 실행하는 측의 방법적인 논리와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토지소유자나 거주자의 논리가 존재한다. 이런 아키치와 다이치의 설정을 둘러 싼 시책을 세운 측과 시책을 따라야 하는 측의 논리를 정리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근세 에도를 “아키치”와 “다이치”라는 두 가지의 토지 유형으로 살펴보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에도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무사지, 사사지, 쵸닝지의 기본적인 세 가지의 토지구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토지구분은 소유도 성격도 발전양상도 모두 다르다. 이러한 에도의 토지구분을 초월하여 존재하였던 “아키치”와 “다이치”라는 토지 시스템이 에도 도시사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할 것을 기대한다. 본 논문의 문제의식인 시책을 세운 측의 논리에 의해 실행된 수용과 대신 주어진 토지에 대한 시책을 따르는 측의 논리라는 것은 실제로는 결코 근세 일본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며 현재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근세 에도의 다이치의 대부분은 히요케 아키치, 즉 화재 공지를 조성하기 위해 수용되며 주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아키치와 다이치를 동시에 살펴보았다. 에도는 도쿠가와에 의해 당초 계획되었을 때, 거주자의 계층에 의한 토지구분이 명확한 도시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기존의 연구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화재 공지의 조성과 그에 대신하는 토지인 다이치의 부여라는 매개로 명확하던 토지구분이 점점 해체되는 모습도 살펴 볼 수 있다. 다이치는 쵸닝치의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동은 에도 전체를 통해서 일어났다. 본문에서 에도 전체에 있어서의 다이치의 이동에 대해서 검토한 결과 다이치로 부여된 토지는 쵸지町地에 한정되지 않고 지배 관할도 다른 무사지에 가장 많이 주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다이치의 이동은 단순히 쵸닝치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에도 전체에 있어서의 이동이며 다이치를 통해서 에도의 도시공간의 변화 추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아키치와 다이치를 둘러싼 시책 측과 쵸닝의 논리
아키치와 다이치라는 토지제도
에도의 도시개발은 화재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본 논문에서 주목한 아키치와 다이치이다. 막부는 인구 고밀화에 따라 도시공간이 부족한 한편 아키치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막부에게 있어서 다이치라는 수단은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해결할 하나의 방책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토지 부족과 아키치의 확보라는 두 가지의 요청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 한편 다이치 혹은 다이치 조성을 위해 수용한 무사지를 이용한 소유권의 이동은 결과적으로 에도의 도시역의 확대를 가져왔다. 이러한 아키치의 설정과 다이치로의 이동이라는 대규모적인 전개는 확대되고 있었던 에도의 도시공간을 배면에서 지지하고 있는 논리에 해당한다. 이상은 시책 측의 논리로부터 본 아키치와 다이치에 관한 고찰이었다. 시책 측의 논리에 주목하면 아키치와 다이치의 설정이 도시계획이라는 측면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키치의 용도에 있어서 일정의 자유도를 인정하거나 쵸닝의 청원대로 다이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등 실제로는 쵸닝인 토지소유자의 논리가 대립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들이 인정되었다. 이런 때에 아키치의 설정과 다이치로의 이동이 유연하게 운용된 과정을 보면 이러한 토지제도가 대립적인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에도의 도시기능을 유지, 공간의 지속적인 활용을 촉진하는 일종의 촉매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다이치로 이동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쵸닝지가 수용되고 다이치가 주어질 때 새로운 다이치로 이동하게 되는 주민층은 누구인가. 쵸닝지의 수용과 다이치의 설정은 사회 구성원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본문에서는 다이치로 주민의 어떠한 계층이 이동하였는지에 관해 검토하였다. 실제로 다이치로 이전했다고 추측되는 신분은 지주, 야모리(家守, 토지 관리자) 뿐으로 다른 주민 계층은 제3의 지역으로 편입되었다고 생각된다.

 

모토치와 다이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마을 공동체의 변용
본 논문에서 다이치의 이동은 주로 1688~1704년(元禄期)와 1716~1735년(享保期)를 대상으로 분석하였다. ‘쵸닝청원서’ 중에서 다이치에 관한 쵸닝의 청원은 모두 네 건이 존재한다. 그 중 세 건은 1716~1735년(享保期)의 것이며 한 건만 1830~1844년(天保期)의 사료이다. 1830~1844년(天保期)의 청원으로부터는 모토치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 다이치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다이치가 주어진 당시의 청원이나 아키치로 설정된 기존의 본인의 토지인 모토치를 획득하려고 하는 쵸닝의 동향으로부터 쵸닝의 집착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모토치에 집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쵸 공동체의 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다이치가 아키치로 설정되었던 모토치로 돌아간 예는 극히 드물다. 결국, 다이치에 정착하거나 다른 토지를 요청해 재차 이전하게 된다.
근세 초기의 쵸는 주민에 의하여 유지되었으며 또 주민의 생활을 근저로부터 규정하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였으나 도시의 여러 주변적 각 신분이 형성되어가는 근세 후기에는 근세 초기와 달리 주민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였던 쵸는 상대화 되어간다. 앞에서 서술한 모토치에 대한 쵸닝의 집착이 다이치로의 정착으로 바뀌어가는 양상은 쵸 공동체의 위상 변화의 과정 중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근세 초기의 쵸닝인 지주는 감소하고 거기에는 토지관리자인 야모리로 대체되는 쵸의 주민 구성의 변화와 다양한 직연(職縁)적 나까마(仲間)나 조합(組合)의 등장은 공동체가 더 이상 쵸라는 범위에 한정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다이치의 이전은 주로 막부와 지주의 논리였다. 지주가 부재하게 된 근세 중기 이후의 쵸에 있어서 다이치는 단순한 필지(즉 소유)의 이동으로 실제로는 아무도 이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근세 중기에 걸친 쵸 공동체의 변용과 지주의 부재화, 계층의 분화는 모토치와 다이치가 공간적으로 떨어져도 쵸로서 존립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확대되어가는 에도의 도시공간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아키치의 설정과 다이치로의 이동은 단순한 쵸지에서의 이동이 아닌 무사지, 사사지의 토지구분을 넘어서며 이루어졌다. 이러한 아키치의 설정과 다이치로의 이동은 에도의 도시공간이 거대화하는 하나의 양상으로 읽어낼 수 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중기에 걸쳐서 근세의 삼도(三都, 교토・에도・오사카)는 거대화된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신지개발과 재개발로부터 삼도의 거대화와 도시역의 확대를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그 중에 이토伊藤毅는 에도의 재개발을 ‘단순한 시가지를 교외로 확대시킨 것뿐만 아니라 기성 시가지의 고밀화를 촉진시켰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의 아키치의 설정과 다이치의 이동은 교외로의 확대와 내부로부터의 고밀화의 연동작용으로 볼 수 있다. 1688~1704년(元禄期)에는 후카가와深川・혼죠本所에 많은 다이치가 주어지며 교외로 확대되었고, 1716~1735(享保期)에는 바깥 수로 내측에 산재해 있던 무사지를 외연부로 이전시키고 그 터를 다이치로 전환하는 내부로의 고밀화 라는 두 가지 수법으로 에도는 확대되었다.

 

또 아키치의 설정과 다이치로의 이동으로 에도의 도시공간은 거대화하는 동시에 재편성 되어갔다. 시책 측이 아키치 조성을 위해 토지를 수용하고 그에 대신하는 다이치를 설정하며, 다이치를 조성하기 위해 또 무사지를 이전시키는 일련의 과정으로 쵸닝지에 산재해있던 무사지를 에도의 외연부(후카가와深川, 혼죠本所, 아자부麻布)로 재편성 시켰고 그 무사지터는 다이치라는 쵸닝지로 전환되었다. 또 아키치로 설정되었던 토지가 쵸닝지로 변화하면서 에도의 도시공간은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아키치와 다이치로 살펴본 에도는 거주자의 계층에 의한 토지 구분이 고정되어 있던 도시가 아니라 유연성 있는 도시였다.

 

요컨대, 시책 측과 쵸닝의 이해관계에 의해 에도의 도시공간은 아키치와 다이치의 설정이라는 이동을 통해 토지구분을 넘어서면서 재편성되어가며 확대되었다고 할 것이다.

 

 

[<와이드AR> 50호, 제8회 심원건축학술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