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심사평]

「모순된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저항코드로서의 건축」 비평(가)을 기대하며,

글: 이일훈(건축가‧ 건축평론동우회 동인)

 

 

지방출장길에 편집인의 전화를 받았다.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심사를 맡아 달라(피하고 싶었다). 응모자가 1인인데(그게 뭐 어때서. 응모자 많고 내용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거론되는 심사위원들은 모두 응모자와 직‧간접의 인연‧관계가 있어 주최 측이 고민스럽다. 응모자와 아무 인연‧관계가 없어 청을 드린다(아니, 응모자와 내가 아무 인연‧관계없음을 편집인이 어이 아는가). 장담한다. 당신이 모르는 사람이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응모원고 세 편이 왔다.

‧ (단평론-1) 건축 작품,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 (단평론-2) 한국 건축비평의 무기력성: 현실진단과 과제

‧ (주평론) 바우지움: 바우야! 바우야!

 

‘단평론-1’은 「건축(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이를테면, 좋은 건축」을 묻(찾)고, ‘단평론-2’는 건축비평의 현실, 나아가 이 사회에서의 건축(비평)-「건축가는 지식인인가?」를 계속 물어야 할-의 위상에 대해 말(묻고 답)하고, ‘주평론’은 강원도에 지어진-(건축가는)「줄곧 자연과 자연스러움을 말하지만,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한 미술관을 평한 것이다. 모두 논리가 탄탄하고, 넓은 주제에서 구체적 대상으로 옮아간 세 편의 구성(비평상에 응모할 의도였다면)이 좋다. 각 평문들에서 공히 보이는 비트겐슈타인-칸트-가라타니 고진-벤야민-리차드 세넷-하버마스…등등의 말을 빌려옴에도 별 무리가 없지만, 비평‧평론이란 아무도 하(찾)지 않은(는) 말(생각)을 찾(하)는 일이기에,「전통에 의지하든 그것을 내쫓든, 춤을 추든 뻣뻣하게 서 있든, 소리를 지르든 침묵하든, 건축을 일종의 실천으로 다룰 수 있는 기초」를 개념삼고 나아가 「비평가가 짊어지고 있어야 할 그물의 무게」를 인식하고 있는 응모자의 자세에서 텍스트의 인용보다 더한 울림을 받는다.

 

나는 평소 말하고 쓰고 그리고 만드는 일(굳이 전문기술‧예술‧학술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더 좋을)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짓)이라 여긴다. 어떤 이야기? 재미(내용)있는 이야기다. 바로 뻔해 보이는 곳(것)에서 뻔하지 않게 이야기 하는 것. 뻔하고 뻔할 내용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새로운 생각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이 아이디어이고, 해석-재배치-이며, 개념이다. 새로움이 없으면 요란해도 들을 게 없고, 젓가락이 가지 않는 성찬, 맞는 말일수록 졸음이 온다. 그런 좌판에서 느끼는 식상함은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비평이야말로 (듣기 싫어도)들을만한 이야기이어야 한다. 응모자는 「비평의 위기」를 말하며 지난날의(오늘일 수도) 「가짜 논의」‧「가짜 비평」과 「주례비평」을 집는다. 맞는 말에 한마디를 보태면, 진부하지 않은 감동적인 주례사는 오로지 주례(비평가)의 몫이라는 점이다. 구린내 나는 주례사의 핑계를 혼례 당사자에게 넘길 수는 없는 일. 오늘도 내일도 더 큰 문제는 건축비평의 위기보다 건축의 위기이다. 건축이 죽으면-지어지는 건물의 물량이 줄어드는 것을 건축의 위기라고 여기는 현실에서 이미 건축은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건축비평도 같이 죽을까. 아닐 것이다. 건축비평이 건축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기대가 나만의 허무가 아니기를. 그 쓸쓸하고 황량하게 이는 건축의 바람을 기꺼이 맞기를…! 앞으로 자신의 건축이야기를 지어(고)갈 이름 모르는 논객을 환영한다.
* 「」는 응모 평문에서 따옴.

 

[<와이드AR> 49호, 제6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