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송종열(건축평단 고정 필진)
공론의 장에서는 비평가로서 몇 걸음도 채 내딛지 못한 초심자에게 이번 상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우선 지금까지 실행해 왔던 작업이 얼마나 유의미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는 했지만, 거기에 대한 확신은 늘 안개 속이었다. 더구나 우리 건축계를 비춰볼 때, 그것을 가늠해 볼만한 언덕이 많지 않은 현실은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실은 꽤나 긴 방황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따금씩 상기시켜주곤 했다.
그런 탓에 건축비평은 늘 소수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그렇게 이루어진 비평이 어떤 식으로든 비판대상으로 재론 되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비판[혹은 평가]마저 비평가의 몫이었던 까닭에, 결국 비평에 대한 비평행위가 쳇바퀴 돌듯, 자기참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또 그러한 한계가 논박의 기회를 스스로도 조금씩 고사(枯死)시켜 왔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 어쨌거나 이번 비평상 응모자가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비평〉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여전히 멀리 있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시켜 준 셈이다.
흔히, “건축은 한 사회의 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전제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호출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테면 “우리 건축계는 그러한 지위에 걸 맞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건축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단평론)「한국 건축비평의 무기력성: 현실진단과 과제」는 비평의 무기력성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영역에서 건축의 위상이 위축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재고(再考)한 글이다. 필자는 이 글의 결론부에서 〈개입하는 사유〉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현실개입〉을 요청하였다.
〈개입하는 사유〉란 말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첫 번째는 비평가의 임무를 대체로 “지성의 사심 없는 발휘”라든가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과 취향교정”(T. S. Eliot, 「The Function of Criticism」, 1923)으로 보았던 기존의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비평가의 테크닉에 관한 13가지 테제>의 첫 번째 테제에서 비평가를 “[문학] 투쟁의 전략가”로 규정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비평의 임무는 문화를 전파하고 해석하는 ‘전술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건축[비평]이 사회와 문화영역에 깊숙이 개입하기 위해 요구되는 비평은“사회인식의 전제이자 수단으로서의 비평”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현실성에 대한 탐구〉는, 현실변화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과 무관치 않은 까닭에, 기존의 틀을 새롭게 서술하는 것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에서, 비평가의 입장은 끊임없이 적응하고 반응하고 진화해 갈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서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예리한 감성과 논쟁적 기술, 그리고 중요한 영역을 포착하고 열어젖히는 능력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비평이 일종의 〈개입하는 사유〉로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비평가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묻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비평행위는 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에게 던지는 일종의 질문이다. 요컨대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과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송종열은 1970년 부산 생.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이종건 교수 연구실에서 수학. ‘지금-여기’라는 시의성을 잃지 않고 건축 생산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끊임없이 검토하는 호흡 고르기를 통해, 건축이 어떤 식으로 삶에 관여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있으며, 현재는 계간 《건축평단》 고정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와이드AR> 49호, 제6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