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당선작(단평론)]

한국 건축비평의 무기력성: 현실진단과 과제

 

송종열

 

 

“철학이니 역사니 하는 이론이나 비평…?!!

그런 것 없이도 잘 지내왔다.”

 

 

이 글은 건축계에 만연해 있는 건축비평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고, ‘개입하는 사유’로서의 비평이 어떠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인지,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 방안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할 수 있는] 비평이 시대적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것이 목적이다. 글머리에 언급된 표현은,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실무를 하는 친구들과 건축을 화두로 밤늦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으레 들을 수 있을 만큼 흔한 평가이기도 하다. 생각건대 이 표현만큼 건축계 내에서, 그러니까 건축행위에 관여하는 사람끼리도 이론이나 비평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는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의 밑바탕에는 현실개선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분야에 대한 배타적 인식과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이론․ 비평의 효용성에 대한 이 같은 의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타 영역에 대한 배타적 태도에 불과한 것이라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일본이나 서구사회에서 이론․ 비평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비중이 우리사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와 같은 부정적 인식을 초래한 원인이 결국 우리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글의 제목, 「한국건축 비평: 현실진단과 과제」는 이러한 물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더 나아가 한편으로 작금의 현실에 무엇이 문제인지 먼저 돌아보고, 그에 따른 대응으로 어떤 목적을 갖고 행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건축계 내부에서도 여전히 깊은 오해를 받고 있는 이론가․ 비평가의 역할에 대한 소소한 해명이기도 하다.

 

이론․ 비평에 대한 부정과 비판은 대개 효용성, 그러니까 쓸모의 문제로 귀착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데, 첫 번째는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 이론․ 비평으로 수행된 것들이 결국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부정적 인식은 차치하고라도] 이론․ 비평을 단순히 쓸모의 문제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이론․ 비평의 효용성에 의문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론․ 비평을 단순히‘쓸모의 문제’로 평가하는 태도가 타당한가 하는 물음이다.

 

 

 

진단: 이론․ 비평의 위기

 

우선, 이론․ 비평이 효용이란 측면에서 이토록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이 던지는 과제는 설령 그와 같은 평가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실증적인, 그로써 판단 범주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태도를 얼마간 핑계 삼는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없어도…(된다)”라는 식으로 치닫는 부정적 반응에 대해서 한국 건축비평계는 깊이 숙고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이론․ 비평의 역할을 평가하는 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주장 속에는, 적어도 이론․ 비평이 갖고 있는 한계를 짚어볼 수 있는 단초가 있다. 이를 테면, 이론․ 비평이 객관성이 결여된 주관적 판단행위에 머물렀던 것, 그로써 어떠한 검증가능성도 논증의 확실성도 없는 발언들을 양산해냈던 것, 그리고 (통찰이 결여된 이론은) ‘지금-여기’라는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현학적인 태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 등등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단순히 건축 내부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 전반에서 건축이 지녔던 입지를 스스로 축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건축 비평이 위기에 처한,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원인은 무엇일까? 첫 번째 원인은 주관적 취미판단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취향을 근거로 하는 비평, 미식가적인 비평이 그런 것들인데, 이들 비평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은 엄격한 비평규범을 갖추거나 명료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기보다 건축가의 기질이나 개성, 그리고 독창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방식이 무비판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김수근, 김중업 이후 한국 건축의 주류건축가들이 취해왔던 태도*1와 결코 무관치 않다. 말하자면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동원했던〈건축예술가론〉은, 순수예술이나 순수문학이 그랬듯, 비평을 “그저 그런 설명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를 테면, 문학이 자율적인 개체로 다루어지면서 문학작품마다 자체의 유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관념이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모든 비평을 초토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로서의 건축가론은 건축비평의 지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이런 비평태도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이‘가짜비평’*2이라 규정했던 것과 성격을 같이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축이 건축가의 순수한 창작물이라는 인식은 건축(작품)은 분석대상이 아니라는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 또 그러한 사고를 갖춘 이들이 수행하는 건축비평은 반성을 거친 전략적 강령 대신 주관적 취미판단을 바탕으로 한 것일 수밖에 없고, 그로써 “작품의 판단방식이나 기준이 독단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3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적취향과 개인적인 요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비평 방식은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비평만을 양산해 낸다는 사실이다. 그로써 비평은 공적인 설득력을 잃고 내부에서만 맴돌다, 의미를 부여할 만한 어떤 것도 생산하지 못한 채 결국 폐기되고 마는 양상을 되풀이 해왔던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처럼 (주관적) 취미판단을 바탕으로 하는 비평이 갖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간단하게나마 여기서, 그 방법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일차적으로는 비평의 토대를 약화시켜왔던 요인을 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말하자면 미적 취향과 개인적 요소를 자제하고, 나름의 비평규범을 갖추고 명료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비평을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수행된 비평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 검증하는‘비평의 비평’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비평 역시 비판대상(혹은 비판적 탐구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례비평과 같은 가짜 비평을 걸러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비평이 사회적으로 공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역사·이론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를 돌이켜보면, 비평에 대한 불신 못지않게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인식은, 무엇보다 역사· 이론이 (지금-여기에서) ‘현실적-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간혹‘뜬구름 잡는다’는 비아냥을 듣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이론가/역사가들이 (현실개선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뜬구름 잡듯) 현학적 태도로 일관한다든가 심지어 지적유희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비난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이는 이론적 자기성찰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론과 방법론의 부재, 그리고 통찰이 결여된 상태를 은폐하려는 태도와도 무관치 않다. 그 같은 태도는 직면한 문제에 대해 대안을 내놓기는커녕, 현실로부터 점점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결국‘공허한 말무덤’이라는 비난을 자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지식보부상에게 쏟아지는 비난도 그 원인을 따져보면 이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역사· 이론에 관여하는 이들은“이론적 성찰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적용가능한지”검토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런 반성적 실천을 통해서만, 역사· 이론이 현실과의 접점을 넓힐 수 있고, 현실에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으며, 그로써 사회 안에서 스스로 존재이유를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실무영역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설령 부족하다해도, (현실구축이라는) 구체적인 영역으로의 넘나들기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마땅하다. 이번 논의와 관련해, 이러한 태도와 관심, 그리고 우리 건축의 현실을 한꺼번에 숙고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용어를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것은 리차드 세넷(Richard Sennett)이 제시했던 물질의식(material consciousness)*4이라는 표현인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를 통해 (혹은 그 도구를 갖고) 물질의식을 배양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 용어를‘물질과의 접촉을 통해 (혹은 물질을 만짐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의식’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여기서,『미디어의 이해』에서 매체(혹은 도구)를 인간 확장의 원리로 제시했던,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주장을 얼핏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세넷이 말하는 도구(tools) 역시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번 논의와 관련해, 우리가 집중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물질의식〉이란 용어는‘사유와 실천적 도구의 연계’를 말한다는 점이다. 기예(craft)가 사유(thinking)와 제작(making)을 통합하는 유용한 방법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넷의 주장 역시 그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 용어가 주는 아이러니한 성격은 사유와 실천적 도구의‘연계’를 주장하는 만큼, 실상 (그와 같은 연계를 주장해야 할 정도로) [건축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사유와 제작의 분리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문제는 그 둘의 간극이 여전히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 문제라는 것을 누구라도 인지하고 있고,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 이론이나 비평 그리고 실천적 구축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심지어 무관심(?)으로 비칠 만큼, 각 분야에 대한‘상호 무간섭’라는 암묵적 동의는 그와 같은 간극을 결코 메울 수 없을 것이라 보는 일종의 체념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런 담쌓기를 통해서 적어도 자신의 밥그릇만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이기적 발상이 작동한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기까지 하다.〈물질의식〉이란 용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편으로 우리 건축계의 벌어진 틈을 새삼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써 그 간극을 메우는 방법도 암시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를 테면, 물질의식이란 용어를 통해, 우리는 역사· 이론 연구자들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현실단절의 유혹을 경계하고, 이론적 성찰을 통해 실천적으로 적용가능한 방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논박(論駁)없는 사회

 

역사·이론과 비평 영역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들, 그러니까 허술한 담론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지적사기 그리고 되풀이되는 서열화! 이 모든 부정적 상황을 초래하는 원인은 다름 아닌 비판적 수용태도의 결여, 곧 ‘논박(論駁)의 부재’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논박은, 포퍼(K. Popper)가『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로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을 든 바 있는,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의 논박이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그가 말한 과학(혹은 지식)의 방법론적 규칙은 “반증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은 늘 (어떤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로서의) 잠정적인 이론(tentative theory)에 해당하고, 이 이론 역시 반증이라는 비판과정을 수용해야한다. 이때의 비판은 다름 아닌 오류를 제거하는(error elimination) 과정이다. 그로써 잠정적인 이론은 (반박될 경우) 비판적으로 수정되면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시행착오, 즉 ‘추측과 논박’을 통해서 진보하며 오직 끊임없는 반박을 잘 견뎌내는 이론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포퍼의 주장이다. 요컨대 논박의 부재는 곧 그러한 과정의 부재인 셈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그러한 검증의 과정이나 장치를 갖추지 못한 (지식)사회는 담론이 허술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엉터리 지적보부상들이 벌이는 지적사기를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적평등주의를 가로막고 고착상태를 유도하는) 서열화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문제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이론이든 지식사회든)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변화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종국에는 화석화된 이론만을 양산하는 사회가 되고, 지식인의 지위란 기껏해야 세계를 고정시키는 즉물적인 설명만을 내놓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그런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천적 지식’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혁명적 에너지’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학문의 효용성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역사· 이론이나 비평이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짚어 보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세간의 평가를 십분 수용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물론 이런 의문은, 역사· 이론이나 비평 분야의 관련자들에게만 전적으로 그 책임을 지울 수 있는 문제인가라는 물음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를 테면, “철학이니 역사니……” 하는 표현에 깔려 있는 인식 혹은 판단기준이 편향되지 않고 정당한 것일까 하는 물음 말이다. 그 [편향]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앞의 표현을 단서로 삼고 출발해 볼 수 있다. 우선, 이러한 표현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 두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는 [철학, 역사· 이론, 비평을 배제하고도 구축행위를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기술적 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영역구분에 대한 의지가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또 이 두 가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연속해서 이끌어 낼 수 있다. 첫 번째,〈기술적 지식〉만으로 건축을 총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두 번째, 건축 내 분과 영역구분이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 혹은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들이다.

 

 

기술적 지식: 그 환영과 한계

 

우선〈기술적 지식〉이 갖고 있는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가 무엇인지, 또 그러한 믿음이 건축전반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관심과 인식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자리에서, 모든 인식 형태는 인식주체가 세계에 대해서 갖는 특정한 관심과 결부되어 있는 까닭에 [어떤 사물․사건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어떤 형태의 인식도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 역사적 삶의 세 가지 측면과 맞물려 인류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세 유형의 관심―기술적 관심 ․ 실천적 관심 ․ 해방적 관심―이 경험 분석적 과학(empirisch-analytische Wissenschaft), 역사 해석적 과학(historisch-hermeneutische Wissenschaft), 비판 지향적 과학(kritisch orientierte Wissenschaft)과 같은 지식체계로 발전되었다고 밝혔다.*5 하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들 지식체계가 균형 있게 발전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인류는 인간의 자기보존과 관련된〈기술적 관심〉을 우위에 두고 경험 분석적 과학에 몰입해 왔던 것이다. 이런 경향이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이나 참여에 관심을 두는〈실천적 관심〉, 그리고 왜곡된 삶의 조건들에 대한 반성에 관심을 두는〈해방적 관심〉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버마스는 이에 관련된 것들―이를테면,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는 유물론적 철학 그리고 기술적 지식을 이데올로기화하는 과학적 실증주의 같은 것들―을 ‘인식론폐기의 역사적 과정’이라 일컫는다. 이는 곧 삶에 중요한 나머지 두 측면을 방기(放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삶을 대하는 인식 방향을 한쪽으로만 몰아갈 것이고 이에 따라 각 분야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하버마스가 오늘날을 ‘인식비판의 위기시대’*6라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불균형을 초래했다’*7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런 불균형이 어떤 영향을 초래했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또 그러한 불균형이 건축분야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 물을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 실무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자신들의 태도를 정당화하려는 근거로 활용했던 실증주의(positivism)의 성격을 세밀하게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버마스가 “인식론의 종말을 특징짓는 명칭”이라 특정할 만큼, 실용주의는 근대 과학이 수행했던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데 몰두했고, 또 그 장점만큼이나〈기술적 관심〉에 우위를 둔 인식행위가 갖고 있는 한계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실증적(positiv)이란 용어와 더불어 확실성, 정확성, 유용성 등을 형이상학과 구별되는 과학적 지식의 성격으로 제시했다. 이런 성격은 도구적 행위체계, 그러니까 삶의 외적 조건을 통제하는 데 이용되는 활동체계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기술적 관심, 말하자면 인간의 삶 가운데 ‘반복적이면서도 효율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노동의 명령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이런 특성이야말로 실증적 태도가 갖는 장점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이번 논의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징은 따로 있다. 첫 번째, 실증적 과학은 인식과 인식 주체의 연관성에 대한 물음을 배제한다는 것*8이고, 두 번째는 인식대상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이 두 가지 특성만 보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삶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얼마나 축소 시켰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과학이론에서, 확실성 ․ 정확성 ․ 객관성과 같은 특성들을 확보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유동적 요인을 최소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주체의 개입을 배제한 것도 이를 위한 조치들 중 하나겠지만,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기술관료적 의식을 강화할 뿐 아니라 루카치(Georg Lukács)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말한 바 있는 사물화(Verdinglichung)*9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게 문제다. 더구나 객관적 사실들과 더불어 세계 구성에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주관적 사실들―주로 감각경험에 의해 주어지는 사실들―을 인식의 범주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식대상의 역사적 ․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는 이런 특성들과 결코 무관치 않다. 이것은 곧 시의성(Gelegenheit)*10에 관련된 물음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현실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하는 물음이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이 논의와 관련해] “실증적 태도는 이러한 물음에 어떤 식으로 접근할까”재차 물을 수 있다. 이 두 번째 물음은 기술적 관심에 우위를 둔 실증적 태도가 갖는 한계를 또 한 번 드러낸다. 실증적 지식은 현실에 대한 설명(Erklarung)을 구할 뿐 사회적 ․ 역사적 삶의 의미를 이해(Verstehen)하려 하지 않는다는 한계 말이다. 우리는 간혹‘객관적 설명’이란 말을‘가치중립적’이란 의미와 혼동하여 사용하곤 하는데, 이 말은 일종의 수사(修辭)이다. 왜냐하면“현실을 중립적으로 본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11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현상하는 바, 보이는 모습들이 진실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현실을‘표면적으로 기술하는’정도로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적 관심에 편중된 인식태도는, 오늘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알튀세르(Louis Althuser)가‘직접 본다는 것의 거울환상’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이런 태도는 오랫동안 실무건축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다. 이를테면 현장에서만 확인 가능한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그런 것인데, 그와 같은 믿음이“[철학이니 역사니 하는 이론이나 비평 따위…?] 그런 것 없이도 잘 지내왔다”라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비판행위 자체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12게다가 이런 태도나 인식이 건축 학도를 길러내는 교육 현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새다. 말하자면 교수진의 구성에서 보이는 실무와 이론의 심한 불균형이 이런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인식 속에는, 과거에 건축이 지녔던“으뜸-테크네(ἀρχή-τέχνη)[arch(e)-techne)”로서의 지위와 (진리를 드러내는) 탈은폐(ἀλήθεια)[Aletheia])로서의 계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기술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실무능력을 타 분과와의 관계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정하는 배타적 직능(職能)으로 보는 시각만 있을 뿐이다.*13 더구나 실무지향적인 태도는, 읽고 쓰는 행위에 기반한 지식생산을 통한 비판적 실천을 고무하는 대신, [설계라는] 물리적 구축의 현실감각과 테크닉만을 장려해왔다. 이런 경향들이 결코 말하지 않은 진실은, 실무 이외의 다른 쪽을 거의 내팽개침으로써, 건축이‘스스로 입지를 좁혀왔다’는 것과 건축계내의 권력구성이 자본의 창출과 이익에 귀착되는‘특정지식만을 반복 생산하도록 조직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런 행태가 타 분야와의 담론 공간에서 건축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불균형을 고착시키는] 상황은 하버마스가 주장한 인식론 폐기과정과 그 궤(軌)를 같이 하는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그가 이 과정을“인식주체가 자기반성(Selbstreflexion) 능력을 잃어버리는 과정”이라 적시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구축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문제인 까닭에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문제다.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기술적 지식〉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태도는 결국 인식비판의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태도는 주체의 연관성에 대한 물음을 배제하고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사물화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실포착과 같은 시의성에 관련된 물음을 소홀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더구나 실증적 태도가〈삶에 대한 이해〉와 같은 물음을 빠뜨린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심각하게 고려해야 마땅한 사항인데, 그러한 태도는 결국 삶에 대한 물음을 배제한 건축을 상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로써 건축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는 방식에도 총체적인 의문을 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같은 상황이라면, 오늘날, 과거 건축이 지녔던 〈으뜸-테크네〉로서의 지위와 탈은폐로서의 계기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기획이 되고 말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배타적 직능과 부메랑 효과

 

건축가의 지위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실무능력을 (스스로의 존재를 확정하는) 배타적 직능으로 보는 시각”은 오늘날 정보사회에 이르러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건축가의 독자적인 능력에 의존해 건물을 설계하던 방식이 대부분이었고, 그로써 건축가는 독점적 지위를 어려움 없이 누릴 수 있었던 반면, 오늘날은 상황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많은 정보와 그러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인해, 건축가는 점차 [주어진 요소들을 단순히 조합하는] 코디네이터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그렇다. 말하자면 그러한 지식을 정보나 매체를 통해 해결하게 됨으로써, 한 때 건축가의 지위를 확정하는 토대로 삼았던 ‘배타적 직능’이라는 유일한 무기가 이젠 더 이상 그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어찌 보면 역설적인데, 만약 실무자들이〈기술적 지식〉에만 매달리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건축가의 지위가 이처럼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한때 배타적 직능이라 여겼던 지식이 결국 건축가의 지위를 흔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사실상 그 어느 때보다, 건축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건축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하는 일이 새로운 숙제로 나타났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건축의 입지가 좁아진 원인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를 테면, 한때 TV 드라마에서는 건축가를 설계사라 불렸던 적이 있다. 건축계는 이를 두고 문화적 몰상식이라 힐난했지만, 이는 건축인들이“스스로 입지를 좁혀 왔던”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실무분야에서 지식생산을 통한 사회적 개입과 비판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외면한 결과인 셈이다. 이것은 건축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실무능력만을 강조하는 건축가를 설계사라 칭하는 것은 오히려 적확한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소위, 건축가를‘대접하지 않는’사회· 문화적 수준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왜 그와 같은 현상이 생겼는지 반성하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사태가 이런데도 건축 분과들 간의 생산적 관계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은 미미하다. 비록

건축 내 분과의 영역구분은 연구범위를 구체적으로 확정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학제 간 소통에 얼마간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담쌓기가 자기 영역,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마땅하다.

 

 

 

건축가는 지식인인가?

 

간혹 들을 수 있는 물음 중 하나는 “건축가는 지식인인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사회적 지위를 묻는 것이지만,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그런 물음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건축은 지극히 구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현실문제에 대해서 거의 침묵하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지식인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따지기에 앞서, (이 시대에 맞는) “지식인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은 무엇보다 비판적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관심과 사회현실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관심(interest)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책임(responsibility)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관심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interest의 라틴어 어원인 inter-esse는 사이(between)를 뜻하는‘inter-’와 존재(to be)를 뜻하는‘esse’가 결합된 말이다. 이 단어는 명사로 이해관계(to concern), 차이(to make a difference), 중요한 것(to be of importance)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이를 종합적으로 풀어내면 이렇다. 관심(interest)이란“존재[자]들 사이에서” 생겨나는‘이해관계에 얽힌’것으로 ‘차이 혹은 다름을 인식하는’행위이자 존재자에게‘중요한 무엇’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다. 또 책임은 [존재자들 사이에서, inter-esse]‘관심과 열의를 보이거나 호응하는(responsive)’것과 관련된 것으로 이 말의 어원인 라틴어 responsum과 respondere는 각각 대답(an answer)과 응답하는 행위(to response)를 뜻했다. 그러니 책임은 흔히 이해하듯 ‘떠안아야 할’임무나 의무를 말하기에 앞서‘응답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대한 답은 긍정적이지 않다. 지금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존재들 틈에서…[부조리한 사회에] 관심을 갖고 인식을 일깨울 수 있을 만한 응답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촘스키(Noam Chomsky)가 우려한 바대로*14 , 특정 자본 ․ 문화 ․ 정치권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확성기가 되겠다고 자처하기까지 한다. 문제는 이들의 역할이 어떤 집단이 설정한 틀 안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거짓조화를 말함으로써] 사회 현실을 왜곡되게 전하고 해석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겉치레뿐인 반대나 가짜 논의―전시용 토론―를 통해 정작 있어야 할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이나 생산적인 논의 기회를 가로막으며, 대중심리를 교묘하게 통제하려 든다는 말이다.

 

지식인의 책무는 [부당한] 현실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개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여기(Jetztzeit)에서, 현실을 해석(Interpretationen der Wirklichkeit)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지식인의 역할이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5 이를테면, 사회현실을 외면하고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억압적 권력과 무지(無知)의 관성에 맞서 불편한 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의 문제를 덮고 거짓된 조화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바탕으로 급진적 문제를 형태화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이다. 따라서 지식인은‘진실로…모든 것을 말하고’[타자와의 대면에 앞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존재여야 한다. 그 본질은‘스스로를 진실과 대면케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무엇보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중국의 저항시인 베이따오(北島, 본명 趙振開)는 문화혁명(1966-1976)을 겪은 뒤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대응방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비겁함은 비겁한 자의 통행증,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이라고. 철저히 억압당했던 시대에 대한 시인의 평가가 이국땅, 다른 시간대에 와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지식인으로서 아무 탈 없이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필시 어느 정도 비겁함을 안고 살아가는 것일 터이다. 이렇듯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일이면서, 스스로 박탈당할 처지에 놓일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이다. 푸코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행위가 바로 파르헤지아(παρρησία)*16다. 말하자면, 파르헤지아 속에서 화자는 설득하기가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기를 선택하며, 거짓이나 침묵이 아니라 진실을 선택하고,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죽음의 위험을 선택하며, 아첨이 아니라 비판을,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위험에 맞선] 진실에의 용기는 생각만으로 하는 성찰이 아니라 삶으로 꾸려지는 자기 성찰이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지식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우리 건축이 강압적 현실에 대한 저항코드였던 적이 있었던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17 단언컨대,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나가면서, 〈개입하는 사유〉로서의 비평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물리적 구축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현실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건축계 스스로 사회·문화적 입지를 좁혀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이론, 비평 그리고 실무건축 전체가 이런 진단을 비껴갈 수 없는 것이 우리 건축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사회문제,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고 결과를 이끌어 내는 실천과 이를 뒷받침하고 새롭게 검토하는 ‘논박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개입하는 사유〉를 통해서만 이 무기력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사유가 개입해야 하는지 혹은 현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이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은 “사회인식의 전제이자 수단”으로서의 비평이어야 한다. 그로써만 비평이 그 힘을 오롯이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판적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18 왜냐하면 개개인의 사유는 ‘냉담하고……대개 무가치한 것’으로 끝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더 가치 있는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개입해야 한다. 이를 테면,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토론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박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무반성적 판단기준을 중단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한 장에서 논의되는 모든 것들은 특정 영역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횡단적이고, 전위적이며 초월적인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로써 비평적 발언이 지닌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소비되는 것에서 인식을 전환(혹은 형성)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문학기술의 개선이 위기의 산물, 즉 순수문학 영역에 들이닥친 위기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와 같은 현상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이 논의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새겨야 할 말이 있다.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구성수단의 형성기준은…언제나 현실과의 관계다.”*19 건축도 다를 바 없다.

 

 

  1. 이들 중 상당수는 학자연하는 태도를 취했고, 비평가의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게다가 서로 얽혀있는 인맥관계로 인해, 이른바 ‘주례비평’이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벤야민이 1930년대 초 《위기와 비평(Krise und Kritik)》이란 제목의 잡지를 구상하면서 남겼던 ‘가짜 비평’이라는 제목의 메모에는 부르주아 비평이“별난 인물, 기질, 독창성, 개성”에 대한 욕망에 봉사한다고 적혀 있다.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Ed. Rolf Tiedemann & Hermann Schweppenhäuser. Frankfurt: Suhrkamp, 1974, Vol Ⅵ, 참조.
  3. 이종건, 「건축 작품과 판단」, 《건축평단》, 2015년 가을호, p. 35
  4. Richard Sennett, 『The Craftsma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pp. 84-85
  5. 하버마스에 의하면, 기술적 관심(technische Interesse)은 자연을 지배하고 노동을 통한 물질적 기초를 재생산하려는 데서, 실천적 관심'(praktische Interesse)은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에의 참여의지에서, 그리고 해방적 관심(emanzipatorische Interesse)은 왜곡된 삶의 조건에 대한 반성과 비판, 그러니까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6. 하버마스는『인식과 관심(Erkenntnis und Interesse)』이란 책에서, 인식과 관심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통해, 인식론의 과업이 진정 무엇이어야 하는지 최초로 보여준 칸트의 비판 과업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인식 비판의 참된 의도는 인간의 자유와 성숙(Mundigkeit)을 가로막는 사회의 지배 체계와 이것을 인식적으로 정당화하는‘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에 대한 비판에 있다. 또 이런 연관성을 분석함으로써 그가 주장하려는 바는, 인식적 관심(Erkenntnisinteresse)이란 용어에서 잘 드러나 있듯, 인식 비판은 오로지 사회이론(Gesellschaftstheorie)으로써만, 그러니까 인간의 삶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인식의 조건들을 드러냄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식론 폐기(Aufhebung der Erkenntnistheorie)의 역사적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인식비판의 위기가 어떻게 도래했는지를 보여준다.
  7.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과정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균형이 인류의 발전과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그것은 타당하고 선한 것으로 오히려 추구해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이 악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에는 불균형이란 말이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한다.
  8. 예외적으로 주제설정이나 과학 이론의 구성과 검사의 규칙들에 대한 방법론적 물음의 단계에서 인식주체가 개입하기는 한다.
  9. 게오르크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ßustsein)』박정호·조만영 옮김, 거름. 참조
  10. 시의성이란 말의 본질적 의미는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
  11. 루카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대표하는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소설 『테레즈 라캥(Therese Raquin)』(1867)을 비판하는 글에서 “(자연주의는 사실주의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주체의 개입 없이 현실을 중립적으로 본다는 것은 현실에 대해 어떠한 비판의식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주체와 상관없이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고자 하는 자연주의적 관점이야 말로 착취와 억압의 흔적을 교묘하게 없애는 부르주아지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객관적 현실이라 말하는] 현실의 겉모습이 아니라 ‘현실 속에 은폐된 진짜 현실의 모습’을 들추어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리얼리즘, realism)’이라고 주장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12. “칸트의 [저술에서 드러나는] 비판개념은…단지 판단만하고 생산적이지 않은 정신적 태도라는 의미와는 무관하다. ‘비판적’이라는 어휘는 오히려 생산적이며 창조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ed. Rolf Tiedemann, Hermanan Schweppenhäuser, Frankfurt a. M. 1972, vol.Ⅰ , p. 51
  13. 여기서는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의 『건축 십서(De architectura libri decem)』나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건축론(De re aedificatoria )』이 제안하는 전인적(全人的) 건축가상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14. 촘스키는 『민주주의 교육(Democracy Education)』에서, “지식인 사회가 진실과 정의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그 효율적인 행사에만 헌신한다.”고 질타했다. 촘스키(Noam Chomsky), 사상의 향연: 언어와 교육 그리고 미디어와 민주주의를 말하다, C. P. 오테로 엮음, 이종인 옮김, 시대의 창. 2007. p. 554
  1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Thesen über Feuerbach〉에서, “지금껏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주장은 실천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6. 이 용어는 ‘모든’이라는 뜻의 πᾶν[pan, “all”]과 “입 밖에 내다” ῥῆσις [rhesis]/ ῥῆμα “utterance, speech”가 결합되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말하기’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푸코(M. Foucault)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이‘파르헤지아’라는 개념을 확장 ․ 발전 시켰고, 그로써 파르헤지아는 민회와 법정에서 실천되는 정치적 미덕에서 개인들 사이에서 실천되는 ‘도덕적 미덕’으로 변모한 것이라 한다.
  17. 용산, 남영동 대공분실(현재는 경찰청 소속 인권센터)을 떠올려 보자. 한국 최고의 건축가라 추앙받는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이다. 반인권적, 그리고 개발독재정권의 ‘한국기술개발공사’의 대표이사였던 인물에 대한 공과를 새로이 평가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를 결코 지식인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18. 홍성민, 『문화와 아비투스: 부르디외와 유럽정치사상』, 서울: 나남, 2000, 407쪽.
  19. 에르트무트 비치슬라, 윤미애 옮김, 『벤야민과 브레히트』, 파주: 문학동네, 2015, 227-2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