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작 요약문]

한성부의 ‘작은 일본’, 진고개 혹은 本町: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성부 일본인 거류지의 공간과 사회

글: 이연경

 

개항 이후 외부세계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하던 한성부에 1880년대 초반 일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중 대다수는 공사관 관리와 군인들로서 일본 제국의 대리자들로 온 것이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그저 한 몫 잡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국땅에 혈혈단신 온 자들이었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 한성부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한성부의 남쪽 끝, 남산 언덕 위의 진고개(泥峴) 일대에 자신들만의 거처를 마련하고 살기 시작하였다. 한성부 속 ‘작은 일본’은 이렇게 생겨 났다.

 

1880년대 이후 제국 열강이 한국 내에서 충돌하는 가운데 일본의 세력은 점차 커져 갔고, 따라서 일본인 거류지의 영역은 서울의 청계천 이남지역인 남촌(南村)일대를 아우를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일본인 거류민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거류지 내의 지명 역시 일본식으로 변경되어 진고개는 더 이상 진고개로 불리지 않았으며, 대신 ‘本町(혼마치)’라는 일본인 마을의 중심지를 뜻하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거류민들은 이 지역에서 일본식 집을 짓고 일본식 상점을 열고, 자치적 경찰제도와 소방제도도 운영해 나가며 일본에 의한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경 진고개 일대는 완연한 일본식 마을의 외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소규모로 일본인 거류지가 시작한 1880년대부터 일본에 의한 식민화가 본격화되는 1910년까지의 일본인 거류지의 변화는 1894~95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을 계기로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 1기는 남산 위에 공사관을 건축하면서 본격적으로 거류를 시작한 1885년부터 청일전쟁 이전까지의 1894년까지로서, 이 시기 거류지는 남산 북록(北麓)의 진고개 일대에 소규모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마련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 2기는 1895년 청일전쟁 이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 이전까지에 이르는 시기로, 거류지는 남대문로 방면으로 확장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일본식 마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지막 시기인 제 3기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1910년까지로, 거류지의 영역은 남촌 일대 전역 뿐 아니라 용산을 비롯한 성외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거류지는 식민화의 전초기지로서 정주지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거류지에서 나타난 도시 변화는 물리적인 도시의 변화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한성부에 들어와서 거주하게 됨으로 생긴 생활의 변화를 동반한다. 특히 일본의 정치적 침략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진출한 일본인 상인들이 이룩한 상업적 발전은 거류지의 성장과 한성부에 미친 영향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일본인 거류민들이 한성부 내에서 일본식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만들어낸 생활환경 역시도 거류지 도시 변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일본의 거류지 내의 도시변화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도시 생활의 변화 차원에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즉, 일본인 거류지의 도시변화를 위에서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변화, 즉 정치권력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시민 생활의 변화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일본인 거류지의 도시 변화를 물리적 환경이라 할 수 있는 도로환경과 도시 생활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상업환경, 생활환경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도로환경의 경우,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불안정한 거류지의 상황 속에서 이렇다 할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지만 1895년 처음으로 혼마치(本町)도로의 도로개수사업을 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거류지 내의 도로환경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거류지의 도로개수사업은 거류민단의 주도로 1895년 처음 시행한 이후 1910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로개수사업은 노폭을 확보하고 노면을 정리하는 것과 함께 배수로의 정비 및 하수도의 매설, 하천의 매립 등을 그 내용으로 하였으며, 도로개수사업 이외에도 거류지에서는 1903년 소규모이긴 하였으나 상수도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도로를 개수하고, 상하수도를 구축하면서 거류지는 이전보다 교통이 편리하고 청결한 도로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처럼 거류지 도로환경 개선사업은 1895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나름대로의 성과를 만들어 냈으나 이는 거류민단이 공공사업으로 시행하거나(도로개수사업의 경우). 사설로 설치하였던(상수도사업의 경우) 것이었기에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도시 계획의 측면에서 시행된 것이라기보다는 부분적이고 임기응변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성격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긴 하였으나 거류민단이 시행하는 거류지 내 도로개수사업은 여전히 민간 차원에 머무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업환경의 경우, 상인이 중심이 되어 발전한 한성부 일본인 거류지의 특성상 거류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류 초기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한 수준에서 설치되었던 일본인 상점들은 점차 거류민 인구가 증가하고, 한일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거류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및 한성부 내에 거주하던 기타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거류지 상업은 각종 무역잡화를 비롯하여 의복, 식료, 주생활 등에 필요한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거류지 상업의 발전에 따라 점차 대형화, 복합화되어 갔다. 거류초기 진고개 일대, 즉 혼마치(本町)4~5 정목 일대와 고토부키마치(壽町, 현 주자동) 일대에만 설치되었던 일본인 상점들은 청일전쟁 직전인 1893년 남대문로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청일전쟁 이후에는 남대문로 주요 지점들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일본 상인들의 한성부 주요 상업가로로의 진출은 청국상인과 한국 상인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상설점포를 설치하고 쇼윈도우에 상품을 진열하고 적극적인 광고를 하는 등 새로운 상업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청국상인과 한국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시작하였다. 혼마치(本町)도로를 비롯한 이 일본식 상업가로환경은 약 7m 정도의 폭을 가진 좁은 도로의 양 옆으로 2층 규모의 마치야(町屋)들이 건축되어 만들어졌는데, 상점으로 사용되는 것은 주로 1층 부분이었으며 그 중에는 쇼윈도우가 설치되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마치야의 전면부는 간판 및 휘장, 점등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마치야 이외에도 2~3층 규모의 목조 비늘판 서양 건축물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층 이상의 건축물에 화려한 장식을 한 상점 건축이 등장함에 따라 이 도로 위를 걷는 사람들의 경험 역시 변화하게 되었으며, 이는 도시의 번화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 시기부터 만들어진 혼마치(本町) 상업가로는 1910년 이후 원래 한성부의 중심 상업 가로인 종로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여 남촌의 중심 상업가로가 되었다.

 

거류지의 생활환경은 새로운 도시 제도의 도입과 도시 시설들의 설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거류 초기부터 거류지에는 거류민 보호 및 거류민 생활 편의를 목적으로 외교기관들과 공공시설, 그리고 자치 행정시설들이 설치되었으며, 위생, 의료 시설들과 가족 단위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교육 시설들이 등장하였다. 또한 거류지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의 종교 시설들과 전쟁을 전후하여 군인들이 대거 유입됨에 따라 유곽과 같은 유흥시설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거류지에는 거류민들이 일본 본국에서와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들이 설치되었으며, 다양한 제도들이 도입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거류지의 생활환경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 및 교육, 위생 제도와 그 시설들에서는 상당히 근대화가 진전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으나, 거류민들의 일상적 의례들과 생활, 특히 종교 문화나 유흥 문화 등에서는 에도(江戶) 시대의 문화가 그대로 나타남으로써 상당히 ‘일본적’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는 한성부 일본인 거류지의 경우,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었다기보다는 주로 서일본지역 출신의 상인계층이 중심이 된 민간에서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만들었던 것이기에 당시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활문화가 그대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식민지화가 시작됨에 따라, 거류지의 생활환경은 전체 한성부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으며, 1910년 이후에는 그 것이 더 본격화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 지역의 생활환경의 구축은 1910년 이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 일본식 문화가 깊게 개입되는 것의 전단계로서 의미가 있다.

 

약 25년간의 시간 동안 일본인 거류지는 외부적 상황과 상호영향관계 하에서 내부적인 변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한성부의 남산 북록 남촌일대의 면모를 크게 변화시켰다. 단층의 초가집이나 소규모 기와집으로만 이루어졌었던 이 일대의 경관은 2층 이상의 일본식 혹은 서양식 건축물들의 등장으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일본인 거류지의 혼종적인 경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주거지로서의 단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남산 북록 일대는 일본인들의 거류가 시작된 이후 혼마치(本町) 도로 주변으로는 상업적 성격, 청일전쟁 이후에는 혼마치(本町) 도로 입구 주변에는 행정적 성격, 남산일대에는 종교적 성격이 강화되었으며 러일전쟁 이후에는 신정 일대에 유흥지역이 설치되고 1907년 이후에는 왜성대 일대에 관사들이 들어서면서 관사 및 행정지가 형성됨으로써 점차 다양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인 거류지의 도시환경 변화 같은 시기 메이지 일본과 한성부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성부에 온 일본인 거류민들은 기본적으로 1880년 이후에 일본에서 온 이들이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온 이들이었다. 이들의 출신성분상 변화의 중심에 있거나 도쿄와 같은 대도심에서의 근대적인 도시 변화를 직접 목도한 이들은 아니었으나 한국보다 먼저 서양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메이지 정부가 시도하던 근대적 개혁들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기에, 거류지에서도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시행되던 교육 및 위생 제도 등을 도입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메이지 일본과 마찬가지로 거류지 내에도 그 생활문화는 여전히 에도 시대의 것에 머무르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한성부와 일본인 거류지는 상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처음 거류지가 설치되었을 때에는 거류지 자체가 소규모였고 그 위치 역시 한성부의 주변부에 위치하였기에 거류지 내의 변화가 한성부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 적었으나 점차 거류지의 영역이 팽창하고 중심부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거류지 내의 변화는 한성부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거류민 들의 거류지 내 토지 및 가옥 소유를 둘러싼 문제라든지, 거류지의 도로개수사업 시행에 있어 한성부의 가가철거 및 도시개조사업과 영향을 주고 받는 등은 한성부와 거류지의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일본인 거류지의 도시환경변화는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민간 주도의 아래로부터의 변화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곳의 변화는 정치적인 식민지화가 시작되기 이전 일본인 상인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위한 도시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것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었다. 일본인 거류민들은 거류지에서 만들어낸 변화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초기의 불안정한 상황들을 이겨내면서 그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변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일본인 거류민들이 만들어낸 거류지의 변화를 식민지화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일본인 거류지의 도시변화라는 것인 메이지 초 일본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양상과 전근대적인 일본의 에도시대의 양상들이 혼합되어 있었던 것으로, 일본인들이 주장하듯 근대적이고 문명화된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리적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1885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거류지에서 만들어진 도시적 변화는 1910년 이후 한성부의 전체적인 도시 변화로 이어지면서, 한성부 전체가 기존의 북촌 중심의 도시 구조에서 남촌 중심의 도시 구조로 재편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 동안 전통도시 한성부에서 근대도시 경성부로 전이하는 과정은 일본에 의한 식민화라는 단절을 계기로 완전히 분리된 개념, 즉 식민화 이전의 한성부와 식민화 이후의 경성부로 다루어졌는데, 이 연구를 통해 일본인 거류지가 한성부에서 경성부로 전이되는 연결고리로서 남촌 일대의 도시 변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910년 이전 서울에 살던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도시 환경의 변화 및 생활의 변화는 당시에는 거류지 내부에만 국한되는 문제였지만, 식민지화가 본격화됨에 따라 전체적인 한성부의 도시환경과 도시민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와이드AR> 39호, 제6회 심원건축학술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