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심사평]

글: 김영철(심사위원, 건축이론연구소 군자헌)

 

2014년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에는 모두 4인이 응모했고 응모자는 각각 주 평론 1편과 부 평론 2편씩 총 3편을 응모하였다. 심사자에게 무기명으로 제시된 평론들은 예년과 비교하면 월등히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문제의식도 날카로웠으며, 논리도 비교적 정연해서 건축비평의 문화가 성숙의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건축학습 과정에서 습득된 지식의 구성이나 나열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판단의 제시나 불합리의 상황을 문제로 의식하고 있는 점도 두드러졌다.

 

심사의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비판 의식
  2. 논제 구성과 문제 파악의 정교함
  3. 논증을 뒷받침하는 사실들
  4. 문제의식으로부터 대안을 도출해 나가는 과정의 명료함
  5. 제기한 문제의 시대성과 역사성 부합 여부

 

1.

[주 평론] <차운기 건축에 나타나는 고향의 의미>의 저자(응모자: 이경창)는 다른 세 응모자에 비해서 월등하게 풍부한 지적 자산을 갖고 있었다. 현대 문명과 도시화의 과정에서 균형을 잃어가고 있는 주거의 의미, 구축의 가치, 인간의 삶이 함께 해야 하고 또 스스로 보살펴야 할 의미의 영역을 문제로 내세운 점은 탁월하다. 그가 제시한 ‘고향’, ‘은둔과 자적’, ‘졸박’, ‘기억’, ‘향수’ 등의 개념어들은 많은 오늘날의 건축인들에게 오히려 아득한 과거의 정취를 환기시킬 수도 있지만, 저자에게는 이들이 건축의 의미영역을 담당할 주제였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거주를 가능하게 할 ‘진정한 의미의 집’을 논증해나갔다. 이러한 주제를  차운기의 건축과 작품에서 발견하고, 그 의미를 해명한 점이 놀라웠다. 그 해명의 과정과 논리가 단순히 과거 어느 한 건축가에 대한 연민과 그의 건축작품에 대한 주관적 찬사가 아니라는 점은 그가 추적해간 현대 문명과 건축 양상들의 대비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가 선택한 주제와 그의 해명을 위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여기에 대해 단지 찬사를 던져서 그것이 일회의 사건으로 머물기에는 그가 제시하는 건축의 비전은 근본적이어서, 이를 더욱 굳게 다듬어야 하고, 그 위에 세워질 것을 위해 하나의 척도로 작용할 수 있으며, 당위성도 가진다. 저자가 읽어낸 차운기의 건축이 유토피아, 즉 꿈의 세계를 목적하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 세계는 마찬가지로 철학자 벤야민에게도 진정한 가치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거의 방식이 주장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꿈의 요소들을 살리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의 정석이 되어야 한다.” 그가 기록한 이 인용문은 분명 오랫동안 건축가들이 그려내려고 다투어 온 건축의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2.

[주 평론] <조민석-이질적 접합의 건축>의 저자(응모자 : 박성용)는 이론의 역할과 가치를 배경으로 현대건축, 특히 창작의 문제를 진단하고 있다. 이론을 대체하는 개념어로 ‘규율’을 선정하고 있고 그 규율이 작동하는 방식, 또 현대건축의 규율이 보편성의 영역에 머물기 다루기보다 ‘개별성 차원의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이 규율이 ‘사회의 이질성을 강화하는 퇴행적 성향으로 사회에 비춰진다’고 보며, 세속화를 부추기고 상업화의 경향으로 치닫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를 근거로 건축의 영역, 특히 창작의 내부 논리에서 ‘이질성’이 하나의 원칙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보고 있으며, 이를 하나의 비평 도구로 설정하여 조민석의 건축을 ‘이질적 접합의 건축’으로 해명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의 논리 구성에서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 현대 건축가들이 ‘건축작업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잃어버린’ 상황이라는 전제가 타당한지, 보편성과 개별성이 등가의 영역이고 또 대립이 가능한지, 더 나아가 조민석의 Pixel House의 이질성이 Y-염색체로, 딸기 테마 파크 작품이 Χ-염색체로 대별될 수 있는지, 또한 조민석의 건축이 ‚남성성+여성성’의 추구의 이질적 접합인지 의아스럽다. 이 논제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좋겠지만, 저자는 이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이들이 ‚편의를 위한’ 논제로 설정된 것이라면 도구의 가치 이외에는 다른 역할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용 대상에 적합한지의 문제에 답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도 남게 된다. 비평 실천의 저자에게 기대하는 것 중에서 우선은, 그가 작품이 스스로 드러내는 의미의 영역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가 이 과정에서 집중해서 던졌던 시선이 내용이나 형식 규정의 활자들로 옮겨졌다는 확신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점이다.

 

3.

[주 평론] <기억과 치유의 건축언어>(응모자 : 박지영)에서는 건축의 역할과 기능을 다루었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났던 큰 사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문제로 삼은 다음, 건축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담지자로 설정하였다. <세월호 추모관> 건립의 촉구 상황에서 건축의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했을 때, 저자가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은 건축물의 기능 혹은 목적이다. 그렇게 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자가 건축에서 기억, 또 치유가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를 묻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들을 ‘남겨두다’, ‘물성’, ‘체험’, ‘빛’의 개념어들로 구성해가고 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건축물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서 한정적으로 다시 건축물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건축물이 현존하지도 않을뿐더러, 예시의 기념관, 기념비들에 대한 비평도 저자는 실천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예리한 관찰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논의는 건축 각론과 유형학의 영역에 머무르게 되는 단점이 있다.

 

4.

[주 평론] <정기용론 : 건축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저자(응모자 : 임한솔)는 회화의 영역과 건축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기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건축을 구축의 형식 논리에서만 보려고 하지 않고 의미의 영역을 인문의 차원에서 해명하려고 한 노력은 찬사의 가치가 있다. 형신론形神論, 전신론傳神論이라는 동아시아 이론 틀을 제시한 점, 형을 가시의 영역으로, 신을 정신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정기용 건축론을 펼쳐간 점이 돋보였다. 그런데 정기용이 흙 건축에 대한 예찬에서는 논리적 귀결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주관이 앞서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건축이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공간’이라는 전제는 타당하다. 그런데 ‘공동체적 세계관을 가꾸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과연 ‘흙은 이용한 건축에 담겨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다. 정기용의 건축이 흙을 재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흙이라는 정신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라는 맺음말에 대해서는 저자에게 공감을 표하고 싶다. 이 주장이 현대건축의 경향에 대한 비판이기는 하지만, 만약 저자가 정기용의 건축을 대변할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숙고의 입장을 보였더라면, 현대건축에서 형의 영역보다는 신의 영역에 사유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많은 건축가가 보일 저항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5.

네 응모자 작품들 가운데 주 평론과 부 평론이 모두 각각 균형을 이룬 유일한 경우는 이경창의 응모작들뿐이었다.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건축적 상황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의 근본 개념들이 소통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의식도 함께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다소 거칠고 분절이 더 필요한 주장들이기도 하였다. 엄밀한 인용방식도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건축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읽었다. 그리고 더욱, 이런 의지가 건축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며, 주장에는 힘이 실려 있었고,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위해 구사할 수 있는 지적 자원들도 풍부해서 비평가로서 해야 할 역할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금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의 수상자 이경창에게 찬사를 보낸다.

 

[<와이드AR> 43호,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