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당선작(단평론1)]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 이은영 건축 비평

글: 이경창

 

한국인으로서 독일에서 거둔 성공만큼이나 독특한 이은영의 건축은 합리주의 건축가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꽤나 교육적이다. 그 스스로도 강연이나 글에서 자신의 건축이 교육 또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하니 이보다 잘 맞아떨어질 수 없다. 이 글은 인간에 관한 하나의 기본적 입장 즉, 건축가의 삶에 대한 태도를 중심에 놓고 서술하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늘 본질적인 질문들에 있었고, … 20대의 한국에서의 시간들이나 30대의 독일에서 보낸 시간들 모두 그러한 절대적 가치가 있는 건축적 행위에 대한 갈구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그 어떤 것,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다다르고 싶고, 그것을 담는 건축을 단 한 차례라도 할 수 있다면 살았던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하며, 비효율적이라 할 만큼 그 일에 외곬으로 집착하였다.”

 

그의 글과 강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를 고르라면 단연 “본질”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이나 어지러운 세상의 타락에 맞서 그의 건축은 오히려 역행이라 할 만큼 현대 건축의 유행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그것은 건축의 오래된 가치에 대한 공부와 이를 통한 수련이라는 지난한 과정의 산물인 동시에, 오랜 고행의 결과이다. 유행과 수다스러움에 집착하는 세태를 거슬러 본질적 가치에 대한 천착은 윤리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을 통해 오래된 전통적 가치인 비례나, 공간의 순수성, 유형의 명료함이 재확인된다.

 

건축에 프로포션에 관해서나, 공간의 순수성에 관해서나, 유형의 명료함에 관해 보편성과 완전성을 부여하는 것은 현대건축이 추구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작업이다. 그것은 수다스러운 조급함이 아니라 기본 원리에 입각한 사고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의 추구는 건축에서 역사적 선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모든 건축가, 모든 예술가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라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합리주의자들은 이를 기본 유형의 확립에 있다고 보았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전 또는 훌륭한 역사적 선례에서 발견되는 시대를 초월한 기본형을 찾고 이를 활용하면 자신의 건축 또한 고전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유형학이라 부른다. 이은영이 테세노프(Heinrich Tessenow, 1876~1950)의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유형학적으로 활용한 것은 이태리 신합리주의 건축가 조르지오 그라씨(Giorgio Grassi, 1935~)의 치에티 학교(1976) 계획에서 슁켈(Karl Friedrich Schinkel, 1781~1841)과 테세노프의 건축적 선례를 활용한 사례와 유사하다. 건축설계의 결과물이 주관적으로 흐르는 것을 피하면서, 역사적 유형에 의해 추출된 형태의 객관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신합리주의자의 의도였다. 따라서 이은영은 정확히 신합리주의자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합리주의자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알도 로시와 조르지오 그라씨의 합리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아 사회개혁적 함의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웅어스(Oswald Mathias Ungers, 1926~2007)를 거쳐 이은영으로 이어지는 합리주의는 이제 하이데거식 실존주의와 만나 “구도자의 길”이자 “윤리적 선량함을 바탕으로” “실존”을 모색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본질추구의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의 “한양정”이라는 건물일 것이다. 만약 통일성없는 이질적인 환경의 한 복판에서 주변 모두와 어울릴 수 있고 이 모두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은영은 이에 대한 명쾌한 해법중 하나를 보여주었다. 모든 다양성에 반응하며 그 다양성과 어울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다양성의 근원으로 가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제시해버리면 이후 주변의 모든 다양한 변화는 그 근원의 파생이므로 모든 건물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이은영은 이 건물의 선례를 하인리히 테세노프의 “프로라 홀” 계획안(1936)에서 찾는다. 모든 서양건축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신전의 형태에 삼각형 페디먼트만 제거된 모습이다. 가느다란 열주와 지붕 슬라브로만 이루어져 극히 절제된 형태를 띠고 있다. 그야말로 중심없이 부유하는 캠퍼스에 중심을 세우려는 시도가 잘 맞아 떨어진 결과다.

하지만 문제는 이 건물을 바라볼 때가 아니라 이용하려 할 때다. 그림 1, 2에서 보이듯 여기를 이용하려면 테이블을 가져와야 되고 앉을 자리도 기대어 쉴 곳도 없다. 정자(亭子)를 뜻하는 한양정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머물 곳이 없는 것이다. “亭, 停也”라고 중국 한나라때 허신(許愼)이 문자 해설서 『說文解字』에 밝히고 있듯 정자(亭子)에서 정(亭)은 곧 머물다(停)는 뜻이 아닌가. 본질은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므로, 그 외의 모든 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애초에 여기에 의자를 둔다든지, 테이블을 두는 행위는 바로 본질에 대한 타락에 불과하다. 백색의 색채도 그렇다. 순수 또는 순결을 뜻하는 백색은 모든 색의 근원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러기에 모든 색과 어울릴 수 있지만, 행위를 담는 순간 즉, 삶의 때가 타는 순간 쉽게 얼룩져버린다. 왜냐하면 삶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흔적이 본질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헤이리에 있는 소담갤러리 또한 역사적 선례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으며, 주변 대지의 여건에서 강한 선형성을 부여하기 위해 테라스가 전면에 배치되어 계단형으로 계획되었다. 정면형태는 그야말로 한양정의 반복 즉, 그리스신전의 단순화로 보인다. 이은영은 “완결성 있는 비례의 추적”이 가장 중심에 놓인 테마였으며, 이를 위해 모든 부수적 요소를 배제하고 색채와 재료를 단순화시켰다고 한다. 잡지에 실린 정면의 모습은 백색의 색채와 간결한 기둥의 비례감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며 극적인 성공을 거뒀는지 얘기해준다.

 

역시 문제는 이를 사용하려 할 때이다. 2층 침실의 내부 조차 고전건축의 균제(symmetry)를 위해 엄격한 대칭을 유지하고 있다. 이 침실은 흥미롭게도 아이젠만의 주택연작중 주택6을 즉각적으로 연상시킨다. 아이젠만의 침실은 벽체 중앙에 수직으로 유리창을 내어 침실을 반으로 나누고 있어 강제적으로 부부는 침대를 달리 나눠서 사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전혀 다른 성향의 건축가들 건축에서 비슷한 현상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아이젠만의 건축이 자신의 자율적 건축의 프로세스에 의해 침실을 강제적으로 나누어버린 것처럼, 당시 잡지에 실린 소담갤러리의 침실 사진은 완전한 비례와 엄격한 대칭을 위해 침대도 두 개 대칭적으로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여기에 커튼을 달 수 있을까?

 

최근에(2012년) 답사한 헤이리 소담갤러리는 많이 변해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위치에, 지금은 독도관련 단체의 사무실로 변하여 커다란 독도 그림이 한쪽 벽면을 가리고 있으며 테라스의 난간엔 태극기가 걸려있다. 정면의 6개 열주는 10개로 늘어나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예상컨대 건축주가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로 보인다. 이로써 그의 독특하고 완결성 있는 비례의 추적은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지고 변해버렸으며, 본질과 시대를 초월하고자 했던 기본형은 오래가지 않아 변질되고 타락(?)해버렸다. 이는 건축가의 고상한 의도를 모르는 건축주의 잘못인가? 태극기와 독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애국심은 본질에서 벗어난 비본질이며, 시대를 초월한 기본형에서 벗어난 일탈이나 타락일까? 애초 아래층은 갤러리로 위층은 주인의 거주지로 계획되었는데, 프로젝트 진행과정속에 폭 5.5m의 규제 때문에 2층 주거부분의 공간확보가 어려웠다고 한다. 당연히 테라스까지 넓힌다는 수정이 제시되었지만 엉뚱하게도 열주가 없어지고 건축가의 계획개념이 어긋나는 것을 우려한 건축주는 본래의 계획대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처럼 그의 비례와 본질추구는 삶과 무관한 곳에 있다. 삶을 건축가가 생각한 본질적 형상, 기본형에 맞추어 버린 결과이다. 그 결과를 생생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2004년 함양 수해이주민 마을 계획이다. 그는 한옥의 기본형식인 3칸의 공간을 건축디자인 요소로 끌어들여 이를 7개의 유형으로 조합하고 다양한 형태를 구성하여 이를 “주민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다. 뒤집어 보자면 결국 건축가가 자의적으로 만든 형태속에 주민들이 끼어들어가 살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유형의 탐구와 본질 추구가 과연 건축주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그들의 삶의 요구와 욕망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알도 로시의 갈라라테제가 균일한 격자로 만들어졌으나 그 속엔 일상 삶의 다양함이 끼어들 여지를 허락한 것과 비교하지면 이은영의 건축은 얼마나 이를 허용하고 있을까?

 

본질에 대한 추구는 결국 “극단적 미학추구의 경향”으로 기울어 버렸다. 극단적 미학추구는 윤리적 선량함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애초 그의 윤리성과는 어긋나는 계기를 엿보게 된다. 백색의 건축이 순수함의 추구로 보며 이를 윤리와 연결짓는 근대건축의 모습은 이미 지나간 신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은영에게 듣는 말은 고전건축의 시대를 초월한 목소리라기보다 철지난 근대주의자의 목소리에 가깝다.

 

슈투트가르트21세기 도서관의 가장 본질에 해당하는 공간은 완전히 백색의 균일한 격자로 사각형의 개구부가 뚫려있다. 사방의 개구부로 둘러싸인 이곳은 주변의 시선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 곳은 건축가 스스로 제시한 그래픽 이미지에서조차 머물지 못하는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머물기에는 눈길을 끄는 다양함이 전혀 없으며, 주변의 격차 창을 통해 내려다 보는 시선의 부담감은 그저 빠르게 스쳐 지나가야할 통로가 될 뿐이다. 본질의 추구는 항상 비본질을 구분 짓는 차별주의의 씨앗을 잉태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상 현대철학자들이 “본질”이라는 단어를 가장 터부시하는 이유이다. 그의 본질추구와 합리주의는 스스로 고백하듯, 한양정의 격자체계가 어긋나면서, 슈투트가르트 21세기 도서관의 입면이 완전한 정사각형이 아니게 되는 이유에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한다. 슈투트가르트 21세기 도서관의 입면에서 표현된 격자속의 격자는 무한 공간을 암시하는데 이는 곧 영원함의 추구와 연결되는 것이다.(그림 13) 9*9의 격자로 배열된 입면은 4.85*4m로 계획되어 엄격한 합리주의적 도식에서 벗어나 버렸다. 현실은 그렇듯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 이상을 어긋나게 만든다. 그도 이런 현실과 이상의 어긋남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합리주의자들이 가진 이성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점에 조우하게 되는 숙명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그의 탈출구는 이런 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위태로운 초월적 힘으로의 탈출을 추구하는 것 같은 우려가 든다.

 

이국에서 오랫동안 어떤 본질적 가치를 목표로 몰두해온 이은영의 성공은 많은 스포트라이터를 받은 만큼, 한국땅으로 이식되어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게 될까? 회남의 귤이 탱자가 될 것인가(橘化爲枳), 아니면 토양을 바꾸게 될 계기가 될 것인가.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근원으로의 침잠은 우리 세태에 울리는 경종의 의미로서 소중하다. 하지만, 이런 구도자의 길이 미학주의로 변해버린다면, 자칫 삶의 다양함을 환원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문득, 상상컨대, 신화 속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는 세상 어느 침대보다 아름다운 침대는 아니었을까?
*원문에는 다수의 주석과 그림자료가 함께 게재되어 있음

 

[<와이드AR> 43호,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