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작 요약문]

도리구조와 서까래구조

– 동아시아 문명과 목조건축의 구조원리

 

글: 이강민

 

I.

동아시아 각국에서 별도로 시작된 건축사의 연구는 길게는 100여년의 시간을 두고 발전해왔다. 초기에는 주로 양식사 연구에 착안하였고 그 이후 건축기술에 대한 연구로 발전하였으며, 최근에는 건축행위 이면의 배경과 의의를 추적하는 단계로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점차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건축사학은 개별적인 사례의 축적과 정리를 통해 온전한 건축사를 구성할 수 있다는 오해를 유발하였다. 하지만 민족 건축사의 연구가 누가 먼저이고, 언제 도입되었고, 독자적인 발전이 있었는지에 대한 사실근거에만 관심을 갖는 한, 문명권적 보편성 속에서 동아시아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립하기 힘들다.

 

중국 일부지역의 선진문명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했을 시기를 제외하면, 한 지역은 여러 건축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다양한 건축문화를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문명권 차원의 공통점이 인지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라고 하는 보편종교의 전파, 이들 경전을 통해 공유하고 있었던 한자 문학의 성숙, 천자국과 제후국의 관계로 구성되었던 외교관계는 소위 동아시아 중세문명의 바탕을 이루었다. 민족건축의 특수성은 바로 이러한 문명 차원의 보편성 아래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건축사 연구 중에서도 목구조 연구는 줄곧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건축에서는 구조부재 자체가 시각적인 의장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또 목구조의 연구에서 출발해서 장식의 문제, 공간의 기법, 사회상의 반영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문제는 목구조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는 구조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방식, 또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지역의 역사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전각의 목구조는 서양의 목구조와는 달리 지나칠만큼 웅장하고, 개설서의 표현과는 다르게 영원함의 기념비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으며, 거대하고 무거운 지붕을 굳건히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나무의 재료적 성격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연구는 위와 같은 인식에서 출발했다. 연구대상을 개별적인 사실근거의 수집과 정리의 차원에서 보편적인 입장과 관점의 문제로 확장하고, 나무로 지어지는 건물의 구조원리를 다시 검토하여, 다양한 건축태도들 사이의 공통성과 특수성을 인지할 수 있는 근거들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동아시아 민족 건축사학의 거대한 성과들의 시비를 각각 가리고자 하는 시도까지는 아니며, 오히려 이들 성과들을 일관성의 구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II.

먼저 동아시아 건축문화의 공통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인지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구조원리가 적용되는 태도에 의해 지붕구조의 유형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기존의 목구조 유형학의 단절된 구분법을 벗어나 연속성의 관점을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건축구조를 중력에 반하는 방향으로 인공물을 확장시키는 것으로 정의할 때, 그 방식은 부재를 쌓아 높이를 달성하는 적층원리(積層原理)와 부재를 세워 높이를 달성하는 입가원리(立架原理)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의 구조에서는 이 두 원리가 항상 공존하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 원리가 발현되는 강밀도(强密度)의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차이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구조방식의 태도를 형성하였고, 지붕구조의 유형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중 자연환경과 건축재료의 특징에서 비롯한 원시건축의 구조는 비교적 일관된 원리가 구현된 것으로서 건축구조의 기본개념을 만드는 모델로 작용하였다고 판단된다. 적층원리에 기반해서 부재를 쌓아나가는 도리구조와 입가원리에 기반해서 부재를 세우고 끼우는 서까래구조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구조의 유형일 뿐만 아니라, 구조원리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위치하여 이후 발생한 복잡한 유형의 특성을 비교할 수 있는 좌표계를 만들면서, 두 구조원리의 적용 태도를 이끄는 인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도리구조의 모델로 설명할 수 있는 건축문화는 적층원리를 응용해서 지붕구조를 발달시켜온 경향이다. 동아시아 건축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조와 형태를 보여주는 공포(栱包)는 도리를 받치기 위한 구조로 시작되었고, 정면의 처마도리를 받치면서 중요한 의장요소가 되었다. 한대 유물에서 보이는 도리구조는 거대한 사각형 프레임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후 공포의 발달과 함께 2개의 도리 사이에 공포가 삽입되는 방식으로 대체되었는데, 모두 적층원리에 기반한 발달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서까래구조의 모델로 설명할 수 있는 건축문화는 입가원리를 통해 지붕구조를 발달시켜온 경향이다. 많은 학자들이 서까래구조의 시원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온전한 서까래구조의 형태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건축문화를 주도했던 중원 지역이 도리구조를 중심으로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즉 도리구조와 비대칭적으로 결합한 서까래구조는 분화되어 부분적인 요소로 사용되었다. 인(人)자 모양의 구조는 지붕구조의 중심에서 마룻대를 받치는 역할과 정면구성에서 패턴을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또 도리의 위치가 좌우로 이동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조 장치로도 이용되었다.

 

동아시아 건축의 구조와 의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서까래구조인 하앙(下昻)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처마를 돌출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앙은 서까래구조의 분화에서 발생한 새로운 기법으로, 중원문화의 고대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납작한 가로부재를 층층이 쌓은 구조와 결합한 형태로 출발하였다.

 

도리구조와 서까래구조의 비대칭성은 문자로 기록된 사회적 인식을 통해서도 파악된다. 각각 별도의 이름을 갖는 도리들로 구성된 오가옥(五架屋) 개념은 고대의 예제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높으면서 동시에 넓은 지붕을 만드는 효과적인 해법이었기 때문에, 향후 동아시아 건축 지붕구조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III.

동아시아 건축에서 도리구조와 서까래구조의 발달과정은 실제로는 두 지붕구조형의 결합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형태적 조합이 아니라 각각의 모델이 근거하고 있었던 구조원리의 교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당대 이전까지의 결합과정은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도리구조에 편입된 서까래구조는 마룻대를 받치는 기본구조가 되었고, 입면의장의 필수요소가 되었으며, 더구나 난액(闌額)이라고 하는 끼우는 가로대가 보급되는 과정을 매개했다. 두 지붕구조형이 결합하는 과정에는 보편화되지 못한 실험들이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두 구조를 아래 위로 결합하려던 시도들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중원지역에서 두 지붕구조형의 결합은 당나라 때에 완성되었다. 기존의 공포형태가 도리와 평행한 평면적인 모습이었다면, 7세기 초당시대에 들어와 앞으로 돌출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8세기 성당시대에 하앙이 결합한 모습이 등장한다. 이 때 하앙은 7세기 일본건축의 사례와는 다르게 2개가 적층되어 있는 형태로 바뀌어 있다. 하앙이 적용되는 방식은 지역적,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초기 용례와 원리적인 추론을 통해 발달을 추정해 보면, 점차 아래로 내려오고, 길이가 짧아져서, 결과적으로 공포 속으로 삽입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결합은 도리구조가 건물의 중심을 담당하고 서까래구조가 처마부를 담당하는 역할분담으로 일단락되었다.

 

또 당대의 법령에 간가(間架)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칸(間)은 기둥 사이의 공간을 지칭하는 단위로서 정면의장과 관련되는 개념이다. 한편 가(架)는 지붕구조에서 도리의 개수를 세는 말로서 건축구조와 관련되는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은 당나라의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법령으로 제정되었으며 이후 전통시대말까지 유지되었다. 공간형식과 구조부재의 결합방식도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송대 영조법식(營造法式)은 이와 같은 구조기술과 개념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부재의 단위를 통해 일관된 구조의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포와 하앙의 결합방식에 대한 균형있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영조법식의 전당식(殿堂式)과 청당식(廳堂式) 구조는 서로 다른 구조원리에 의해 구축되었지만 도리를 기준으로 운용되는 구조라는 점에서 서로 교환이 가능한 구조였다. 이는 하앙의 도입을 매개했던 정간식(井幹式) 적층구조가 분해되어 공포대로 바뀌거나 두터운 들보로 대체되면서 가능해졌다. 이와 같은 지붕구조형의 결합과 구조원리의 교환은 간가개념의 형성과 함께 동아시아 건축의 보편성의 근거를 제공한 이후 또다시 그와 같은 규범적 시스템은 등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IV.

이후 각각의 상황에 맞추어 개성이 드러나는 동아시아 건축의 목구조는 다시 지역적 특수성이 점차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발달의 여러 변이들은 고전적 구조공간 시스템을 만들어갔던 지붕구조형의 변화과정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도리구조에 입가원리가 도입되고, 서까래구조에 적층원리가 적용되는 등 구조원리의 응용은 건축구조의 해법을 크게 늘렸고, 지역적 개성으로 설명되는 특징들을 만들어냈다. 다만 서까래구조와 도리구조의 결합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진 점을 고려할 때 서까래구조의 변화가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났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적층원리가 적용된 서까래구조는 일종의 들보 역할이 강해졌다. 예를 들어 중국건축에서 하앙이 적층되는 경향, 한국건축에서 추녀 결구기법의 변화, 일본건축에서 길목(桔木)을 사용하는 방식 등은 모두 서까래구조에서 하중을 견디는 경사보의 기능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리구조에서는 공포가 차지하던 비중이 낮아지고 단순한 뼈대구조로 이행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하앙을 사용하지 않게 된 지역에서도 서까래구조의 모티브는 장식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명청대 건축의 가앙(假昂)이나 한국건축의 쇠서는 모두 하앙의 흔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구조공간의 규범을 느슨하게 했지만, 반대로 도리구조의 상징성은 공고해져갔다. 중국과 한국에서 도리를 기준으로 하는 구조단위는 명청대 혹은 조선시대에 더욱 확고해졌다. 예를 들어, 청대 공정주법칙례에서는 들보의 길이를 표현하는데 상부에 걸리는 도리의 개수를 이용하기도 했다. 또 실제 건물과 고대 경전에 표현된 목구조 명칭과의 모순적 상황에서 고문 해석의 논리를 바꾸어서라도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도리구조의 사회적 정당성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도리구조가 발달시켜온 기둥을 생략하거나 이동시키는 기법들을 통해 보편적인 구조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한편, 상대적으로 중원문화의 영향이 적었던 지역에서는 서까래구조의 전통이 보다 강하게 표출되었다. 일본의 합장조(合掌造) 민가나 장쑤성 북부의 금자가(金字架) 구조 등은 서까래구조가 면면히 유지되어 오고 있는 사례이다. 베트남에서는 고급 건축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북부 베트남 전각의 구조발달의 역사는 중국에서 수입한 적층원리에 기반한 지붕구조가 점차 서까래구조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V.
요컨대 구조원리의 적용방식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 동아시아 목조건축은 구조원리의 모델로서 도리구조와 서까래구조라는 고대의 지붕구조형이 지속적인 구조방식의 태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도리구조를 중심으로 서까래구조를 편입시킨 모습은 다양한 건축주체의 공동기여를 의미하지만 문명 중심지의 건축태도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지붕구조형의 결합은 구조공간의 규범을 만들어 동아시아 건축의 보편성의 근거를 만들어 내었고, 이후 다양한 지붕구조 유형의 참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를 지닌다.

 

[<와이드AR> 27호, 제4회 심원건축학술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