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당선작 수상 소감]

글: 박정현(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18세기 말 프랑스의 건축이론가 캥시는 ‘유형은 과거의 예술이 더 이상 지금의 예술가에게 구속력 있는 모델로 작용하지 못하는 순간에 부상한다’고 말했다. 비평과 이론의 위상도 유형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거칠게 말하면 비평과 이론, 뭉뚱그려 글의 힘이 발휘되던 때는 과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래를 그려보일 수 없는 시대, 동시에 건축을 관장하는 보편적인 원리나 근거를 찾으려는 열망은 남아 있던 시절이다. 이때 글은 형태의 (의심스러운) 길잡이였던 것이다. 물론 타푸리라면 이를 실무적 비판이라 폄하하겠지만, 길지 않은 비평의 역사에서 비평이 특정한 가치의 정찰대나 파수꾼이 아니었던 때가 얼마나 있었던가? 그러나 상대주의와 취향의 개인주의가 판단의 최종 잣대가 된 지 오래인 지금 누가 깃발을 들고 서 있으려 할까. 비평은 사후적으로 대상을 평가하고 공유할 만한 의미를 길어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별점주기로 축소된 영화평론과 등단제도라는 산소호흡기를 떼지 못하는 문학평론의 예에서 미루어 판단할 수 있듯, 요즈음 비평이란 글쓰기 양식의 위상은 보잘 것 없다.

 

대자보와 유인물의 시대였던 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꾸밈건축평론상과 공간건축평론신인상 수상자들의 모임인 건축평론동우회와 <와이드AR>이 제정한 <와이드AR> 건축비평상에 당선되었다. 한국 건축계에서 비평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선배들의 호출에 응답한 셈이다. 하지만 1, 2회 모두 당선작이 없었기에 당선작을 통해, 이 비평상이 지향하는 방향과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또 고백하자면, 비평이란 존재의 당위와 역할, 비평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 수상소감이 즐거움과 감사의 표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도 이 무지와 불확신 때문이다.

 

안팎의 사정이 이런데도 비평상 공모에 굳이 글을 써낸 까닭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궁핍한 변명은 비평의 불가능성이란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무엇이 이 불가능성의 조건을 만드는지를 먼저 짚어보는 것이 비평의 호출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여겼다. 물론 짧은 세 편의 글에서 저 거창한 목표를 달성했을 리 만무하다. 일종의 비평론이었던 “비평의 언어: ‘비평의 죽음’ 이후의 글쓰기”와 다른 두 글 “서울시청사: 유리벽에 마주서다”와 “시장과 욕망의 변증법: 코엑스와 라페스타” 사이에 건너지 못할 모순과 불일치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건축의 외연이 확대되고 경계가 흐려졌듯이, 건축을 대상으로 삼는 글 역시 예전과 같을 수 없다고 위안을 삼을 뿐이다. 주저함으로 가득한 글의 가능성을 평가해주신 김영철 심사위원님과 지면을 할애해 함께 읽을 기회를 주신 전진삼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더불어 언어와 건축 사이의 간극과 접점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려 깊은 관찰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 배형민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하고 싶다.

 

[당선작가 이력사항]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건축의 소음과 인문학의 침묵”으로 AURI 인문학포럼 논문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 “정체성과 시대의 우울” 등의 글을 발표했으며,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배형민 저, 근간) 등을 번역했다. 서울시립대, 단국대, 홍익대 등에 출강했으며,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80∼90년대 한국 현대건축의 담론 구성”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와이드AR> 31호, 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