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당선작(주평론)]

서울시청사: 유리벽에 마주 서다

글: 박정현

 

 

 

 

무엇보다도 동적인 공간은 넓게 트여 있어야 한다. 이런 열린 공간은 열린 사회를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된다.1

 

현재 자리에 짓는 새 시청사는 ‘이게 과연 시청건물이냐’고 할 정도로 놀랄만한 명품으로 만들겠다.2

 

근 한 달간의 입주를 끝내고 2012년 10월 13일 서울시청사는 공식 개청했다. 7여 년에 걸쳐 여섯 차례나 설계가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서울시청사는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입주를 꼭 해야 하느냐”는 박원순 시장의 볼멘소리에서, 쓰나미 파도나 프린터복합기를 닮았다는 비아냥,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하나의 장막, 최후의 막내림”이라는 비판, 주변의 역사와 환경을 무시한 무례한 유아독존의 태도라는 비난까지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졌다.3 논란의 중심에 선 건축가는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기 2년 앞서 “앞날이 심히 염려되는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우려를 표명하며 서울시청사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4 하지만 이는 건축가의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기 어려운 턴키방식으로 진행된 설계·시공 과정에 대한 걱정이었을 뿐, 유걸은 시청사 설계에 대해서는 확고하고 분명한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다. 또 “평가야 어떻든 간에 새 청사가 대중들에게 건축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무척 흥미롭다며, 현재 이어지는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건축가의 의도와 그 실현, 그리고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는 일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비평적 관건은 이 어긋남을 건축가와 대중 사이의 쉽게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재확인하고 서울 시청사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언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쏟아지는 무수한 말들을 정교한 담론의 장으로 길어올리기 위해서는, 이 어긋남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논란과 별개로 서울 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공건축물일 수밖에 없는 서울시청사의 건축적 의미를 섬세하게 짚어보아야 한다.

서울시청사에 대한 많은 비판은 형태적 낯섦에 집중된다. 프로그램, 기능, 구조, 시공의 완성도 등을 이해하기 이전에 감각적인 인상으로 포착되는 형태에 먼저 압도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주요 공공 건축물에 대한 평가는 형태가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그리고 이 연상이 대중이 납득할 만한 것인지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삿갓을 떠올리게 하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방패연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상암월드컵 경기장 등 그 연상이 한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건축의 의미는 건축계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한국사회 속에서 안착한다. 설령 그 모습을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상암 월드컵 경기장 막구조의 방패연 모양은 항공사진으로밖에 확인할 길이 없다). 이는 단순히 속류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주의로만은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이다. 건축이 시각적 경험의 대상이 되는 사례가 흔치 않은 한국사회에서 특별한 건축은 언제나 다른 무엇을 떠올리게 해야 한다. 이는 건축이 재현적 맥락 속에 있기 때문이지 특정 건축사조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자다 일어나 눈을 감고도 화장실을 찾아가는 것처럼 일상의 공간은 발터 벤야민의 지적대로 지극히 촉각적이다.5 추상적인 건축을 독해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도 지적 훈련도 부족한 한국사회에서 일상의 영역을 벗어나는 건축은 랜드마크, 기념비, 스펙터클 등 시각적 소비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적어도 공공건축물로는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서울시청사를 두고 닮은꼴 리스트가 무수히 이어지는 현상에 낯설어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건축가 스스로 건축물의 상단부는 한국 전통 건축의 처마에서 형태를 차용했다고 설명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논란이 문제라면 처마가 처마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형태 논리 너머의 지점을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시청사의 특이성을 포착하지 못한 채 소모적 논쟁으로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서울시청사를 두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 메뚜기 눈, 에스프레소 머신, 쓰나미, 복합기 등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서 이 건물을 바라볼까? 또 열린 공간이 열린 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하는 건축가는 어디에 서서 건축의 꿈을 꾸고 있을까?

 

서울시청과 시청 앞 광장은 분명 남쪽과 서소문로 방향으로 열려 있다. 하지만 차를 타고 지나가며 시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남대문 쪽에서 시청의 정면을 바라보고 접근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종로, 청계천, 광화문 등 시청의 북쪽에서 광장으로 걸어들어 오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광장은 남쪽으로 열려 있지만 광장으로의 유입은 주로 북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많은 경우 시청의 뒷부분과 옆모습을 먼저 만나게 된다. 광장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새 청사는 수직으로 올라가는 매스보다 수평으로 퍼진 것이 더 적절하다는 건축가의 판단은 적확하다. 그러나 서울시청 광장은 시청사의 정면성을 확보하는 축을 형성해주지 못한다. 강렬한 정면성을 마주하고 차츰 거리를 좁혀나가며 광장을 가로질러 건축물에 접근하는 싱켈의 알테스 뮤지엄과는 다르다. 서양 고전 건축의 기념비성은 건축 하나의 가치이기도 하지만 건축과 도시의 만남에서 확정된다(성 베드로 성당과 베르니니의 열주랑이 빚는 강렬한 축, 포폴로 광장과 무한 소점에 가까운 로마의 가로 등). 베를린의 알테스 뮤지엄이 하나의 특권적인 시점을 설정한다면 서울시청은 그렇지 못하다. 플라자 호텔 쪽에서의 접근은 시청역 6번 출구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울시청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시청과 특정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분산되며, 대개는 빗겨서 있다. ‘메뚜기 눈’의 연상은 정확히 프레스센터에서 시청으로 내려오는 관찰자의 것이다. 기타 무수한 촌평들 역시 모두 건축 외부에서 느낀 인상에 기대고 있다.

이에 비해 유걸의 위치는 건축 내부에 있다. 서울시청사는 유걸 건축의 핵심적인 장치들이 되풀이해서 사용되고 있다. 외부와 내부를 비교적 분명하게 구분해 내부에 대형 공간을 마련한 다음, 그 안에 인공 자연을 도입하고, 내부에서 여러 동선을 교차시켜 다양한 움직임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배재대학교 국제교류관, 벧엘 교회, 대덕 교회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걸의 전매특허다. “ 유걸이 설계한 광대한 공간을 걷는다. … 이곳들을 거닐다 보면 이전에 이런 곳에 온 적이 있었나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6 우리가 서울시청사에서 느끼는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9층까지 개방되어 있으며 눈앞에 수직으로 뻗는 그린월은 방문객을 압도한다. 한국의 공공건물에서 이런 내부 공간을 만난 적이 있던가. 서울시청사를 관찰하는 특권적인 시점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그것도 내부에서 유리 표면으로

바깥의 광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린월에 압도되고 하늘로 열린 상층부를 올려다보는 시점이다.7 포획당한 시선은 건축 내부에 머문다. 그렇기에 건축의 주체를 내부 공간이라고 여기는 건축가의 의도는 여기서 탁월한 수준으로 성취된다. 유걸 건축의 힘이 남김없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서울시청사를 둘러싼 시차(視差)를 확인할 수 있다. 즉각적인 외부 인상으로 건축을 규정하는 대중과 내부의 강렬한 경험을 중시한 건축가의 간극은 바라보는 위치의 차이를 정확히 반영한다. 이 시차는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르게 파악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의 차이가 아니다. 시점의 차이가 동일한 사물을 서로 다른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8 어쩌면 유걸과 대중은 다른 대상을 두고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시청사는 관찰자가 서야 할 특권적인 위치를 설정하지 않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관찰자인 외부자가 아니라 점유자이자 참가자라는 내부자를 염두에 둔 건물이다. 유걸이 꿈꾼 열린 공간은 건물의 바깥에서 서성이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일까?

 

 

잃어버린 투명성을 되찾기 위해 우리가 역사를 고치거나 무너뜨리지 못할 것도 없다.9

 

유걸은 외부 공간과의 관계를 정교하게 설정하기보다는 광활한 내부 공간의 역동성을 마련하는 데 열중한다. 조망 조건이 나쁘지 않은 대학캠퍼스에서도(배재대학교), 일산의 가장 중요한 공공 공간인 미관광장에서도(벧엘 교회) 바깥으로 공간을 여는 데 무척 인색하다. 안으로 닫힌 공간은 장소와 무관하다고 해도 좋은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유걸도 서울광장의 무게 앞에서 주춤한다. 도시를 포기했다고까지 과격하게 말하지만,10 시청과 광장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시를 향한 손짓의 건축적 표현은 다름 아닌 투명성이었다. 구 청사를 통해서 새 청사로 출입하게 되어 있었던 애초의 계획에서 광장과의 소통은 전적으로 시각적이었다. 여기서 두 번째 어긋남이 빚어진다. 첫 번째 어긋남이 시차에 따른 건축가와 대중의 차이였다면, 두 번째 어긋남은 유걸 건축 내부에서 빚어지는 갈등이자 현대 건축사에서 유리와 투명성이 만들어내는 파열음이다.

턴키에 의해 어그러지기 전인 2008년에 발표한 유걸의 프레젠테이션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면은 시청사 상부에 자리잡은 콘서트홀을 묘사한 렌더링이다. 문제의 ‘메뚜기 눈’에서 서울시향 상임 지휘자 정명훈이 서울시향과 피아니스트를 이끌고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고, 그 너머로 덕수궁이 선명하게 보인다. 육중한 구조는 가는 선으로 대치되었고 유리는 수정 같이 투명하다. 현실 속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 렌더링은 환상(fantasy)이다. 유리 표면 안에 별도의 구조와 외피로 지탱되어야 하는 콘서트홀에서 덕수궁이 설령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음향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면 콘서트홀의 내부 마감을 유리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투명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공중에 매달려 고궁을 바라보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가벼운 구조와 유리의 투명성으로 건축가가 전달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여섯 번이나 설계가 뒤집어지면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건물 전체를 뒤덮은 유리 커튼월이다. 오세훈 전 시장이 주도한 디자인서울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던 세빛둥둥섬 역시 유리가 주요 외장재였고 서울시의 공공건축물 가이드라인에서 강조하는 것이 개방감임을 고려한다면 투명한 유리 커튼월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권위주의의 오랜 폐해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투명성은 진정성과 함께 모든 판단의 최종 심급이다. 건축에 좀처럼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유걸조차 “사무 공간 전면의 수직 공간을 통해 시행정은 시민에게 개방되며, 서울시청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표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11 물론 정치, 행정, 민원의 투명성과 건축의 투명성은 별개이지만,12 정치의 수사적 표현과 건축의 물리적 성격이 이처럼 강력하게 결합한 예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우후죽순처럼 신축된 지방자치단체와 각종 관공서 청사 건축물에서도 유리 커튼월은 획일적이라고 할 만큼 사용되었지만, 용인시청사처럼 도심에서 떨어져 있거나 부산시청사, 경기도 경찰청사처럼 상층 사무실은 커튼월, 저층 민원부는 석재 마감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민원으로 청사를 방문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중의 일상적 삶과 유리되어 있다. 더구나 이들 공공건물은 군사정권 시절 지어진 권위적인 관공서만큼이나 천편일률적이고 익명의 모습이어서 건축적 상상력을 조금도 자극하지 못한다. 서울시청사는 이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도심 속 유일한 광장, 자발적인 시민들의 활동과 자연스러운 모임이 동원된 단체의 이데올로기적 구호가 뒤섞이는 서울광장에서 대면하는 거대한 유리면은 서울 시민들이 여태껏 만나보지 못한 건축적 장치이다.13

그러나 유리의 투명성은 일종의 신기루이다. 유리는 투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울처럼 어떤 빛도 통과시키지 않고 반사하기도 한다. 유리를 지탱하기 위한 거대한 철 구조물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이 투명성을 원천봉쇄하는 장애물이 된다. 그렇기에 유리의 투명성은 매혹의 대상으로 숭배되기도 했고 변덕스런 저급한 재료로 폄훼되기도 했다. 이는 근현대 건축사를 관통하는 주제이지만, 낯설지만 때늦은 서울시청사의 도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건축사의 주요 국면들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유리는 철, 철근 콘크리트와 함께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재료로 꼽힌다. 하지만 기념비 건축물로 범주를 좁히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현대건축의 수호성인이었던 기디온은 누구보다 먼저 20세기 기술이 선사한 새로운 공간에 열광했다. “새로운 건축은 두 가지 근본적인 개념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공간이냐 조형성이냐. 이 낡은 용어로는 새로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코르뷔지에의 주택은 공간적이지도 조형적이지도 않다. 공기는 그들을 관통해서 흐른다. 공기가 구성적 요소가 된다! 공간도 조형적 형태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관계와 상호관입이다! 단 하나의 구분할 수 없는 공간이 있을 뿐이다.”14 『프랑스의 건축, 철 건축, 철근 콘크리트 건축』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기디온은 새로운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에펠탑에서부터 코르뷔지에의 여러 건물까지 수많은 예를 다루지만 그의 관심은 정확히 구조에 집중되어 있다. 철과 철근 콘크리트가 가져다 준 가능성에 환호한 것이다. 여기서 유리의 자리는 이 구조를 가리지 않고 내외부를 구분해주는 막으로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이다.

훗날 『공간, 시간, 건축』에서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를 피카소의 회화와 비교함으로써 투명성 논의의 중요한 장을 열지만 이때도 유리의 투명한 면은 내외부 공간이 상호 관입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도구였다. 기디온에게 유리면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으며 유리의 투명성도 그 자체로는 미학적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20여 년 후 콜린 로우는 저 유명한 “투명성: 문자 그대로의 그리고 현상적”에서 기디온을 비판하며 유리의 투명성을 저급한 투명성이라고 일축해 버린다.15 현대 건축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몇 편의 글에 꼽힐 이 글은 유리에 대한 콘크리트의 승리를 공언한다. 이는 벽과 파사드의 복귀를 알리는 승전보였다. 대상을 한번에 파악하기보다는 계속해서 관조하고 살피게 하는 과정 자체(정확히는 이럴 때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인식능력들의 유희)가 미학적 경험이라는 칸트 미학16에 기대고 있는 로우에게 단박에 투명함을 읽을 수 있는 유리면은 수준 낮은 소재이자 기법이었다. 얼핏 보기엔 막혀 있지만 공간의 중첩과 관계를 담고 있는 벽이야말로 의미의 저장고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후의 담론에서 존재론적이고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건축, 현상학적인 경험을 말하는 건축, 지역적 특이성을 지향하는 건축, 자본의 파고에 저항한다고 주장하는 건축, 시적 만듦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건축 모두가 언제나 강한 물성을 드러내는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 등을 사랑했음을 알고 있다. 유리 건축의 자리는 현대 건축사에서 주변부였다. 한때 유리 건축은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 건축가들에 의해 유토피아의 표상으로 전유되었으며 미스 반 데어 로에에 의해 현대 기술 사회에서 건축의 가능성을 탐침하는 시험지가 되기도 했다. 개인의 징표이든 진정한 삶의 자취든 흔적을 남기기 힘든 유리의 속성에서 벤야민은 개인적인 취향의 체취를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남기는 부르주아적 주체의 대안을 발견하기도 했다.17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벤야민의 기대와 달리 유리 건축은 상업건축, 고층 사무소건물의 대명사가 되었다.18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가소성이 뛰어난 콘크리트는 좇아가야 할 모더니즘과 강하게 남아 있는 전통의 잔해를 한데 아우르기에 적합한 재료였다.19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근대성이라는 보편성과 전통이라는 특수성의 물질적 매개체가 콘크리트였던 셈이다. 프랑스 대사관, 부여박물관, 절두산 성당 등 한국 현대건축사의 기념비적 건물은 한결같이 콘크리트의 가소성을 십분 발휘해 강렬한 조형성을 과시한 것이다. 지난 세기 때때로 유령처럼 출몰하던 한국성 논의는 모두 이 매개의 방편을 둘러싸고 벌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에 반해 유리 건축은 대기업, 오피스, 상업 시설의 전유물이었고 진지한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못했다.20 강남을 뒤덮은 고층 사무실의 유리 커튼월은 아파트 단지의 콘크리트 더미와 보조를 맞춘 일상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었다. 장세양이 설계한 공간 신사옥은 유리의 투명성을 극도로 강조하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긴 했으나, 언제나 블라인드가 드리운 채로 구사옥의 신화를 더욱 강조하는 데 그쳤다. 투명한 유리 상자는 블라인드의 도움 없이 업무 공간이 될 수 없었다. 반면 강남역 일대를 장악한 삼성사옥은 거대한 거울입방체로 어떠한 시선의 투과도 허용치 않는다. 적어도 한국에서 유리, 그리고 그것의 물성(투과와 반사)은 마주하는 미적·인식론적 대상이 아니었다.21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서울시청사는 대중의 관심과 비평적 관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최초의 유리 공공 건축이다. 기형적인 턴키 제도를 통해서 탄생한 유리-(반)투명성-기념비적 공공 건축-탈형태 논의-탈엄숙주의의 낯선 조합은 여러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와 토론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어지는 논란은 건축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건축 담론에 생산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서울시청사는 건축가 유걸의 입지만큼이나 한국 건축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한편으로는 한국 유수의 대형 설계사무소가 지자체의 과대망상과 만나 턴키로 빚어낸 애물단지들과는 분명히 다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 침잠과 시적 엄숙주의에 빠진 건축과도 다르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 서울시청사의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시청사는 노먼 포스터나 렌조 피아노의 정교한 디테일과 역사적 유산과 하이테크의 공존에 미치지 못하며, 렘 콜하스의 명쾌하고도 참신한 다이어그램에 도달하지 못한다. 시대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도시를 반사하고 투영하면서 긴장을 불러일으킨 미스의 커튼월에도 견주기 힘들다. 그러나 서울은 런던, 파리, 시카고가 아니다. 역사와 과거의 유산에 대한 분명한 제스처를 취하기에 덕수궁은 고립된 섬이다. 구 청사와 광장을 동시에 껴안기에는 세종대로, 무교로, 세종대로20길에 에워싸인 대지는 협소하다. 더구나 구 청사와 광장 사이에는 어떠한 공간적 연계도 없다. 여기에 유걸은 요동치는 유리벽을 끼워넣고, 내부에 수직으로 공공공간을 마련했다. 이 공간이 도서관으로 변모한 구 청사와 함께 서울시청과 광장에 새로운 활력으로 작동할지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스펙터클이 참여를 독려할지 방해할지 역시 미지수다.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따라 흔적을 말소하는 유리의 급진성에 주목했지만, 70여 년이 지난 우리는 삶의 체취를 담지 않는 유리 건축이 자본주의의 첨병이었음을 안다. 건축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서울시청사는 서울 시민의 공공적 삶의 투명하게 담는 그릇일 수도, 도시의 냉소를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일 수도 있다. 서울시민들은 싫건 좋건 신청사를 앞으로 적어도 수십 년간은 시청 앞 광장과 함께 공공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시청사의 파도치는 유리벽과 내부의 오픈 스페이스가 정치인과 건축가가 희망한 ‘투명성’과 ‘열린 공간’으로 기능한다면, 결국 이는 관찰자가 아닌 점유자의 역할이다. 이때 우리는 건축의 미학이 아닌 윤리학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유걸, 『+Architect 01 Yoo Kerl』 (공간사, 2008), 20쪽.
2 오세훈 인터뷰, 『문화일보』, 2006년 6월 2일.
3 “박원순, ‘신청사 꼭 입주해야 하나’”, 『문화일보』, 2012년 7월 30일; 임근준, “서울시 신청사에 대한 난상토론”, 『건축신문』, vol.3 (2012, 9), 11면; 김규원, “’무례한’ 서울시 새 청사 좀 더 친절할 수 없겠니?”, 『한겨레신문』, 2012년 6월 18일.
4 유걸, “벽 없는 공간 만들기”, 『공간』 514호 (2010, 9), 55쪽.
5 Walter Benjamin, “Work of Art in the Age of Reproducibility (Third Edition),” in Selected Writings, volume 4, 1938-1940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 268.
6 배형민, “건축의 불안전한 경계”, 『+Architect 01 Yoo Kerl』 (공간사, 2008), 6쪽.
7 사실 시청 1 층에서 광장을 내다볼 수 있는 곳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새 청사의 절반 가량은 구 청사에 가려 있으며, 원안과 달리 광장으로 개방된 부분에 출입구가 생기면서, 정작 광장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은 동쪽 끝부분뿐이다.
8 시차라는 개념은 물론 지젝에서 빌어온 것이다. Slavoy Žižek, Parallax View (Cambridge MA: MIT Press, 2007) pp. 4-5;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마티, 2009), 14-15쪽. 지젝의 논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동일한 건물의 비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우는 현대건축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스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 대한 José Quetaglas 와 Robin Evans의 비평이다. José Quetaglas, “Fear of Glass: the Barcelona Pavilion,” in Architectureproduction, edited by Oakman & Colomina (New York, NY: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1988); Robin Evans, “Mies van der Rohe’s Paradoxical Symmetries,” AA Files, No.19 (Spring, 1990)
9 장 스타로뱅스키,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아카넷, 2012), 33쪽.
10 유걸, 『+Architect 01 Yoo Kerl』 (공간사, 2008), 138쪽.
11 같은 책, 60쪽
12 노먼 포스터의 독일의회와 런던시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와 행정의 중요한 결정이 일어나는 곳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건축을 통한 정치의 스펙터클화이다. 이 때 시각적 투명성은 첨단 보안장치를 동원한 엄격한 물리적 구분을 전제한다.
13 이종건은 서울시청사의 건설 과정을 지적하며 건축가 유걸을 옹호하지만 정작 건축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투명성(투명성과 프로그램의 관계나 현대 미학으로서의 투명성)의 시각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김빠진 맥주의 새삼스러운 등장에 다름 아니다.” 건축사의 관점에서 정당한 지적이지만, 여기서 관건은 김빠진 맥주가 아니라 “새삼스러운 등장”이다. 이 새삼스러운, 또는 뒤늦은 등장이 1967년 부여박물관 왜색 논란 이후 가장 뜨거운 건축적 토론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종건, “누가 유걸을 탓하는가?” 『와이드AR』, 29호(2012. 9-10), 30쪽.
14 Siegfried Giedion, Building in France, Building in Iron, Building in Ferro-concrete (Santa Monica, CA: 1995), p. 169. 독일어 초판은 1928년.
15 Colin Rowe, “Transparency: Literal and Phenomenal (with Robert Slutzky),” in The Mathematics of the Ideal Villa and Other Essays (Cambridge MA, MIT Press: 1976), pp. 159-183.
16 콜린 로우는 이 미적 경험을 “사변에 빠져들게 한다” (to indulge in such speculation: p.167), “ 지적 세련화” (cerebral refinement: p. 170) 등으로 표현한다. 이런 이해는 전후 미국 모더니즘 비평의 일반적인 입장이기도 했다. 쉽게 이해되는 산문보다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시가 훨씬 더 미적 가치가 있다고 본 신비평(New Criticism)이 대표적인 예이다.
17 Walter Benjamin, “Experience and Poverty,” in Selected Writings, volume 2, part 2, 1931-1934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p. 731-736; Detlef Mertins, “The Enticing and Threatening Face of Prehistory: Walter Benjamin and Utopia of Glass,” in Assemblage no. 29 (April, 1996), p. 18.
18 Frederick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90), pp. 38-45.
19 물론 철근콘크리트가 유리와 철골에 비해 낮은 수준의 생산양식에서도 비교적 손쉽게 생산할 수 있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20 유리건축이 학문적 관심의 대상에 벗어나 있었던 것은 비단 국내만의 사정은 아니었다. 유리와 하이테크 건축을 통한 도시의 재생과 공공건물의 기념비화와 스펙터클화의 물꼬를 튼 파리의 그랑 프로제 역시 아카데미의 사각지대였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는 Annett Fiero, The Glass State: the Technology of the Spectacle, Paris, 1981-1998 (Cambridge MA, MIT Press: 2003)을 참조하시오.
21 한국의 중산층은 유리의 투명함을 거실 발코니 전면창을 통해 체득한지 오래다. 넓은 전면창은 중산층의 욕망을 투사하는 장치이자, 그 폭은 외부에서 평수를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이다.

 

[<와이드AR> 31호, 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