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당선작(단평론2)]

시장과 욕망의 변증법: 코엑스와 라페스타

글: 박정현

 

 

 

“…이리하여 이러한 아케이드는 하나의 도시, 아니 축소된 하나의 세계이다”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A1.1)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과 인근 위성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로, 신촌, 강남역으로 영화를 보러 갔고, 옷을 사기 위해 명동, 압구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금도 서울의 전통적인 상업·유흥 중심지는 여전히 성업 중이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그 장소를 찾는다. 하지만 도심지의 쇠락과 맞물린 위성도시와 교외의 개발은 기존의 공간 편성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서울의 도심으로만 모여들지 않고 부도심과 수도권의 새로운 공간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는 단순히 개별 상업 지역의 흥망성쇠가 아니다. 이전과는 다른 공간 소비와 점유의 방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공간들을 더 이상 지명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연인을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삼성동으로, 일산 장항동으로, 한강로로 가지 않는다. 대신에 코엑스를, 라페스타를, 아이파크몰을 찾는다. 단지 대형 상업 건축물의 이름이 지명을 대신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대한극장, 서울극장, 단성사, 그리고 롯데 백화점, 신세계 백화점을 대신하는 기표이자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과 수도권 전역에서 자리잡은 복합 쇼핑몰은 우리에게 특정한 지역으로, 또는 특정한 용도와 프로그램을 가진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코엑스나 라페스타는 지역명이기도, 극장명이기도 하고(그 속에서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CGV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쇼핑상가이기도 하며, 이 모든 것 이상이다. 두 건물은 새로운 집합적 행위, 개인들이 움직이고 모여드는 새로운 방식에 상응하는 총체적인 공간이자 축소된 하나의 도시이다.1

코엑스와 라페스타가 기존의 상업 공간과 가장 확연히 구별되는 점은 규모다. 코엑스는 공용 면적 15,000평만으로도 서울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의 면적인 13,456평을 훌쩍 뛰어 넘으며, 임대면적 21,000평을 더한 총 시설면적은 36,000평에 달한다. 이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의 4.5배에 해당하는 크기로 동양 최대의 지하 쇼핑공간이다. 일산의 라페스타는 바닥 면적 6,600평, 연면적은 20,726평으로 이 역시 백화점에 비해 훨씬 큰 규모다. 서울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업 공간인 명동의 면적이 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등을 제외하면 1만여 평 정도이니 코엑스와 라페스타의 규모를 도시적 스케일이라고 부르기에 무리가 없다. 이는 단지 더 커진 백화점, 더 커진 시장이 아니다.2 코엑스몰은 한국무역협회가 컨벤션과 전시관 산업의 효율적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상업시설이고, 라페스타는 정부의 신도시 개발과 조닝에 따른 도시계획, 그리고 90년대 이후 부동산 개발의 새로운 주체로 급부상한 시행사가 결탁되어 만들어진 공간이다. 두 공간 모두 백화점을 탄생시킨 산업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와는 다른 경제적 토대 위에 서 있다.3 코엑스와 라페스타는 국가조차 통제할 수 없는 자본이 모든 영역으로 침투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 이면에는 전체적인 입장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이런 상황은 대규모 상업 공간의 정치경제적 독해를 점점 어렵게 만든다.

동일한 레벨에 모든 시설이 펼쳐져 있는 코엑스와 최고 5층 규모이기는 하지만 스트리트형 쇼핑 공간인 라페스타는 백화점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상업 건축물과는 공간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수직적 확장보다는 수평적 확장이 두 공간을 특징짓는 가장 큰 성격이다. 삼성역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개방된 선큰에서 아주 잠깐 동안 신선한 공기를 쐰 뒤 거대한 미로 코엑스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온 사방으로 열린 라페스타는 출구도 입구도 없이 일산으로 퍼져나간다. 혹은 일산 전체가 라페스타로 향한다. 두 공간의 규모는 인접한 시설과 기능에 의해 다시 수평적으로 확장된다. 코엑스는 도심 공항터미널과 전시·컨벤션 시설로, 또 현대백화점으로 건물 안에서 이어진다. 사람들은 어디서 라페스타가 끝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라페스타를 모방한 인접의 상가로, 롯데백화점으로, 할인매장으로, 미관광장으로 또는 호수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 두 건물을 내부에서 인식한다. 명동성당이나 63빌딩을 떠올릴 때 건물의 외관을 떠올리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이 두 건축물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단지 물리적으로 크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리엔테이션을 위한 축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에서 건물의 전체 지도를 쉽게 그리지 못한다. 이 두 건물은 물리적 규모에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식의 측면에서도 단일 건축물의 범위를 뛰어 넘는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수직 적층을 통해 대형공간을 만들어내는 근대적 방식과는 다른 수평적 연결 가능성, 이에 따른 파사드와 입면의 부재라는 점에서 코엑스와 라페스타는 동일하다. 하지만 두 건물의 안과 바깥이 만나는 방식, 바꾸어 말하면 주변 도시 조직과 만나는 양상은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단일 지하공간으로 이루어진 코엑스몰은 현대백화점, 공항 터미널, 인터컨티넨탈 호텔 등이 함께 속해 있는 블록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된다. 필지의 분할, 기능, 공간의 구성 방식 등 모든 면에서 주변의 도시 조직과 유사성을 발견하기 힘든 코엑스몰은 거대한 도시 속의 섬이다. 문자 그대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코엑스와 주변 사이의 경계는 수많은 길과 출입구에 의해 연결되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지역을 가르는 긴장이 형성된다. 이 긴장은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이다. 코엑스의 경계가 긴장된 막이라면 라페스타의 경계는 다공성 막이다. 라페스타는 주변 도시 조직과 상호 침투함으로써 흐려진다. 철저하게 계획된 신도시 상업지구의 균질한 필지 분할에 맞추어 자리 잡은 라페스타는 인근의 상가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역으로 인근의 상가가 라페스타와 유사한 배치를 하기도 한다). 바이마르 독일에서 모더니즘 건축물의 가로로 긴 창이 기존 가로와의 연속성을 유지시켜 주었다면, 일산에서는 가로로 긴 광고판과 현수막이 라페스타를 주변 건축물들과 완벽하게 동화시켜 준다. 라페스타에서 가장 높은 일산의 상업공간 밀도는 주변의 오피스텔들을 거치면서 차차 흐려지다가 호수공원과 정발산에 이르러 완전히 희박해진다. 서울의 베드타운 일산이 거대한 하나의 아파트단지라면 라페스타와 그 일대는 단지 내 상가이자 놀이터이다.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초에 유행하던 백화점을 제쳐두고 19세기의 유산 아케이드를 통해 당대 현실의 뿌리를 읽어내고자 했다. 폭발적인 상품시장의 확대로 생겨난 아케이드야말로 벤야민에게 고전적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역사였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와 시장의 산물이었지만 벤야민은 아케이드 속에서 조합과 공동체 운영이라는 푸리에적인 유토피아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벤야민이 아케이드에서 변증법적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었던 까닭은 아케이드가 지나간 것, 즉 알레고리와 멜랑콜리를 자아내는 퇴락한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확장일로에 있던 자본주의와 유토피아적 열망이 한데 뒤엉킨 19세기의 모습을 그리고, 이를 통해 메시아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 그에게 백화점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케이드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장소로 쇠락하는 동안 상품시장의 배출구, 자본주의의 만신전은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상품회전 기간의 단축과 낮은 가격, 상품의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백화점은 아케이드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4 아케이드는 프랑스어로 파사주(passage), 독일어로 파사젠(Passagen)이라는 말뜻대로 ‘통로’의 성격이 강했다. 기존 블록을 관통해서 만들어진 아케이드는 모서리를 돌아서 둘러가지 않고 관통해 지나갈 수 있는 요긴한 지름길이었을 뿐 아니라 갑자기 쏟아지는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산책로였다.5 아케이드가 도시를 향해 열린 아고라였다면 백화점은 그 자체로 완결된 판테온이다. 백화점은 통과지점이 아니라 언제나 목적지로 기능한다. 비록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입장한 그 속에서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1945년 이전에 완전히 만개한 백화점은 흔히 서구 부르주아 문화의 정점으로 묘사된다. 단순화하면 아케이드에서 백화점으로의 이행은 단일한 논리가 효율성을 극대화해 나가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백화점에서 코엑스나 라페스타로의 이행은 그렇지 않다. 소비재의 최종출구인 소매상의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코엑스와 라페스타는 백화점은커녕 재래시장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점들의 밀도와 입점해 있는 브랜드의 수 등에서는 바로 인접한 백화점이 월등히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화점과 코엑스, 라페스타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경쟁하는 동일한 상업공간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단지 고가 명품과 중저가 대중품, 수직적 집적과 수평적 펼쳐짐, 분야(department)와 혼재(hybrid), 단일 성격과 복합 성격 같은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코엑스와 라페스타를 단순히 상업공간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개개인이 의식적으로 행위하느냐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두 공간은 철저히 상업적이지만 동시에 공공 공간으로 작동한다. 빈의 링슈트라세나 박물관으로 변모한 루브르 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근대적인 공공 공간은 부르주아가 귀족과 벌인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혹은 부르주아 사회의 작동을 위해 만든 제로 기호였다. 우리의 현실에서 서구적 의미의 공공 공간은 부재한다. 공공 공간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사적 공간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전한 의미의 공공 공간과 사적 공간은 서로의 존재로 지탱되는 것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사적 영역이 침해된 것이 과거의 양상이었다면. 지금은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로 오히려 공적 영역을 사적으로 전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전선이 거리에서 시장으로 급속히 옮겨온 지금 광장과 공원, 문화시설과 같은 전형적인 공공 공간은 더 이상 이전의 공공적 성격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한다. 자본의 뒷받침 없이 공공 공간은 존립하기 점점 힘들어지며, 동시에 상업 공간은 쉽게 공공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

우리는 4년에 한번 월드컵을 맞아 국가주의 세례를 받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주말에 쇼핑을 하고, 서로의 외모와 차림새를 바라보며, 함께 영화를 볼 때에만, 다시 말해 거의 언제나 자본의 흐름에 동참할 때에만 군중이 된다. 대한민국 IT산업의 상징인 테헤란로의 끝단에 자리한 코엑스는 강남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중들이 거리낌 없이 모여들 수 있는 공공 공간이며, 도시계획에 따라 마련된 일산의 공공 공간인 미관광장과 호수공원은 상업공간인 라페스타 없이 온전히 작동하지 못한다. 우리는 롯데백화점이나 현대백화점 혹은 롯데월드를 들어가면서 느끼는 거대자본의 그림자를 코엑스나 라페스타에서 감지하지 못한다. 롯데 시네마나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독점 거대자본의 소비재를 구매한다기보다는 문화를 향유한다고 생각한다. 주말에 코엑스와 라페스타를 찾은 이들은 스스로를 휴식과 여가의 시간마저 자본에 의해 조종받고 있는 허수아비로 여기지 않는다. 이는 단지 거대자본의 이미지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공간들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이미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다음의 두 질문은 서로 배타적인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가능조건이다. “자본주의가 마치 공기라도 된 것처럼 철저하게 일상까지 스며들었기 때문인가? 대중의 욕망과 공공의 기능과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인가?”

 

거대시장은 마치 핵과 같다. 현대적 도시라 할지라도 이를 더 이상 흡수하지 못한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고독한 산책자(promeneur)의 몽상은 하루 종일 소일 삼아 아케이드를 거니는 산책자(flâneur) 앞에서 사라진다. 대리석과 아스팔트로 포장된 거리를 걸으며 쏟아지는 상품의 이미지에 온전히 노출된 현대의 산책자는 더 이상 숲길을 거닐던 인본주의자가 아니다. 일상의 현실 자체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대도시의 이미지에 포위된 산책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또 이 스펙터클을 어떻게 대하는가?

현대의 산책자에 관한 가장 탁월한 초상화가인 벤야민이 산책자를 대하는 태도는 이중적이다. “산책자는 시장의 관찰자이다. (…) 그는 소비자의 왕국으로 파견된 자본가들의 스파이이다.”6 산책자는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신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산책자는 포디즘의 생산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산책자의 빈둥거림은 분업이라는 생산 방식에 반대하는 시위이기 때문이다.7 벤야민은 산책자와 스펙터클에 도취되어 자신이 가진 개성을 외부 세계에 빼앗겨버리는 구경꾼, 더 이상 하나의 인격으로 볼 수 없는 구경꾼을 구분한다.8

도시의 산책자에 대한 정교한 묘사를 남긴 또 다른 거인 발자크에 따르면 산책자는 일과 대부분을 도시의 스펙터클을 바라보는 이이며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발자크는 산책자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과 함께, 관찰자의 계급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볼거리 가운데 상당 부분은 노동자, 군인, 매춘부 같은 사회 하층 계급의 행동이었으며, 산책자는 도시 풍경의 중요한 요소로서 옷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19세기 중반의 산책자는 불특정한 시민 일반이 아니라 부르주아 남성이었다.9 벤야민과 발자크가 그리는 산책자는 21세기 서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물 유형이다.

21세기의 산책자(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도 19세기의 산책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에서 벗어난 여가 시간을 쇼핑과 행인을 바라보며 보낸다. 하지만 지금의 산책자에 과거의 계급성과 젠더의 의미를 부과하기 힘들다. 부르주아 문화의 또 다른 정점이었던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마차를 타고 도착한 상층 부르주아들이 걸어서 극장 옆문으로 들어오는 하층민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계단은 코엑스나 라페스타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음의 주체이자 타인의 시선을 받는 관음의 대상이다. 산책자, 아니 우리는 일상의 모든 영역 속으로 파고든 규율 권력에 노출되어, 군중으로 모이지 못하는 고립된 개인일 뿐인가?10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전지구적 자본의 게임 속에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향유하는 냉소적 이성의 소유자들인가?11 이 물음은 결코 간단치 않다. 코엑스와 라페스타를 공공 공간 혹은 사적 공간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공간을 점유·이용·전용하는 이들을 규정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공간의 분석이 물리적 상황의 분석에 머물지 않고, 결국 주체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간의 성격은 건축물의 양식이나 용도와 무관하게 공간을 점유하는 주체들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 68혁명이 보여준 교훈이다. 라페스타 중앙의 거리는 1층에 위치한 상가의 매출 진작이 가장 큰 목표이지만, 이 공간은 단순한 통과 공간으로, 개를 산책시키는 공간으로, 시민이나 학생들의 자발적인 공연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전용된다. 모든 건축물이 그러하듯 건축은 계획가나 건축가의 프로그램대로 이용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라페스타 옆에 같은 개발사와 같은 설계사무소가 개발한 웨스턴돔은 통과와 쇼핑을 위해 필요한 폭 이상을 공용 공간에 할당하지 않았다. 웨스턴돔은 일산의 새로운 쇼핑센터로 부상하고 있지만, 라페스타와 같은 도시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상업 공간에서 공공의 그림자, 대중의 전유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또는 반대로 이 가능성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섣불리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벤야민에게 19세기 파리의 산책자가 자본주의의 첨병이면서 자본주의 생산체계를 벗어나 있는 사람이듯, 2012년 서울의 산책자는 모든 공적 공간마저 증발시켜버릴 듯한 자본주의의 노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빈틈없이 매끈한 자본주의의 표면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공간을 생산해내는 주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각주]

1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London: Verso, 1991), p.40
2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건축물이 특정한 크기를 넘어서면 거대함(Bigness)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그는 거대함은 건축의 ‘기법’ 등을 쓸모없게 만들고, 선악을 넘어선 영역으로 진입하며,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면서 맥락(context)를 엿먹인다고 말한다. Rem Koolhaas, S, M, L, XL (New York: The Monacelli Press, 1995), pp. 495~516.
3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을 따르자면, 후기 자본주의. 또는 후기-시민사회(post-civil society)이다. Fredric Jameson & Michael Speaks, “Envelopes and Enclaves: The Society of Post-Civil Society,” in Assemblage 17 (April 1992), p. 33.
4 Michael B. Miller, The Bon Marché: Bourgeois Culture and the Department Store, 1869-1920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p.48.
5 Walter Benjamin, Das Passagen-Werk(band1) (Frankfurt am Mein: Suhrkamp. 1983), p.85; 144쪽.
6 Walter Benjamin, 앞의 책, p. 538; 985쪽.
7 같은 곳.
8 같은 책, p. 540; 988-989쪽.
9 Elizabeth Wilson, “The Invisible Flâneur” in Postmodern Cities and Spaces (Oxford: Blackwell, 1995), p. 62.
10 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ment: The Birth of the Prison (New York: Vintage Books, 1977), p. 201.
11 페터 슬로터다이크, 『냉소적 이성비판』 (에코리브르, 2005).

 

[<와이드AR> 31호, 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