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수상작-부평론]

[부평론]

이소자키 아라타의 프리츠커상 수상과

NPP 사업의 허상

 

. 최우용

 

1

올해 초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의 프리츠커상 수상 소식에 우리 건축계와 언론 등에서는 또 한 번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세계 최고 권위의 건축상을 또 다시 일본건축가가 수상한 것이 못내 아쉽고 불편한 시선이었다. 이 불편의 골자는 ‘왜 일본은 되고 우리는 안 되는가?’로 축약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불편한 심정 뒤에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양가적 감정(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의 공존)과 민족 감정이 투영된 경쟁의식이 놓여있는 듯하다.

이소자키의 프리츠커상 수상 이후 우리 국토교통부는 5월21일 NPP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NPP 사업은 ‘Next Pritzker Project’의 약자인데, 정부가 다음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직접 발굴,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프리츠커상에 대한 열망은 이제 비단 건축계와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넘어 국가 정책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건축을 포함한) 문화란 것이 수상을 목적으로 또는 특별한 결과를 목적으로 함양되는 것인가? 문화란 것은 기계적 조련과 훈련을 거친 특정한 소수에 의해 고양되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화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급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배경과 환경 속에서 숙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의 NPP 사업은 한편의 관주도적 촌극이라고 할 만하다.

또 한 번의 일본건축가의 프리츠커상 수상과 관련하여 정작 중요한 것은 우선, ‘프리츠커상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며, 그 후 그럼 ‘왜 일본은 되고 우리는 안 되는가?’란 물음에 대한 대안 없는 푸념 대신, 그 이유에 대한 심도 있는 숙고 아닐까 한다.

 

2

브레진스키는 그의 책 『거대한 체스판』에서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 “국가 및 민족 단위에 조성된 임의의 권력 위기와 그와 연관된 구성원의 구체적 생활 위기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치적 성격의 정신태도 담론”이라고 규정한다. 국가적 또는 민족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위기가 정체성 형성 또는 고민에 대한 직접적인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정체성은 타자의 출현으로부터 비로소 발생하는데, 그러한 타자의 출현이 국가적 또는 민족적 단위에 위협으로 작동될 때 브레진스키의 설명처럼 정체성의 문제는 물리적·정신적 생존의 문제로 귀결된다. 근대 이후 일본건축의 정체성 문제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발생했고 또 전개되었다.

일본의 근대화, 즉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본격화된 서구건축의 출현과 침투 그리고 그러한 서구건축으로의 급격한 편입은 필연적으로 ‘일본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서구건축이란 불현듯,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외부 충격에 당하여 문화적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일본건축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란 타자(서구건축)에 대하여 그들 건축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구건축이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시점부터 일본건축계는 일본적 정체성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 등장한 동양취미 또는 일본취미, 제관양식 등은 일본 전통건축의 형태적 재현(representation)에 치중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러한 직설적인 형태 차용 등의 방법은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등과 결합해 프로파간다적 건축으로 소모되다가 태평양전쟁의 패전과 더불어 폐기되었다.

전후戰後 서구 모더니즘건축의 거장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일본건축가들, 예를 들어 마에카와 쿠니오前川國男(르 코르뷔지에), 단게 겐조丹下健三(르 코르뷔지에 & 발터 그로피우스), 요시무라 준조吉村順三(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안토닌 레이몬드) 등과 같은 건축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일본 근현대건축의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들 작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일본의 전통문화/전통건축의 표층과 심층을 아우르는 요소들을 당대의 보편적 건축 즉, 국제주의 양식으로 귀결되고 있는 모더니즘건축과 접목함으로써 일본건축의 정체성 확보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 건축가들 중 단게 겐조의 작업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1951년 마에카와 쿠니오와 함께 제8차 국제근대건축회의(CIAM)에 참석한 단게 겐조는 서구건축계에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였다. 회의 참석 즈음을 전후로 발표된 단게 겐조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과 가가와 현창사 등은 ‘보편성(모더니즘건축, 즉 서구 근대건축)’과 ‘특수성(일본전통건축)’의 결합과 조화라는 관점에서 서구건축계에 긍정적으로 회자되었는데, 비로소 단게 겐조에 의해, 서구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체스판에 일본건축이란 새로운 기물이 비교적 온전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앞 문장에서 사용한 ‘보편성’과 ‘특수성’이란 표현에 대해서 부연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필자가 표현한 ‘보편성’이란 용어는 서구의 근대건축이 건축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용어는 서구 근대건축의 최종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국제주의 양식이 도시화, 산업화된 대부분의 비서구권 국가들에서 지배적인 건축양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표현 가능한 용어다. 서구건축이 비서구건축을 평가하는 기준은 물론 그들 자신, 즉 서구건축이다. 건축-아키텍처의 문화적 근원이 서구에 있어서 그러하며, 아직도 그들의 건축문화적 헤게모니가 공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구건축의 역사에서 비서구권 건축은 부차적인 역사로 기술될 뿐인데, 펠리페 에르난데스의 표현처럼 “비서구권 건축들이 역사가들에 의해 칭송받는 것은 오직, 그것들이 유럽 건축규범의 관계성 안에서 고도의 세련성에 도달할 때”일 뿐이다. 서구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건축계에서 비서구건축은 서구건축의 대등한 타자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타자, 즉 서구건축을 빛내줄 대상화되고 물화된 타자에 머무르고 있다. 서구건축이 노정하고 있는 ‘보편-특수’의 이분법적 관점은 서구건축계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일본건축의 이야기로 넘어온다. 단게 겐조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그 자신을 비조로 하는 일가를 이뤘는데 이소자키 아라타, 마키 후미히코槇文彦, 구로가와 기쇼黒川紀章, 기쿠다케 기요노리菊竹清訓 등의 건축가들이 일가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이 중 단게 겐조 본인은 1987년 아시아인 최초이자 일본인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했고 그의 제자인 마키 후미히코는 1993년, 이소자키 아라타는 2019년 각각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건축가들은 비단 위에 언급된 3명만이 아니며 1995년 안도 타다오安藤忠雄, 2010년 세지마 가즈요妹島和世&니시자와 류에西沢立衛(이하 SANAA), 2013년 이토 도요伊東豊雄, 2014년 반 시게루坂茂을 포함하여 총 7회 8명에 이른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안도 타다오의 프리츠커상 수상과 SANAA의 수상 사이에 15년이란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인데, 이는 다만 물리적 시간의 간격이 넓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자면, 안도 타다오 이전까지의 일본건축가들의 프리츠커상 선정 이유와 SANAA 이후 일본건축가들의 선정 이유 사이에 비교적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 부류 건축가들의 선정 근거는 ‘보편성-모더니즘건축-서양’과 ‘특수성-일본 전통건축-동양(일본)’의 조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 후자 부류의 건축가들에게는 ‘보편-특수’의 이분법적 관점보다는 그들 각자의 건축적 개성에 선정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일본의 현대건축이 서구건축이란 타자에 대하여 일본의 전통 또는 지역성 등과 같은 일본적 특수성으로 그들 건축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서, 일본건축이 서구건축의 기율과 언어를 완연히 체화하여 그것들을 거의 그들의 모국어와 같은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또한 서구건축이 일본의 현대건축을 그들의 보편에 부속하는 특수한 아류가 아닌, 그들과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동등한 타자로 인식/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해 이소자키 아라타의 프리츠커상 수상은 프리츠커 재단의 선정 이유와 같이 ‘끊임없는 진화’를 이룬 젊은 영혼을 소유한 ‘세계인’ 건축가에게 보내는 헌사이며,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키텍처를 건축으로 번안해 낸 일본건축의 저력에 대한 서구건축의 인정이며 찬사이지 않을까 한다.

 

3

일제 식민지배의 36년. 굴종의 시간은 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트라우마적 상흔을 남겼으며 오욕의 역사를 기록케 했다. 해방은 어느 날 벼락처럼 다가왔으나 식민의 관성은 오늘 지금 여기에,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광복 후 반세기가 훨씬 지났건만 식민주의의 유령은 아직도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20세기 식민을 경험한 비서구권 국가들에게 식민주의의 영향은 “역사적으로 우리로부터 동떨어진 사건도 아니며, 건축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서구에 의해 이식·강요되어 구축된 식민지적 근대는 아직도 식민지 경험 국가들의 정신적, 물리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 정치적으로 독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정신과 문화의 영역은 아직도 탈식민에 이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건축에 있어서 식민주의 관성의 양상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서구의 건축이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식되었기 때문인데, 따라서 우리 건축에 어른거리는 식민주의적 잔상 또한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근한 예로 건축현장에서는 온통 일본건축 용어가 지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전히 ‘야리가다’(규준틀)를 메며 ‘하스리’(할석)를 해서 ‘데나우시’(재시공)를 한다. 현장뿐 아니라 설계사무실에서 또한 아직도 ‘메지’(줄눈)를 ‘와리’(분할)해서 입면을 작도한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의 건축가들은 일본의 근현대건축에 관심이 없으며 또한 의식·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건축을 무시한다. 반면 우리에게 서구건축은 하나의 경전이었고 교본이었으며 또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건축교육에서 한국건축사 등은 서양건축사에 대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르 코르뷔지에는 부정할 수 없는 신성의 대상이고 미스 반 데어 로에나 루이스 칸 등 또한 그러한 범접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 가까이 가고 싶고 또 닮고 싶은 대상인 것이다.

우리 건축에서 목도되는 일본건축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 그리고 서구건축에 대한 동경과 갈망은 스스로가 설정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동양-일본-의 부정과 서양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프란츠 파농이 말한 하얀 피부가 되고자 갈망하는 식민주의적 정신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츠커상 수상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열망 또한 이 연장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서구건축에 의해 주도(물론, 프리츠커상 또한 그러하다)되는 세계건축계가 비서구권 건축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 즉, 서구의 건축이다. 그들(서구건축)에게 호명되고자 하는 우리 욕구의 근저에는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권위 있는 상을 받고자 하는 욕구, 인정에 대한 욕구는 개인의 차원에서건 또는 국가의 차원에서건 일견 당연한 욕구일 뿐만 아니라 발전과 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탓하거나 부정할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건축에 대한 의식·무의식적 경쟁의식 또는 열등의식보다 문제시 되는 것은 프리츠커상 수상 자체에 대한 우리의 무비판적 욕망이다. 이 욕망 뒤에 가려져있는 식민주의의 잔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여전히 부재하며, 수상이란 결과 만에 대한 집착은 전혀 과정지향적이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 건축의 발전을 위한 생산적 논의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 곱지 않은 이웃나라 건축가의 계속되는 수상을 지켜보는 우리의 속내만은 복잡해 보인다.

36년 오욕의 시간은 그토록 가혹한 것이었다. 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의 자의식은 얼마나 쪼그라들었으며 정체성과 주체성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가. 프란츠 파농은 탈식민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그(들) 스스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는 주체적 삶을 위해 평생을 투쟁했다. 식민 지배를 받는 (파농을 포함한) 검은 피부의 검둥이들은 하얀 피부의 백인이 되고자 갈망했다. 그러나 하얀 가면 뒤에 숨겨진 검은 피부에는 자기소외와 열등의식 그리고 정체성과 주체성의 상실이 눌러 붙어있다. 파농은 하얀 가면 벗기를 주문하며 검은 피부를 그 자체로 인정하기를 요청한다.

우리 건축에서 파농 정신의 소환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프리츠커상에 대한 열망과 동경에 앞서, 서구건축에 대해 우리 건축 그리고 우리 삶의 방식을 비춰봄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우리 건축은 탈소외와 탈식민의 과업을 통해 좀 더 주체적인 우리식 건축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때, 프리츠커상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아니어도 그만이다. 우리 건축이 주체적인 우리 건축일 수만 있다면.

 

(이상의 수상작 관련 pdf지면 보기 와이드AR 통권 70호(2020년 1-2월호) 를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