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재관(건축가, 무회건축 대표)
비평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비평이란 원전에 대한 충실함과 언어에 대한 고심이 있어야 하지만 두 부분 모두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저 지나간 몇 년을 종종 만나 뒤뚱 이며 배치기도 하고 더러 밥도 먹었던 이웃의 건축가로서 그에 대한 기억을 생각나는 대로 적으려 한다.
처음 만남/ 디바이더 황.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월드컵이 열리던 즈음인 것 같다. 내가 운영하는 사무실에 건축가 황두진(이하 존칭생략)을 추종하는 보조원이 있었다.
“소장님. 황두진씨라는 분 아세요?”
“몰라.”
“ 그 분 홈페이지 대따 유명합니다. 거길 봤더니 수원화성 투어를 함께 가려는 사람을 찾더군요. 거기 가려는데 혹시 함께 갈래요?”
“너는 일은 안하고 맨날 인터넷만,,,”
수원화성을 보지 못했던 나는 일요일 아침나절의 느긋함을 포기하고 수원으로 갔다.
그날 황두진은 엘란이란 까만 차를 타고 등장했다. 주인에 비하면 깍쟁이 같이 생긴 차의 문이 열리자 듬직한 배를 가진 한 사내가 퉁겨져 나왔다. 정글에서 쓸법한 구불구굴한 모양의 챙이 달린 모자(왜 그리 모자를 쓰는 걸 좋아지 참…)와 캘빈 크라인의 까만 색안경을 썼던 그는 조금 거만했다. 줄곧 도회에서 자란 사람이라 표나게 결례를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는 법도 없었다. 그런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초면인 우린 어지간히 어색했던 것 같다. 그 어색함이란 사람에 대한 부침이 심한 나의 습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사람을 밀어내는 듯한 혹은 사람을 수월이 받아들이지 않는 의식적인 암시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언어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그것은 언제나 즉흥적이고 조리 있지 못함을 특징으로 했지만 황두진은 늘 정갈했다..
“저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좀 까부는 사람인 모양인데요. 머 저럴까요.지붕 모양이…안 그래요?”
“에~~~~~~저 건축물은 경기대학교 김동욱교수와 화성의궤에 의하면 There is 약용-정 앤 正組….에또 네…좔좔좔~~~”
그제서야 그가 예사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수원화성에 단순한 소풍을 온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 했다. 반면 나의 관심은 화성언저리의 허름한 두부조림 집이나 돼지머리 눌린 재래시장에 있었다. 그러니 그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없던 것이다. 투어를 마친 그는 맹꽁이차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실 통의동에 사고 싶은 조그만 주택이 하나 있는데 계약이 가까스로 되려다가 캔슬이 되어서 마음이 좀 무겁습니다. 오늘 차로 어느 곳까지 뫼시고 싶지만 마음이 무거워서…..” 휭!
몇 일 후 결국 그는 수원화성에 대한 글을 잡지사에 기고했다. 아~ 이 배신감.
황두진은 그랬다. 앞으로도 그가 어디를 가자고 하면 나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 같다. 그날도 글을 쓰기 위해 수원화성을 온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 이유가 없이 투어만을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얼마 전에도 살을 뺀다며 서울 성곽을 한 바퀴 산보하더니 슬그머니 책을 하나 만들지 않았던가? 참 놀랍고도 약 오르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때는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군인처럼도 보인다. 특히 현장에서의 그는 롬멜이거나 스탈린 그라드의 친위대장교와도 같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동반하는 그의 개화기여성스타일의 보조사는 부관이며 현장 소장은 식민지 출신의 특무상사일 것이다. 그러니 미천한 상사의 반역을 롬멜이 용서하겠는가?
두 번째 쯤 만남/ 후까시 황
그런 그가(툭하면 글을 짓고 걸핏하면 책을 만들고 특무상사의 반란을 화염방사기로 진압하는) 내가 잘 놀던 통의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우린 다시 만났다. 그가 구입하기로 한 집은 어느 해군장군이 살았던 그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그 집의 마당에는 포석정같이 생긴 연못에 살찐 비단잉어들이 가득했으며 변소도 매 층마다 따로 있었고, 부티나는 향나무들. 오랜 해를 묶은 굵은 대궁의 모란과 사발 만한 자줏빛 꽃들, 옆구리에 있는 영추문,그리고 2층에는 한 군인이 지휘봉을 말아 쥐고 있을법한 큼직한 베란다가 있었다.
거기에 비하며 우리가 놀던 친구의 집은 째끔했다. 이층이라곤 했지만 얼굴 빼쭉한 사람처럼 모졌고 마당이래야 잔디는 어림없었다. 그저 맨들 거리는 쎄멘으로 발라 있었고 그 귀퉁이엔 당나귀의 정강이처럼 구부러진 단풍나무가 가지도 잎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서 나와 친구들은 대통령선거와 같은 시시껍절한 이야기를 나누며 놀길 좋아했었다. 그러던 여름 날 황두진이 두툼한 배를 앞세워 이사를 왔다(더워했지만 색안경은 결코 벗지 않았음). 좁은 통의동 골목을 매운 트럭에는 태어나서 처음 본 하프시코드라는 악기와 내 책상의 두 배는 됨직한 도면함과 붉은 공단보자기에 쌓여진 음험스런 조선식 활과 ENGLISH의 원서로 가득했다. 그날부터 통의동의 생태계는 빠르게 변해갔다. 우선 나와 친구들은 말수가 적어져 갔다. 친구 집 벽에 결려있던 오십 평짜리 고추장 박물관도 그의 큼직한 모델과 비교되면서 빚을 잃어 갔고 입심 좋던 시사평론가도 발걸음이 점점 뜸해져 갔다. 그는 언제든 우리의 놀이터에 왔지만 우린 예약 후 방문했다. 체중에서도 그는 단연 으뜸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고 다루기 즐겨 하지 않았던 희한한 화제를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됨) 꺼냄으로써 여러 사람을 아뭇소리 못하게 하는 비범함까지 겸비 하였고 선전포고처럼 결론을 암시한 후 시작되는 시네마스코프적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들은 시름시름 앓아갔다.
“제가 요 옆에 출판사를 설계하여 공사 중인데 굴토 공사를 하다보니 조선시대 중기에서 후기로 살짝 넘어가는 시기라고 추정되는 그릇의 파편들이 여러 곳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그 일부는 한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좔좔좔~~·”
이쯤 되면 우린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이 사람이 설계하는 사람인지 고고학자인지를 헷갈려 했다. 땅을 파는 현장에 나가서도 그곳에서 출토되는 것들을 살피기는커녕 어수룩한 저녁의 고추장에 버무린 돼지고기와 향긋한 소주를 상상했던 나의 건축적 태도는 너무나 상습적이었다.. 그 뿐인가? 이사 올 동네를 이사도 오기 전에 간첩마냥 죄다 조사하고 동네의 내력과 신화와 전설과 소문과 역사를 따로따로 분간했고 그것을 다시 색깔로 구분하여 재구성했으며 다시 조합하여 시기별로 테마별로 구조별로 규모별로 보관했다.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또 다른 별동부대였다. 줄자와 사진기로 동네를 유린했으며 땅 주인의 허락도 없이 家설계를 해댔다.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었을 때 그는 무혈로 입성 했다.
황두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래 놓고 ‘동네건축가’라는 어수룩한 이미지의 타이틀을 자꾸 말한다. 믿어서는 안될 말이다.
세 번째 쯤의 만남/ 똥뱃장 황.
경기대학교 건축전시회가 종로 어디선가 있었다. 예닐곱개의 스튜디오 전시회가 한 공간에서 이루어졌고 패널들의 촉구와 학생들의 지친 호흡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들은 만장처럼 나부끼고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도무지 불가해한 암호 같은 도면과 아무도 몰라도 아무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는 언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용되는 게토였다. 거기서 만난 그는 아직도 거만 했다. 걸음걸이도 연못 속의 잉어마냥 느릿느릿 걸었고 조급하게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으며 다른 스튜디오를 한쪽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런 방자함에 비해 스튜디오의 학생들은 추레하다.
“저기~~~학생 이것은 어떤 작품인가요?”
“네..이건 상추나 열무 등을 수경재배를 하는 장치가 있는 주택건물입니다.”
“수경재배 라고라?”
“엤설!~”
그랬다. 화려함으로 가득 했던 전시장에서 상추와 열무를 말하는 희귀한 種들. 그들에 대한 반가움의 의미는 ‘CALM한 착지감’이거나 소란스러움에 대한 반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범 같은 선생을 옆에 두고 있었다. 사실 얼마나 드문 일인가? 난 속으로 선생 참 잘 만났다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측은했다. 언어란 자고로 마음에서 생성되어 입으로 빠져나가 그것이 스스로의 귀로 다시 들어오는 순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소리는 또 다른 사고를 촉진시켜 언어로 化됨을 믿는 나였다. 마치 고기를 실컷 씹고도 정작 삼키지 못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오랜만의 만남/ 여전한 황.
얼마 전 우린 2~3년의 터울을 두고 그가 설계한 가회헌의 집담회에서 다시 만났다.
그도 나처럼 나이가 들었을까……말투는 바뀌었을까…..배는 좀 꺼졌을까……이런 생각하고 있을 무렵 저만치서 그가 들어온다. 여전히 얼굴은 탱탱했고 잘생긴 코와 부처같은 꼬리를 지닌 입술의 사이에는 잘 그려진 수염이 유쾌히 붙어 있었다. 그리고 왕진가방처럼 생긴 신뢰도 높은 가죽가방과 겨드랑이에 찬 도면뭉치…………그는 참으로 여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복장이었다. 분명 자켓속에 받쳐입은 블루칼라의 폴로 티셔츠는 그가 오래 전부터(장담컨대 적어도 7년 숙성) 즐겨 하던 옷이었다. 바지는 또 어떠한가? 누르스름한 미군 하복바지 같은 그것은 그야말로 황두진 패션의 고전이자 모두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를 만난 열 번 남짓에서 어느 연주회를 제외하곤 그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때도 또 다시 그 바지를 입고 있었다. 기가 막혀진 나는 물만두의 끄트머리처럼 오물오물 재단된 구두와 그것을 반쯤 덮고 있던 실밥 터진 바지를 바라봤다.
“아니 바지가 이것 밖에 없어요?”
“똑 같은 게 여러 벌이라….”
“Why?”
“Why not?”
어디 옷뿐이랴.
양보 없는 공세적 어법과 정교한 언어들……… 청룡언월도 대신 굳이 표창을 던지는 오만함, 넓은 인문학에 대한 지평들, 놀라운 종류의 화제들, 달라붙는 각주와 미주들, 배격된 구어체들……그는 참 여전했다. 어쩌면 라틴어를 사용하고 싶어 했을는지도 모른다.
“이 건물은 135도로 기울어진 한옥입니다. 이런 각도를 가진 건물이 있는가 보려고 여러 날을 직원들과 서적을 뒤져봤고 이상해 교수님에게 그걸 여쭈어봤더니 그분 말씀은 이조 중엽 이전까지 한옥은……..그리고 이 건물이 짓기 전까지 여러 차례의 심의를 받았는데 앞에 있는 건물들의 따로따로 찍어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했더니 효과가 있더군요. 그리고 또한 심의 규정을 살펴보면 한옥이 있던 장소에는 다시 한옥을 지어야 한다는 그 규정들에 대한 불합리성이 있는데 이것에 대하여 가까운 누구엔가 물었더니 헌법소원을 통해 승소의 가능성이 있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도대체 이게 한 개인 건축가가 할 일인가 말이죠……”
물론 쉬는 시간은 따로 없었다.
“이 건물의 앞에 있는 도로가 언제부터 있는지 조사해 보았더니 원래부터 있던 도로가 아니라 요쪽의 언덕부터 공간사옥이 있는 조쪽까지 일제시대 때 새로 생긴 도로였습니다…….사실 북촌의 한옥도 엄밀한 의미에서 한옥은 아니랍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개화파들이 살았던 한식 스타일의 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은 저 집이 정통의 한옥이 되어야 할 이유가 ,,,,,,,,좔좔좔”. 한옥의 역사부터 컴퓨터 툴, 설계도에 쎄콤도면이 포함 된 이유, 주방의 시스템. 구조와 헌법 소원까지…….우리는 이미 뱃멀미 앓은 사람마냥 눈이 풀려갔고 예전의 나의 친구들처럼 점점 말수를 잃어 갔다. 전투로 치자면 치열한 육박전이 아니라 참호전이거나 공성전 이었던 그날 패널인 우리는 고국의 그리워하는 소서행장의 마지막 병사들처럼 히 멀건 눈으로 커피만 줄창 마셔댔다. “아!저!씨! 리필커피 한 주전자 더 줘요!”
이제 그가 없으니 말이지만 솔직히 135도 한옥이 무에 대수인가? 그건 대지 경계선이 만들어진 우연한 결과물이며 그렇게 짓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 아니던가? 그걸 최초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둠으로써 일종의 성과인 듯 말하다가도 또 동시에 한옥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이야기 함으로서 판을 흔드는 건……….여전히 치사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제발 헌법소원 같은 거 좀 생각하지 말자. 그건 스스로의 말처럼 우리의 할 일이 아니어야 하며 그렇다 할지라도 거기서 우리는 그물을 거두어야 한다.
가회헌 그 빤함들.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든 ‘현의 노래’ ‘자전거 여행’ 이든 사실은 모두가 빤하다는 어느 대담을 들은바 있다. 김훈은 이렇게 대답한다.
“다 맞는 지적인데……. 그렇지만 나 그렇게 몬산다.”(매우 부정확한 묘사임)
그렇다. 김훈이 쓴 소설은 무엇이든 빤하다는 대담자의 말은 가능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핵심 없는 비판이다. 일정한 관점이 필요한 작가에게 ‘빤함’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고추더러 매운맛이 맘에 안 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누가 김밥더러 “다 좋은데 단무지 좀 뺐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던가? 그렇듯 김훈의 빤함은 보태지거나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두진의 건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금호미술관, 열린책들 사옥, 도서출판 해냄, 그리고 가회헌은 김훈의 그것처럼 모두 빤하다. 그는 주택을 하건, 병원을 하건, 금은방의 케이스를 짜건, 결과는 늘 빤하다는 것이다. 어디에나 버릇처럼 루바를 두르고, 하필이면 손이 많이 가는 정다듬의 석재를 쓰고 ,변소의 문짝에도 기어이 무늬목을 붙이고, 천정몰딩은 죽어라 싫어하고, 기필코 비둘기색의 창틀을 끼우고 마는 브르쥬아적 결벽들이 그렇다. 심지어 유리조차도 그의 손만 닿으면 광택이 바뀔 지경이다. 건물 전체의 인상을 또 어떠한가? 뚱~허니 배를 내밀고 있는듯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듯한, 자기 외엔 시큰둥한 듯한 그 인상들 말이다. 나는 그런 빤함들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빤함은 그가 선택한 노래의 곡조들이 아니라 그걸 소리 나게 하는 그의 목청과 몸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빤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회헌 그 빤하지 않음들.
그런데 가회헌은 좀 달랐다. 여전히 두툼했지만 이 집의 축성술은 예전과 좀 다르게 느껴졌다. 왜 자꾸 그런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것일까? 바깥을 좀 둘러보자. 이 집의 주변은 사방의 집들이 높이와 크기와 양식이 죄 다르고 접하는 길마다 넓이와 속도가 달랐고 땅의 높낮이도 모두 다르다. 만약 이 대지를 느린 셔터의 속도로 하늘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전면의 도로는 노출과다이고 후면은 부족이며 그 편차는 족히 곱절을 넘을 것이다. 이런 다양함 조건들과 이 대지를 회오리처럼 감싸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처음 선 그날 황두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가 감지한 회오리의 정체들은 포식자를 입맛 다시게 하는 싱싱한 살점들이었을까? 혹은 ‘學’을 등장 시킬 절호의 조건들이었을까? 욕심 많은 그가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했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그 이상의 카드를 손에 쥐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이 좀 복잡하다. 하나의 대지에 기와를 얹은 별채와 서양식의 레스토랑과 포도주를 저장하는 건물과 그것들을 공급하는 거대한 공장이 지하에 있다. 한옥은 꽂혀 있었고 창고는 놓여 있었으며 양옥은 붙어 있었으며 공장은 묻혀 있었다. 하지만 난 이런 모양새 따위를 복잡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 집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개별성은 불협화음인 동시에 다채로움으로 오인되는 정체들이며 그가 구축이라고 부르는’術‘ 의 재료들이며 죠커인 동시에 그 자체였다. 작위라고 여기는 이 각각은 양옥과 한옥사이에 있는 나무에 의해 흐려졌으며 커튼처럼 확산된 유리집에 의해 감추어져 있었고 때론 ‘習’의 영역으로 넘어 갔다.
이 집의 망루인 이층은 어떠한가? 사방으로부터 노출이 된다는 것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요새는 그런 장소적인 운명을 반영하는 양 갈등과 반란의 기운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황두진이 누구던가? 그는 여기서 현란한 칼춤을 추었고 품 안에 숨겨둔 모든 탄약을 소진했다. 가로로 획처럼 그은 관음의 창문. 시나고구의 벽과 도회적 유리창, 주택과 미술관의 혼용, 카키색의 천정.보랏빛의 그림. 오크의 원색의 엉킴들. 미처 쫓지 못한 전돌과 전돌 사이의 퉁명스러움, 새로운 선언과 새로운 정의들의 충돌, 그리고 건축가의 숨찬 심장소리들. 참으로 고달파 보였고 충전된 싸울아비의 분투인양 안쓰러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얼핏보기에 가회헌의 그의 빤함은 과거처럼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전의 그것이 관찰자가 느끼는 결과였던 반면 가회헌의 그것은 그의 묵인이거나, 조율되고 있거나, 혹은 매뉴얼화되고 있거나, 더러는 강화되고 있는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로 여겨진다. 마치 투명한 유리병에 그의 빤함의 어휘들을 담아 놓고 용처에 따라 핀셋으로 이곳 저곳에 이식한 듯한 빤함은 이제 즐겨찾기의 단골 메뉴가 된 듯 하다는 것이다. 나의 추정과 느낌이 맞다면 이건 참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빤함을 스스로 잘 아는 그가 자동항법 장치의 보턴을 모르는 듯 누른 것은 분명이 이 집이 사람에게 비추어질 현상과 노출될 현상과 파악될 현상과 느껴질 현상과 그리고 이것이 이루는 최후의 결정적 기억이 반드시 진실에 의해서 판정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방임
결과적으로 보이는 외형적 복잡은 대립된 요소들이 한 장소에서 모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요소가 한곳에 있다고 모두가 복잡하지 않음을 우리는 또한 안다. 이 어딘지 모를 감질나는 가려움증들은 결국 형태에 의해 읽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떤 관계로 설정 하느냐는 황두진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는 네 게의 대립된 존재들을 기능과 법과 대지를 구입한 순서에 의한 듯 말하지만 그게 전부일 리 없다. 그는 오히려 그 대립으로 상충된 에너지 가운데에서도 유독 뼈다귀만을 추려서 아무러한 관절도 없이 슬그머니 놓은 게 아닌가 싶다.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 얼마나 기막힌 그림인가? 한옥의 자분자분한 디테일과 광택으로 빚 나는 유리의 세련됨과 그리고 박공의 스터코들과 그것들의 은근함 섞임들…….이 화려한 뷔폐는 그 개별성만으로도 이미 흐뭇한 만찬이다. 따라서 이 배부름은 황두진의 진화에 대한 욕구를 새삼스럽고도 고통스런 선택의 영역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스나이퍼에게 표적이 사라진 것이 어찌 행복뿐이겠는가?
야박한 한마디를 더하자. 나는 이곳이 그의 사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분명 그의 분전은 너무도 놀랍지만 전투의 치열함에 비해 부상하나 없는 그의 몸은 어쩐지 좀 이상하다. 그래서 나는 전투 그 자체보다 전투보고서를 만드는데 더 신경을 쓴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왜냐면 그의 보고서와 무용담은 전투 중에 만들어 졌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세련됐다. 그에 비해 전리품은 지나치게 풍성했으며 부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 얼마나 밉살스런 승리인가? 그의 실패하지 않은 전쟁은 그의 절륜한 지휘덕분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는 갑옷을 벗었어야 옳았다. 반자이 도쯔게끼를 선택해서는 안되겠지만 뼈다귀로 보이는 넷 중 하나는 죽고 하나쯤은 부상을 당했을 만큼이 돼야 했고 더욱 좋았다면 스스로 그것들의 기승을 다스려야 했다. 그것이 바로 오만함으로 온 몸을 두른 그의 근거여야 옳았다. 그렇지만 그는 얻음보다 잃지 않음에 전력을 다하거나 모두 죽이고 그 넷만 살린 후 그곳에 분과 기름을 바른 게 아닌가 의심 하는 거다. 그래서 과도하게 빛난 것이고 발광하는 빛들은 서로를 잡아먹듯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 이러한 충돌은 전례가 없으므로 독해되기 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며 공연히 벙긋거리고 또 허허롭게 웃는 것이다. 이 규정할 수 없는 환호로 오인된 저쪽 편엔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족보 없는 혼령처럼 폐기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무상사의 순진한 소요에도 미사일을 발사는 그가 가회헌의 소란함에는 왜이리 관대 했을까? 루이스 아이칸을 사모하는 그가 왜 나무를 벽지처럼 바르고 있을까? 온통 ’學’으로 가득 찬 사람이 왜 ‘術’에 매달릴까? 허리에 두른 표창으로만도 충분하거늘 왜 자꾸 갑옷을 껴입으려는 가 말이다.? 나는 그게 섭섭하다.
당신의 카르타고는 어디입니까?
후기
내가 설정한 몇 개의 틀은 이야기의 관점을 형성하기 위한 서너개의 지점들이며 내가 보았던 일부일 뿐이다, 이곳에서는 어두운 밤 홀로 피아노를 치는 황두진을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그것 말고도 얼마나 많으랴? 그래서 활자의 한정성이 두렵고 위험하다. 가장 명백한 사실은 건축가 황두진에 대한 나의 존중과 기대의 마음이다.
[<와이드AR> 창간준비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