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호 BEST] 2008년 한국 최고, 저항의 건축

건축리포트<와이드>(이하 와이드AR) 2008년 11/12월호(통권 6호)는 송년호 기획특집으로 “2008년 한국 최고, 저항의 건축”을 찾아내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 ‘특별한’ 주제를 담은 기획서는 대학과 건축설계의 현장에서 활동 중인 32인의 와이드AR 발행편집인단에게 보내졌으며, 구성원 각자에게는 오늘 이 시점에 ‘저항’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에 부응한 건축물 1점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주문되었다. 기획의 근간은 단 50자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세계화의 반대편에서 지역성의 발현을 통해 한국건축의 잠재적 가치를 드높인 건축물을 선정 한다”라는 것이었다.

 

‘세계화’와 ‘저항’이라니. 어리둥절할 독자들을 위하여 잠시 모더니즘 건축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1930년대 하버드에서 강의를 시작한 그로피우스는 국제주의양식이 건축의 세계화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발설한다. 지구촌은 한동안 그의 예언대로 기능주의적 근대건축의 도시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보였다. 건축의 첫 번째 세계화는 그렇게 다가왔다. 개발도상국가의 처지에 있던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건축의 세계화가 그 같은 양상에서 벗어나는 시점은 196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다.

 

장소의 뿌리를 찾는 지역주의 건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함으로써 그로피우스의 예언은 일단락되었고 세계 각지에서 지역성에 근간한 건축의 탐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개막을 전후해서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범람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두 번째 건축의 세계화가 거대자본의 비호아래 지역성의 폐기를 정당화 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고 있다. 이번엔 건축의 상품화다. 우리의 경우 이는 동시에 중소형 설계사무소의 존립기반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큼 위협적이다. 와이드AR이 ‘저항’의 기치를 드높이고자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의 거대한 뿌리를 튼튼하게 지켜나가는 건축가의 존재는 자본의 규모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익명의 건축가에게 다가온 작은 건축의 디자인 기회를 통해서 이 땅의 역사가 보다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믿음이 공유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와이드AR은, ‘저항’의 의미해석으로부터 출발하여 문제작을 발굴하고자 했다. 고백하건대 숨어 있는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은 우리 건축을 속속들이 들여다봐야 하는 노력을 수반하는 것이다. 첫 번째 시도에 기권을 선언한 본지 발행편집인단 구성원들이 제법 되었다. ‘저항’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우리 건축의 지평을 눈여겨 봐오지 못했다는 자성이 주된 이유였다.

 

이 기획은 올해를 기점으로 하여 매년 이맘때에 지속적인 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켜 건축의 상품화라는 세계화의 성장주의에 만연된 대한민국 각급 도시에서 건축의 진정성을 알리고, 이 땅에 필요한 건축의 주제와 그것의 실체를 의문하고 답하는 연례 보고서의 형식으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추천 대상은 한국에 지어진 건축물이면 건축가의 국적을 묻지 않는 것으로 했다. 한국건축의 일부로 그들의 작업 또한 의미롭게 편입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기획: 전진삼, 건축비평가, 본지 발행편집인)

 

 

프로그램

1. 기획의의

<2008년 한국 최고, 저항의 건축>을 찾는 작업은 세계화의 반대편에서 지역성의 발현을 통하여 한국건축의 잠재적 가치를 드높인 건축물을 선정하여 그 의의를 되새기는 작업입니다.

 

2. 선정방법

(1) 위원님이 정의하시는 ‘저항’의 의미를 500자 이내(넘쳐도 무관합니다)로 작성하여주시고,

(2) 그에 부합하는 국내에 지어진 건축물(외국인 건축가의 작품도 포함)을 1점 추천하여 주시면 됩니다.

(3) 건축물의 추천 이유는 1)번 항목에 포함시키시거나, 별도로 작성해주셔도 좋습니다.(분량은 1)번 항과 동일)

 

3. 추천 건축물의 시점

2007년 10월 – 2008년 10월 (가급적 지난 1년간의 발표작을 중심으로 선정하나 기준 시점으로부터 1년 이내는 가함)

 

 

[해석1] 권유되어도 좋을 저항

저항…? …!

질문은 저항이다.

저항?

건축이 저항한다? 어떻게…를 묻기 전에 무엇에, 어떤 상황에 저항한다는 말인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거역하거나 버팀’을 저항이라 한다. 그러니 저항의 영역은 아니 저항이 생겨나는 영역 아닌 곳과 때가 없다. 우린 무수한 저항을 학습하고 목격한다. 그러나 학습된 저항이 교훈으로 체화되어야하고 목격한 저항이 권유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 저항들은 기운이 쇠한다. 반복되는 일상과 무의식적 생산의 숲에서 저항은 길을 잃는다. 다행이다. 본시 저항이란 것이 뻔한 길에선 의미가 적으니 길 잃은 상황은 의미를 무겁게 하고 필시 헤매다 길 찾아 나온 저항만이 올곧을 것이니 말이다. 저항이 올곧다면 가해지거나 처한 ‘힘이나 조건’이 그르다는 말이니, 저항을 묻는 속내 또한 다르지 않은 저항이다.

건축은 무엇에 저항할 수 있을까. 정치에 자본에 사회에 저항한다? 글쎄…. 석연치 않다. 그럼 악습에? 그것도 미흡하다. 저항커녕 동조 아니면 다행이다.

건축의 기술로 저항한다 치자. 하이테크가 저항일까. 천만에 그것은 기술의 진보일 뿐 저항은 아니다. 중력에? 가당치 않다. 중력의 지배를 인정할 때 공간의 건축의 기술의 상상의 꽃이 피는 법이니 중력에 저항하는 건축은 없다.

그럼 건축이 지닌 예술(?)의 기질로 저항한다? 무엇에? 근본적으로 예술은 익숙함에 권태로움에 습속에 저항하는 것인데 그것은 새롭거나 낯설음으로 불린다. 가끔. 몇몇 경우에만 그리 불려지는 게 당연하다. 많은 수는 탐색 없는 그렇고 그런 변주 변태 변용 변형 변화에 불과하므로. 이쯤 되면 그것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며 우리는 저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맞다.

흐르다 막히면 고이는 그저 그런 시류의 물 아니라 깊은 바닥으로부터 스며나는 샘 같은, 낯설지 않아 눈에 띄지 않고 내는 소리 낮아 들리지 않는 그것이 저항이리라. 권유되어도 좋을 저항 말이다.

(글: 이일훈, 후리건축 대표, 본지 편집자문위원)

 

 

[해석2] 저항의 의미

저항, 누가 감히 틈새의 담론을 펼치는가?

글로벌 담론의 세력 속에서 최근 두드러지는 경향은 우리네 도시의 주요 공간들이 외국 건축사들의 작업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공공기업, 그리고 대학들까지 가담하여 연예 기획사나 전도사 마냥 해외의 스타 건축가들을 모셔오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모셔진 스타들은 자신들의 모호한 입장을 이용하여 전무후무한 도시, 건축의 패션을 창출하는 대대적인 실험을 벌인다. 이들은 국내 건축주들의 비호 하에 우리나라가 가진 고유한 재현의 코드를 부정하면서 융통성 없는 의미와 형태 구조를 해체하는 특권을 갖는다. 즉, 불확실한 어휘를 통해 양식과 형태를 발명하고, 기존 콘텍스트의 질서를 교란하며 이국의 땅에서 ‘나, 나, 나’를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작업이 아이디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시대를 반영하는 담론은 물론 장소를 유지하는 철학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콘크리트, 스틸, 유리 조각들로 편집된 그렇고 그런 형상들이 우리를 둘러 싼 환경을 외계화 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제 한국의 현대 건축 역시 글로벌리즘의 허구에 의해 비극의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세계화라는 또 다른 운명의 굴레 속에서 서구의 건축 양식과 형태, 그리고 공간 문화가 우리의 고유한 문화 담론을 훼손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저항의 건축을 논하게 되는 것은 글로벌과 로컬의 반박(反駁)적 관계를 조율하려는 입장이 아닐 것이다. 또는 세상을 하나의 언어로 통일하고자 했던 근대 기획에 대해 전통과 역사를 표명하려 했던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의 저항과도 사뭇 다르다. 오히려 역사적 내성(耐性)을 토대로 오늘날 우리의 입장을 관철하는 진정한 건축적 담론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사전(辭典)적으로 저항(抵抗)은 강력한 힘이나 조건, 또는 체제와 같이 보이지 않는 권력적 간섭에 맞서는 일이다. 저항은 반항과 달리 사람이나 일정한 대상에 대해서는 쓸 수 없는 말이다. 그러기에 반항은 일시적이지만 저항은 연속적이다. 시대에 따라 ‘항(抗)‘의 대상은 변하지만 과거로부터 계승돼 온 저항정신의 맥은 현재에 대한 비평적 사유를 통해 지속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지역성, 정체성, 전통 등의 관념적 담론을 통해 글로벌리즘의 독주를 제어하기엔 그 논박의 내용이 너무 희미해졌다. 오히려 얼마 전처럼 “우리의 것..”을 고집하는 쪽이 더 편할 지경에 이르렀다. 단지 “우리의 것”을 주장할 것이라면, 이제는 좀 더 개인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의존하는 집단선동주의(demagogy)보다는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관점을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그 ‘항(抗)’의 대상을 재고해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저항은 주도적인 현실과 반쯤은 방치된 현실 사이의 경계적 상황에서 발생한다. 주도적인 역사가 강점(强占)해 온 중심영역으로부터 퇴출된 경계성, 즉 ‘틈새의 담론’들이 담합하여 중심을 견제해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 틈새에는 ‘인간과 환경’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다만 보편적인 인간과 환경이 아니라 정관사(定冠詞) ‘the’ 가 붙은 개인적인 테제들이다. 이 방침들은 다층적으로 풀이돼야 한다. 예컨대, 인간의 문제는 스케일이나 비례와 함께 심리 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재분할되거나 환경 역시 자연을 포함하여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생태적 재해석으로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목표는 원작이 아닌 다양한 텍스트들이 섞이고 서로 충돌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으로서의 텍스트를 반복적으로 재구축하자는데 있다. 그러므로 21세기 저항의 건축은 이 땅의 건축가들이 어떻게 이러한 텍스트를 독창적으로 해석하는가와 해석을 통한 개인적인 주장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공공 역시 이러한 주관적 관점을 문화적으로 수용할 줄 아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안목을 가진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작업하는 건축가들의 점수는 10여 년간 빠르게 진행된 식민지적 “세계화” 과정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글: 구영민, 인하대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추천] 첫 번째 저항의 건축

느림 소멸 위기, 저항의 건축

– 추천: 이일훈 작,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다른 시각으로 현상의 건축을 관찰하라는 주문 같다. 이런 점에서 주제와 관련된 의미를 몇 가지로 추슬러 보았다.

먼저 시간에 관한 문제로, 느림에 대해서 관점을 지닌 건축과 공간을 조직화하는 문제에서 시간의 의미를 무엇으로 부여하여 공간을 본질적으로 성격화하고 조성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다른 관점은 소멸에 관한 것이다. 소멸은 변화를 의미하고 변화는 진보적인 미래의 시간에 대한 예측과 현실에서 가능한 시간의 연장을 구축하려는 시도일 것이라 사고하며 변화의 가능성이 지닌 공간적 예에 관한 관찰을 시도해 본다. 마지막으로 이브 미쇼가 바라본 예술의 위기에서처럼 건축이 지닌, 일견하여 소통에 관해서 주목해 본다. 위기는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 주가의 변동 판을 바라다보는 투자자의 심정처럼 건축이 소통을 저버리고 마구 확대되며 개인의 관련의지와 상관없이 투표와 여론에 의해서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는 것과 거의 다를 바 없으리라 생각한다. 본래 위기는 의학용어라 했으나 판단과 결정 등의 상황의식에서 비롯됨으로 저항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지침들을 예시함을 지닌 예지적 사고라고 보여진다. 자칫 성급하게 좌향을 보는 듯한 견해로 저항을 오해하지 않음도 요구 되는 것이다

이제 저항에 대해서 세 가지의 관점으로 압축해 바라본 건축이 드러나야 할 시점이지만 내가 감각하는 위기감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제 학생들도 또한 설계시장의 의뢰자들도 (기업의)‘간판’에 눈을 줄 뿐 건축가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 시절이다. 이 또한 겪어야 할 위기라면 이브 미쇼의 견해처럼 빨리 왔다 지나가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어려운 시간이지만 소생의 기회를 예측할 수 있기에 그나마 전환의 의미를 지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쯤 여러분들은 그 저항의 건축, 건축가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지 않아도 기억하리라 생각된다. 점차 줄어든 셋집 사무실에서 몇 안남은 후학들과 기약도 없는 희미한 약속에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며 일하는 작은 파도가 있다면 바로 그 건축을 저항이라 감히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내게 <2008 한국 최고, 저항의 건축>은 아무리 어려워도 쉽게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느림과 소멸의 의미를 담고 위기에서조차 열망이 꺼지지 않는 이 땅의 작은 파도와도 같은 건축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방철린과 이일훈의 존재가 상기된다. 나는 그들이 굳건히 견뎌주기를 기대하며 그중 이일훈의 최근작 ‘우리 안의 미래 연수원’을 추천코자 한다.

(글: 김병윤, 대전대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추천] 두 번째 저항의 건축

찾기 어려운 저항의 양상

– 추천: 이일훈 작,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저항의 의미…주변이나 남들이 깊은 성찰 없이 행하는 현상들이 퍼져나가는 대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꿋꿋하게 버티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표출해 내는 것.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나 이번 와이드의 특집란에서 건축의 정체성을 정의하기에는 여러 가지(지면이나 편집의도 등..) 면에서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바 이번 특집의 숙제를 하기위하여 접근하였던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우선 국내잡지 1년 치를 뒤졌다.

최근 몇 년간 국내외 건축 잡지를 꼼꼼히 챙겨 읽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국내 건축 잡지를 훑어보고는 꽤 놀랄만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국내 건축 잡지는 더 이상 국내건축물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화제 거리가 되는 “외국 것”, 특별한 주제에 대한 “외국 것”, 주목할 만한 “외국 건축가나 사무소”의 작품과 프로젝트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국내 것을 충실히 다루는 것은 『건축사』(대한건축사협회 기관지) 정도… 국외의 경향과 작품, 사례에 대한 기사와 소개는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 상으로나 종이잡지로나 접할 기회가 무진장인데…편집방향이 왜 이리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여하튼 지난 일 년간 이 땅에 세워진 건축을 다 볼 수 없었으므로 잡지에 의존하여 골라 낼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제한된 국내작을 소개지면을 통해 몇 점 추려 보았다.

 

  1. 에이그룹의 <The CITY 7 풀만호텔> :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 창원이 이 나라의 후기 고도 성장기에 남쪽 자락에 마련되면서 참으로 각진 도시를 이끌어 나가는 대표가 된지도 30년 가까이 되어 간다. 항상 산업기지 속의 도시로 각 잡은 건물들만 세워지던 이곳에 자유로운 곡선과 열린 하늘…여유로움을 담아내고 있다고 읽혀져 마치 30년 전, 인근 도시 마산역 앞의 각 잡힌 업무지역에 김수근의 양덕성당이 꼬물꼬물 생겨났을 때의 후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은 상업시설이라 개관 당시 시도했던 대 시민 여유 공간이 얼마나 유지될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2. 장윤규+신창훈의 <금호복합문화공간 크링> : 우리가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사로 접할 수 없는 용도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최근 웬만한 건물의 외피를 유리 커튼월로만 해결한다든가, 1∼2년도 지나지 않아 먼지 때가 꼬질꼬질 흘러내릴 나무 쫄대 대기로 마감해 버리는 타성에 저항하며 상당히 강한 충격을 가하는 건축이라 여겨졌다. 이 역시 거대기업의 홍보시설에 속하는 지라 일반인들의 접근성, 친화력 등과는 당장 거리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한 동안 서울시 경계의 남쪽 관문의 상징 건물로 역할 할 것으로 여겨졌다.
  3. 이일훈의 <우리 안의 미래 연수원> : 이번 숙제의 요구사항이, 꼭 하나 고르는 것이라면 이 집을 고르겠다. 한적한 곳에 세워진 것이라 가능한 것이었을 수도 있으나 배치, 경관형성, 재료, 구축방법, 시간에 대한 배려까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기 쉬운” 광경 속에서 자신을 또렷하게 밝히고 있는 존재라 생각되었다.

(글: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추천] 세 번째 저항의 건축

이 시대 최고의 저항은 자신에 대한 저항

– 추천: 김억중 작, <사미헌>

 

김억중은 지가아남유(地家 阿南儒)라는 호를 갖고 있다. 그의 호에서 풍기는 것과 같이 그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다. 그는 웬만한 일에는 그냥 너털웃음으로 넘겨버린다. 그의 건축은 대전과 충청도를 기반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의 건축은 탈지역적이다. 대충 넘어가려는 마감처리에 너털웃음으로 넘길 수가 없다. 색감과 형태 또 재료와 마감 관계에 있어서 그는 지나치리만큼 섬세하다.

김억중은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다. 자그마한 키에 그의 동그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동자승의 해맑은 모습이 다가온다. 논두렁을 한가롭게 거니는 것을 좋아하고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섞인 음악을 좋아하고, 한가롭게 사람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하기와 말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래서 그의 건축에는 샬록 홈즈보다 분명한 이유와 논리가 있다.

김억중의 건축은 현대적이다. 골조 자체가 외피가 되고, 불필요한 장식이 철저하게 배제된다. 하늘, 구름, 빛과 그림자가 건축물과 함께 어우러지며 펼쳐지는 풍광이 그의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집주인의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듯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대성은 전통에 대한 철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김억중은 많은 작품을 구현하고 있는 건축가이다. 아주미술관과 유성문화원 그리고 어사제, 사미헌, 수경당, 완락제로 대표되는 일련의 주택들. 명료한 디테일과 공간적 느낌과 스케일을 확인하기 위해 10:1 모형을 만들어보고 업체들을 만나 마감 재료들의 성능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건축주를 만나서는 세세한 요구사항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실무적 자세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건축에 대한 고민과 연구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김억중의 건축은 누가 뭐라고 해도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적이다. 건축물 안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시나리오를 구축해나가고 있고 모든 공간에 자신의 이야기와 이유를 담고 있다. 규정적이고 정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역동적인 공간이 펼쳐지고 다양한 시야가 겹쳐진다. 잘게 쪼개진 각각의 구성요소들이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건축에는 소위 꼬르뷔지에의 현대 건축 5원칙이 명료하지 않다. 각 공간의 구성을 김억중 방식으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억중과 김억중의 작품은 이중적이다. 그는 낭만을 즐기지만 작업엔 지극히 이성적이고, 꼼꼼하게 실무를 챙기지만 이론에 충실한 학자이고, 그의 작품은 지역에 근간을 두지만 탈지역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이지만 고전적 원칙을 준수하고, 르 꼬르뷔지에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김억중 방식으로 풀어낸 그만의 작품이다. 이 모든 것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준공된 사미헌(四美軒)도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글: 김종헌, 배재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추천] 네 번째 저항의 건축

기본기에 충실한 건축

– 추천: 이수열 작, <동서울대학 증축 및 리모델링>

 

이미지가 건축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건축 잡지는 앞 다투어 화려한 이미지의 건축을 소개하고, 현상설계도 이미지에 의한 생산과 소비가 주를 이룬다. 웬만한 현상설계에는 기천만원이 들어가는 전문 CG업체가 문전성시를 이룬다. 심사도 아이디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고민한다. 멋진 이미지와 지어진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 한계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지에 열중한다.

이미지의 시대에 낯선 작품이 하나 소개되었다. 토문건축 이수열 소장의 ‘동서울대학 증축 및 리모델링’ 프로젝트이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옛날 학교에서 배웠던 건축의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다. 콘텍스트의 존중, 조형적 비례와 공간구성, 건축 재료의 속성과 디테일이 오롯한 파사드(Facade)까지 건축가의 고스란한 고민과 땀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2008 최고 저항의 건축’이라 꼽는다.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미련스러우리만큼 기본에 충실한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글: 송복섭, 한밭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