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합과 일상의 건축 사이에서
글: 이경창
최근 문화계에서 새삼스럽게 융복합과 통섭이라는 말이 유행하며, 인문학적 건축이 붐이 되고 있다. 학문간의 융합 그중에도 인문학과 여타 분야의 통합이나 인문학을 건축과 연관시킨다는 점은 좋은 징조임에도 왜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것은 건축이야말로 애초 융복합의 학문이 아니었나, 건축이야 말로 인문학과 별개로 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반문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새롭게 그런 말이 필요한 것일까?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고 볼 때, 그건 어떤 유행에 편승하려는 것 아닌가 미심쩍을 수 밖에 없다.
BC 1세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이론서를 쓴 비트루비우스가 건축의 3대 요소를 강(Firmitas), 용(Utilitas), 미(Venustas)라 불렀던 것처럼 건축은 기술과 기능, 미가 결합된, 가장 오래된 융복합—느슨한 의미에서—의 학문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비트루비우스의 규정은 조금씩 변형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데, 최근 유명 건축가 스티븐 홀은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추상, 사용, 공간, 아이디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중 흥미로운 것은 추상인데, 스티븐 홀은 “예술가들이 실재에서 추상으로 작업한다면, 건축가는 추상에서 실재로 작업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이 그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나 하나의 이벤트로 만든다면, 건축은 거꾸로 이를 구체적인 건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건축은 건물과 다른 것으로 얘기되곤 한다. 예를 들면 니콜라우스 페브스너는 “자전거 보관소는 건물이고 링컨 성당은 건축이다. … 건축이라는 명칭은 ‘미적 호소력’을 위해 설계된 건물에만 해당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극히 근대적인 산물이다. 무엇을 건축으로 볼 것인가는 미적 판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에는 필연적으로 그 기준을 부과하는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 이런 권위에 대한 물음과 도전은 이미 오래되었다.
근대란 각 분야의 자율성이 돌이킬 수 없는 출현을 특징으로 하고, 여러 학문과 규율을 분화시켜 각자만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발전시켰다. 건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 건축가와 역사가들, 이론가들은 공간 또는 형태 개념을 미학화하고 건축의 독자적 역사관을 부각시키는 등 하나의 독자적 규율로 규정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은 하나의 예술분야로 인정받게 되며 새로운 규율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건축의 미학화와 추상화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뵐플린의 예술에 대한 형식주의 이론을 건축에 이식한 루돌프 비트코버와 콜린 로우의 형식주의를 거쳐 뉴욕 파이브의 존 헤이덕과 아이젠만, 그리고 벤추리의 포스트모던 건축과 리베스킨트의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건축의 자율성에 대한 집착은 현대건축을 주도하는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때문에 건축은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사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건축가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엘리트로 대중과 격리되어 버렸다. 근대이후 영웅적 건축가 상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이른바 스타 건축가들이 장악하며 난해한 이론적, 철학적 담론이 지배하게 되었고, 건축 교육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추상화된 담론으로 재편되었다.
이런 주류 건축에서 일상은 종종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면, 실제로 일상에 대한 관심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주요 관심사였다. 하이데거에게 일상성Alltäglichkeit은 부정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일상성을 불안과 방향상실과 연결지은 바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근대가 초래한 일상 삶의 산만함에 빠져 존재의 생생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건축 모델은 일상에서 겪는 인간 경험의 질에 중심을 두었다. 건물과 거주를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그의 요청은 장소만들기를 거주자의 활동과 특성에 맞춰 다시 통합해야한다는 것인데, 책과 저널에 실리는 ‘뛰어난’ 건축이나 어떤 완성된 상품보다는 일상 삶에 적합한 비전문적 건축을 찬양한다. 퇴행적이라는 한 켠의 비판도 있지만, 하이데거는 사방세계와의 합일된 삶 속에서 누리는 참된 일상적 삶은 인간에게 존재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계기라고 믿었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으되, 이를 급진적인 맑시즘의 사유로 끌어온 프랑스 사회학자 르페브르에게도 일상 삶은 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부정적인 측면과 혁명적인 동기를 유발해내는 긍정적 측면이 동시에 교차하는 곳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일상은 두 가지 반복적 형식이 교차되는 지점에 있다. 하나는 순환으로써, 자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인 선적인 반복은 ‘합리적’이라고 알려진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은 합리적이라는 이름아래 반복적인 삶, 단조롭고 지루한 삶 즉 일상의 비참함을 강요받지만, 일상은 완강한 지속성으로 인해 고된 삶을 안정화되고 유지되게 만드는 위대한 것이기도 하다. 르페브르는 이런 모순이 일상의 삶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철학의 대상이지만 본래 비철학적이고 정적이며 불변적이자 일시적이며 불확정적이다. 그리고 직선적 시간의 반복적 진행이자 자연 순환적 시간이며 단조롭고 판에 박힌 것이자 축제와 유희의 장이며 기술관료적 합리주의의 지배를 받지만 그것의 밖에 있다. 일상 삶은 가장 끔찍한 경험이자 변화의 가장 강력한 잠재력이다. 또한 르페브르는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산물이다”는 말을 통해 공간은 사회적 매개체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생산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사회적이란 경제적, 정치적, 기술적, 예술적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즉, 추상화된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삶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객관적 결정주의보다 주관적 실천을 강조한다. 따라서 르페브르가 제안하는 건축가 상은 고상한 예술가로서 또는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더욱 어울린다.
실무 건축가는 홀로 어떤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건물주의 대리인agent로서 건물주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설계로 옮긴다. 뿐만 아니다. 법규를 다루며 공무원을 상대하고, 건설업자와 상의하고, 예술적, 문화적 의미를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의 눈치에 휘둘리기 쉽다고 생각하지만, 기든슨에 따르면, 이 때문에 대리인으로서의 건축가는 세상의 제약에 맞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여기서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안정적 지식이 어떤 해법으로 이끌 것이라는 전문적 사고방식에 반대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이런 안정적 지식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에 권위를 내세운다면, 행위자(agent)는 지식을 테이블로 가져와 협상해야한다. 무엇보다 타자들과 유연하게 공유하면서. 에이전트는 혼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작업의 일부로 행동한다. 그래서 기든슨은 이를 “상호 지식mutual knowledge”으로 규정한다. 상호 지식은 전문가의 기준과 예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류, 협상에서 발견된다. 상호 지식은 “담론적 의식”이라 부른 것과 대비되게 성격상 실무적이다. 담론의 영역은 일상생활의 직접적인 요구와 거리가 있는 지식의 발전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라면, 상호지식은 일상내에서 지식의 실천적 배치이다. 각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런 담론과 실무사이의 거래는 전문적 기준에 도전한다. 기든슨에 따르면, 이렇게 작인(agency)는 돌이킬 수 없이 권력의 문제에 묶여 있으며, 자신의 공간적 환경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재배치된 사회공간의 결과로서 새로운 자유와 잠재력을 열어준다. 이로써 건축적 지식은 지식의 공유로 나아갈 수 있다.
대행자로서의 건축가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디자인한 엘리멘탈 주거를 들 수 있다. 2004년 칠레 주택부의 원조아래 칠레 타라파카Tarapacá주의 이키케iquique에 지어진 이 프로젝트는 도시화에 따른 도심지 빈민가를 재개발하는 사업으로, 건축가는 이들을 이주시키기보다 삶의 터전인 도심지에 그대로 머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최소한의 돈으로 건물을 짓고 이들에게 자립의 방식을 만들어주려는 해법은 아주 단순하였다. 건물을 반만 짓겠다는 것이다. 반만 지음으로써 건축비는 절반으로 낮출 수 있었고 따라서 최소의 정해진 예산으로 이들의 이주를 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반은 시민이 스스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비전문가인 시민은 공간 생산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끌게 된 것이다. 즉, 건축가는 대리인으로써, 현실적 제약에 맞춰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주민은 비전문가로서 자신이 살 공간에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 지어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런 로우 테크를 활용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은 웹을 기반으로 하여 네트워크화되고 있다. 이른바 공유적 지식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카메론 싱클레어와 케이트 스토가 설립한 <architecture for humanity>라는 단체이다. 종족간 혈전이후 코소보 피난민을 위한 보호소를 짓는 것이 계기가 되어 오픈 디자인 설계경기를 연속으로 개최하고 개발과 재건을 위한 대안을 개발하였고 2005년 ‘오픈 소스’ 모델을 적용, 오픈 아키텍처 네트워크(Open Architecture Network)를 웹상에 만들었다. 28개 나라에 245개 프로젝트를 완성하였으며, 사회적 디자인 운동으로 건축을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건축 솔루션이 절실한 공동체에 전문적인 디자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탄생하였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단체로는 위키하우스wikihouse라는 곳도 있다. 위키하우스는 영국 런던의 건축디자이너가 프로젝트 형식으로 시작했다. 오픈 소스를 이용하여, 스케치업으로 모든 도면을 웹에 올려놓았다. 공유된 설계안을 다운로드하여 인근 목재소에서 가공 후 이들을 조립하면, 바닥과 벽체 그리고 지붕이 서로 지지하는 방식으로 특별한 사전 지식이나 기술 도구 없이도 누구나 가장 싸게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도 젊은 세대 건축가들이 이와 비슷한 작업을 한 사례들이 있다. 2013년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는 시민단체와 연계하여 예산 4000만원에 4인 가족, 7인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벌교 주택은 단열을 위해 에어캡을 17겹으로 겹쳐 지붕을 덮었으며, 장흥 주택은 건설 비용을 낮추기 위해 콘테이너 3개로 방을 지었고 그 위에 경량철골로 전체를 외피로 감싸고 반투명 폴리카보네이트로 단열을 하는 계획안을 내었다. 제이와이아키텍츠는 “건축은 처해있는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기능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건축의 기본’에 주목하고자 한다. … 디자인 접근방법과 건축주를 포함한 주변인들과의 협력관계, 재료의 사용과 특성에 대한 관찰, 구축과정에서의 간결성 등을 끊임없이 구상하고 탐구하고자 한다”고 말하며 “서로가 고민해오고 있던 사회변화, 주거문화, 건축, 건축가의 사회성 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는, 우리사회가 가진 많은 문제들에 대해 다른 건축환경에서의 경험들을 공유하고 교합시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자신들의 건축적 테마를 설명한다.
또 다른 사례를 꼽자면, 젊은 건축가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소박하게 기존 2층 주택을 매입하여 리모델링한 이 건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재능기부이자, 건축의 사회성을 보여주는 프로젝트였다. 와이즈 건축(WISE Architecture)의 당선작 자체도 어려운 현실여건을 딛고 건축가의 좋은 아이디어로 완성되었다.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기존 2층 주택을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좁은 공간을 긴 동선으로 엮어 위안부할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진입은 1층 건물 뒤편 담벼락으로 시작하여 지하로 진입하며 2층으로 연결되고 다시 1층 마당으로 까지 연결된다. 소박하며 전벽돌을 반복적으로 쌓아 엄숙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을 준다. 가장 감동적인 곳은 기존 건물의 벽체를 벗겨내고 그대로 드러낸 시멘트 벽돌로 이루어진 벽체와 또 하나는 바깥마당이다. 둘 다 기존 건물의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출된 건축적 결과물이다. 시멘트 벽돌로 이루어진 벽체는 벽돌에 새긴 할머니들의 육성을 기록하는 틀이 되고 있다.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처를 드러내는 드라마틱한 공간보다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이 되도록 설계했어요. 언제 와도 꽃을 볼 수 있도록 야생화를 심었지요. 피해 할머니들은 작은 야생화를 보며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을 떠올릴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박물관에 전쟁에 대한 간접 체험을 들여온 것은 조약해보이고 가벽으로 쌓은 추모 공간은 아직 깊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에서 시작된 건축가의 고민은 비극적 과거를 치유할 일상의 가치를 재발견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건축가는 단순히 실무적인 해법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비전을 제시하는 일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건축과 건축가의 위상은 달리 정의해야 한다. 제레미 틸에 따르면, 건축은 애초 예술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 천재의 상상력에 기대는 작업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협업과 협력을 강조하는 윤리적인 상상력이 중요하고 전체를 조종하려하기보다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건축가의 윤리적 책무이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제레미틸은 단언한다. 이렇게 윤리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의식하는 것”을 뜻한다. 건축에 윤리성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관점에만 가능하다. 여기서 ‘타자’란 건축주 뿐아니라 건설관계자, 사용자, 점유자 및 실제적 삶이 건물의 완성에 의해 영향받는 거의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 이런 윤리적 책임을 가질때, 그리고 그것을 건축설계자체에 구현할 때 오히려 건축가는 건설과정에 참여하는 어떤 주체보다도 눈앞의 요구와 장기적인 비전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을 조정할 수단과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건축에서 화두처럼 등장한 것도 오래 되었다. 3D 소프트웨어의 혁신에서, 인터넷을 통한 빅데이터의 활용 가능성이 논해지고 있고 뿐만 아니라 3D 프린터를 이용해 프린터로 뽑아서 건물을 짓는 사례까지 등장한다. 앞으로 이런 방향의 문화적 혁신이 가속화됨에 따라 건축을 융복합으로 끌어들이려는 흐름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상당부분 상업적 이용에 휩쓸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초래할 변화가 낭만적인 예언만을 가능케 할지 낙관하기에는 여전히 어렵다. 지난 세기 인류는 이에 버금가는 수많은 변화와 혁신을 경험했다. 어린 시절 공상과학 만화에서 보았던 미래의 모습, 곧 기계가 등장하여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것이고 인간은 일을 할 필요 없이 편히 생활을 즐기게 될 것이라는 낙관이 항상 이에 동반된다. 하지만 오늘날 과연 그러한가? 이미 역사를 통해 그런 미래는 균등하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건축이 융복합적 본성을 회복하는 길은 건축을 일상 삶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는 건축가의 창의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 견고한 아카데미즘의 벽과 갈수록 강화되는 상업화의 길을 벗어나 일상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실천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원문에는 다수의 주석과 그림자료가 함께 게재되어 있음
[<와이드AR> 43호,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