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심사평]

심사위원_김영철(본지 편집 위원, 건축평론동우회 동인)

 

I.

올해로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이 제정된 지 3년이 된다. 이 상의 목적은 건축비평 분야에서 활동할 재량 있는 인물들을 발굴해서 한국 건축평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비평가의 탄생을 기대하는 이유는 한동안 건축비평가의 생산에 우리 사회가 소홀히 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건축계에 의미 있는 가치판단의 척도들이 더 다양하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실재하는 세계이지만 여기에 새로운 충격 하나는 분명 그 파장으로 인해서 기존 변화의 불변을 다시 재편의 과정으로 이해되도록 만들어갈 것이다. 이 충격이 그 규모에서 큰 것이라고 하면, 이는 우리 건축계에서 단지 하나의 새로운 활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진을 겪은 이후처럼 있어야 할 것이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이 상은 앞으로 우리의 건축계를 이끌어갈 준비가 되어 있고, 역량이 있는 신진 비평가들을 위한 등용문이다. 아마도 건축 비평이 현재 한국의 건축계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더 많은 새로운 건축 비평가들이 발굴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보다 커진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평론가의 탄생을 알려야 할 순간이다.

 

II.

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수상자는 주평론 “서울시청사: 유리벽에 마주서다”, 두 편의 단평론 “비평의 언어: ‘비평의 죽음’ 이후의 글쓰기”와 “시장과 욕망의 변증법: 코엑스와 라페스타”의 응모자이다.

 

당선자의 비평 중 첫 기고문 “비평의 언어: ‘비평의 죽음’ 이후의 글쓰기”는 건축, 비평, 언어와 다른 한편으로 역사와 이데올로기, 유토피아의 개념들을 다루었다. 그들의 상관관계가 특히 타푸리의 관점에서 비교적 날카롭게 다루어졌다. 건축 개념과 건축 작품 개념이 분리되어서 논리를 전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역사와 건축의 관계 설정에서 이데올로기, 계획, 비판성, 유토피아 등의 개념 층위를 설정한 것은 한편으로는 설득력 있는 시도였지만 이를 통해 건축 개념 자체의 정립에 기여하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건축의 의미 영역을 규방의 존재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탁월하다.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이루는 유토피아에 관한 질문에서 비평의 과제를 규방을 드러내는 일, 그래서 우리 인간이 규방 안에 있음을 밝히는 일이라는 진단은 대단히 훌륭하다. 이 과제에 좀 더 시선을 집중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는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 앞으로 기대되는 이 응모자의 사유를 흐트러트리지나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대단히 압축력이 높은 글 마지막 부분에서 응모자가 제기한 질문, 즉 규방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이미 시선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고, 이 일로 창작을 위한 힘이 소진되기 않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단평론, “시장과 욕망의 변증법: 코엑스와 라페스타”에서는 건축과 도시 분야를 각각에 필요한 시점과 간격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구체적 대상지를 비판적 시각으로 읽어나간 것과 의미 영역에서 주체의 의미와 기능을 설정한 것이 돋보였다. 대상 작품의 구조를 단순히 물리적으로 읽어나가거나, 구체적 현상 이면의 경제 논리를 다루기보다는, 응모자는 독특하게도 개인의 욕망이라는 카테고리를 설정하고 심리적 차원에서 대상지들의 의미를 공간의 차원으로 옮겨서 분석하고 있다. 구체적인 공간의 구조와 이를 대상으로 관찰하는 주체의 관계를 벤야민과 발자크의 눈으로 비평하고 있는 것도 뛰어나다. 욕심이 있다면 벤야민의 입장뿐만 아니라 게오르크 짐멜의 대도시 논의가 함께 대비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벤야민을 읽는 사람은 짐멜도 읽어야 한다고 하고, 또 제목에서 암시받는 것처럼 대립구도라면 문제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평론, “서울시청사: 유리벽에 마주 서다”는 응모자가 우리 건축계가 기대하는 비평가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서 만족스러웠다. 자칫 주관적 감상이 대상을 온전하게 마주하지 못하게 할 우려가 큰 소재이지만 응모자는 차분히 건축가와 작품 사이, 여러 기존 비평문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특한 시점을 근대 건축의 이념과 발전의 차원에서 다루어가고 있다. 특히 투명성을 형태론과 공간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매개로 파악한 흔적은 높이 평가한다. 관찰자의 시점을 설정하고 대상 작품을 도시적 맥락에서 또 건축적 맥락에서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유리 재료의 속성에 너무 오래 머무른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투명성은 단순히 재료의 속성이나 재료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응모자는 여기에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지만- 사회의 구조에서도 보여 지고, 정치에서도 실천되어야 할 이념이며, 이것이 물리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원칙의 구축으로 이해되는 건축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III.

두 번째의 응모작, “Form and Materiality in Architecture (건축에서의 형식과 물질성)”은 응모자의 의욕에 비해서 주제의 해명이 미흡하였다. 형식과 역사를 등가의 개념으로 설정하거나 형식을 물질성에 대립하는 자연으로 이해하거나, 문화나 시스템 혹은 이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만약에 타당하다면, 이를 해명하는 일이 40여 쪽의 짧은 논문에서 가능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음의 주장, 즉 “역사가 제시하는 형식과 물질성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 그들의 역사에 대한 논쟁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응모작 21쪽)는 비평에서 요구되는 문장, 혹은 비평가의 문장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주제가 진부하게 들릴지라도 건축의 긴 역사는 이들 주제를 가지고 씨름을 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응모자가 제시하는 비판적 형식론은 그 근거를 확인하기가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 특정 형식들을 거부하려는 의도는 무모하다. 기존 형식 논리들이 부정되고 오히려 재료의 개념을 통해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면 형식과 물질성이 등가의 개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를 두 번째 응모작에서처럼 세계는 균질화 되어가고 있고, 이를 극복하려면 물질성을 통해 지역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도 마찬가지로 형식론의 관점에서 물질성과 지역성을 등가로 설정하는 논리에 머무르게 된다. ‘파리: 꼴라쥬 된 시간의 물질성’,‘뉴욕: 판타지에 의한 수직의 밀집’, ‘서울: 다층적 밀집’ 등의 소제목들이 말하는 것처럼 형식을 논의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필요한 물질성은 고유한 가치를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논리적으로 명료하지 않다. 실제의 맨해튼이 ‘전체적인 삶을 수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도시’로 전락하였는지, 또 ‘세계화의 상징이 되어, 전 세계의 도시들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 조차 자신의 물질적 무게에 눌려 현대의 변화를 도시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반쪽짜리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할 때, 이를 받아들여야 할지, 응모자의 주장에 동의되기 보다는 의구심이 더 많이 든다. 두 번째의 응모작에서는 응모 요령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유감스러웠다. 모두 세 편이 아닌 두 편만이 응모되었고, 모두 기준을 초과한 분량이었다. 비평가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고 그의 규약은 한계가 아니라 전체의 자유를 위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라고 이해한다면 동의하기 어렵다. 문장상의 오류들도 유감스러웠다.

 

IV.

세 번째의 응모작, “건축의 한 반(半)도. 통일 후 건축가의 역할 변화 예측과 한반도의 건축 이론 발전을 위한 초고”, 두 단평론, “전통건축의 물질적 탐구,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 “하우스 푸어(House poor)라고? 난 하우스 퓨어(House pure)”는 시사성을 반영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개념들의 해명을 다루는 글이었다. 단언적 정의들과 응모자가 설정하고 있는 대상을 보는 위치를 염두에 두었을 때, 과연 응모자는 비평가로서 끊임없이 부딪치게 될 저항의 현실을 인내하고 그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단순한 우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인상이 아직 남아 있다. 서술의 형식과 내용이 건축이론에 더 가깝다는 것도 아쉬움이다.

 

V.

지난해에 우려한 것, 즉 비평이 비난의 개념과 혼동되거나 주관적 입장에서 감정적 판단을 내세우는 글, 사실이나 상황의 수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이에 해당하는 응모작은 올해에는 없었다. 지난해에 비해 확실히 내용면에서 진전이 있었고, 응모자들이 비평의 의미와 과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있었다. 조금 더 기대해도 된다면, 반드시 비평에서 채워져야 하는 것, 즉 가치의 위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평은 명료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야 한다. ‘진정한 비평이란 언제나 가치에 대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와이드AR> 31호, 제3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