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도시_루이스 칸의 도시건축 1960∼1974
글: 서정일
오늘날의 건축은 현대도시문명과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 도시문명의 긍정적인 측면을 형상화하고 있는지, 이를 위해 현대건축의 전통과 규율을 충실히 발전시키고 있는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대체로 부정적인데, 현대건축은 현대도시문명의 부정적 측면을 더 심각하게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었지만 흔히 무용했고 더 심각한 문제를 낳기도 한다. 이제, 적합한 해법을 도출하기 위해 우리가 숙고해야 할 점 하나는, 현대건축이 안고 있는 도시적 차원의 그 문제들이 엄연히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문제의 역사성을 탐구한 드문 연구들은 더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보충될 필요가 있다. 넓게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 연구는 지난 20세기에 걸쳐 현대도시의 발전과 관계된 현대건축의 주요문제들의 진원지인 미국도시에 주목하여, 그 문제들의 형성과정과 이에 대한 대안적 사상과 실천을 탐구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필라델피아에서의 사상적 맥락과 루이스 칸의 도시프로젝트들을 해석하는 것을 최종과제로 삼았다.
미국에서는 이차대전 이후 이른바 ‘현대적’ 방식으로 전례 없는 규모로 기존도시들을 재편했는데, 1950년대부터는 그 과정상의 문제가 여러 가지로 노출되고 문제 삼아졌다. 전문분야로서 건축은 이차대전이후 이념적 성격이 축소되었고 건축과 도시계획은 구분된 영역이 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 두 영역의 중재를 새롭게 모색한 것은 도시설계분야였다. 여기서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 같은 전문가들은 새로운 어버니즘에 필요한 계획적 수단이 필요성 뿐 아니라, 이 수단을 도시의 예술로 만들 형태적 가치에 대해 적절한 새로운 이상이 필요함을 거론했고, 중세도시형태, 전원도시, 코르뷔제의 도시 등을 대신할 새로운 도시설계의 이상이 요청되고 있었다. 이에, ‘예술로서의 도시설계’가 규정되기 시작했고, 도시환경의 역동성과 무질서에 대응해서 도시환경의 질서를 새로이 모색해야 하고 도시환경이 도시민에게 소통될 수 있어야 생각이 우세해져 갔다.
필라델피아는, 뉴욕, 보스턴 등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된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일련의 이론가와 건축가들이 도시설계분야에서 활발한 논의를 펼쳤다. 그들은 비록 통일된 해답을 창출하지는 못했고 따라서 뚜렷한 이론적 계보 없이 학문적으로도 덜 조명 받게 됐지만, 그 집단적 담론만큼은 복합적이고 생산적이었다. 그들은 도시의 질서와 소통성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도시와 건축의 새로운 질서와 표현방식을 모색했다―G. 홈스 퍼킨스, 루이스 멈퍼드, 에드먼드 베이컨, 루이스 칸, 데이비드 크레인, 로말도 주걸러, 로버트 벤추리, 로버트 기데스 등이 도시적 질서와 소통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들은, 기술, 교통, 기념비적 표현 등의 요소를 포함한 도시적 질서의 요소와 범위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었고, 도시적 소통방식의 미적, 상징적 차원에 대해서도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일례로, 베이컨과 크레인 등은 도시의 질서를 물리적 형태와 직결된 것으로 파악했는데, 이에 비해, 멈포드와 칸 등은 물리적 형태 이면의 내적 본질을 도시의 질서로 간주했다. 전자는 도시의 물리적 환경이 감각적 경험, 특히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소통되는 측면을 강조하고 물리적 외관의 연속성과 구조를 소통수단으로서 강조한 경향이 있었고, 이에 비해, 후자는 다른 차원의 소통방식, 즉, 인간간의 대면접촉을 중시하는 등, 도시의 성격과 본질적 내용이 이해될 수 있는 소통방식을 지적했다. 이들은 서로 다양한 입장을 견지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었는데, 필라델피아 이백주년 기념사업 같은 공동사업의 경우에서는 기념비적이고 강력한 질서와 상징성을 근간으로 삼아 세부적으로는 기술적, 대중적 소통요소로 보완하기도 했다.
건축가 루이스 칸(1901-74) 역시 이러한 필라델피아파 속에서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으며 담론형성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칸과 그의 건축을 재조명하면 지금까지와 다른 새롭고 풍부한 이해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우선, 칸이 상정한 도시적 질서를 1950년대 중반이후 케피쉬와 린치가 도시경관과 소통을 이해하는 방식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인데, 이 연구자들은 도시의 삶이 소통에 의존하며 그 소통은 일종의 지각형태인 경관에 의해 수행된다고 보고, 그것의 보편적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일관되고 통일된 도시환경을 달성하려고 시도했다. 환경을 이렇게 객관적 대상으로 보거나 지각능력을 공식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칸은 부정적이었다. 즉, 일관된 시각적 질서라는 것은 항상 값이 변하며 그것은 너무 강한 질서라 수용하기 어렵다고 봤고, 도시 내 지역끼리도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무리이고 그것들은 서로 무관해도 충분하다도 봤다. 도시전체의 연속성은 형태적 특질보다 통행의 연속성 등에 바탕을 둔다고 봤고, 도시의 성격은 이미지나 조형효과가 아닌 목적적 내용에 의한 것이라고 봤다. 그는 도시환경과 인간간의 소통에는 인간의 공통된 열망, 규정할 수 없는 공동성 또는 동의의 차원이 있음을 주장했다. 칸과 필라델피아파와의 관계는 상호비교적 관점에서 다각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우선, 칸은 베이컨이 주장하는 ‘도식형태의 상징언어’와는 분명하게 대조됐다. ‘상징도시’를 주장하는 크레인과도 거리가 있었지만 기술적 성과와 교통의 요소를 중시한 ‘캐피털 디자인 기법’과는 연관성이 없지 않다. 멈포드의 경우, 도시의 본질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보고 그것을 증진하기 위해 문화자원의 양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대면소통방식을 주장하고 비정상적이고 억압된 소통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도시설계에서 달성해야 할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는데, 칸의 사고는 멈포드와도 상당한 연관성을 가진다. 도시에서 ‘문명적 제도’의 요소를 강조한 멈퍼드는 분명 ‘제도(시설)들의 도시’ 또는 ‘활용성의 도시’를 주장한 칸과 밀접하다. 하지만 멈포드가 건축의 내구적인 상징적 표현을 추구한 내용은 칸이나 주걸러의 기념비적 표현의 결과물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건축작품을 통해 이러한 도시적 질서와 소통의 해법을 제시한 점에 있다. 그의 후기작들, 특히 도시규모의 프로젝트들이 그동안 학문적으로 덜 주목받지 못했고 이해되지 못한 것은, 지어지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 작품들의 도시적 차원의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로 칸의 건축에는 개별 건물로부터 도시전반의 계획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고유한 도시적 접근방식이 충실히 모색되고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이차대전 이전부터 르 코르뷔제 식의 도시개념에서 출발했던 칸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 필라델피아 도심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일련의 도시전략을 발전시켰다. 칸은 당시의 도시 규모와 경관의 급격한 성장 및 도시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도시의 성장한계와 경계를 한정하는 생각을 받아들였고, 개별건축물 또한 자기제약 또는 동의에 의한 표현의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설정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은 칸이 주로 단편적 도시전략을 추진했던 시기로서 이 시기 칸의 주요 프로젝트인 뉴욕 브로드웨이타워, 캔자스시티 타워, 볼티모어 내항개발사업, 필라델피아 이백주년 기념사업 등에서, 칸은 일관된 원칙들을 견지하며, 다양한 상황에 대한 고유한 해법들을 제시했다. 이런 단편적 도시전략에서 그는 건축물이 여러 가지 표현적 차원에서 나머지 도시환경과 연결되는 방식을 모색했고 도시 전체질서에 대한 해석을 개별 건축물에 끌어들어 심화시켜 표현하는 방식을 모색했다.
칸이 작품을 통해 구현하려고 한 소통방식은 피상적인 기계적, 미학적 소통방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칸은 현실도시공간의 기술적 생산조건을 수용했고, 역사적 선례를 전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에 있어서 그는 기술적 성과에 기대어 디자인의 합리성을 도모했지만, 동시에 이 기술적 측면을 ‘인간적’으로 번역해 내려 했다. 역사적 선례 또한 현대적 유형으로 적극 변형하려 했다. 또한, 각 건축물로 하여금, 독자적이고 고립된 표현이 아니라 도시의 문화적 맥락과 배경을 가리키고 꾸미는 ‘장식적’ 역할을 하게끔 모색했다. 칸이 공공건물이외에 상업용․업무용 도시건축물들에까지 부여한 기념비적 표현은 도시대중사회에서 공공적 측면을 발굴하고 강화해서 장식한다는 의도로부터 이해돼야 한다. 칸에게 도시는 그것을 이루는 다양한 차원의 요소들이 서로 장식적으로 연결되어 묶이는 것이었고, 이와 더불어, 도시의 전체 질서는 도시의 활용성과 목적을 통해 강화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질서가 자유방임이나 중립적인 제어방식으로 달성되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적, 문화적 ‘동의’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렇게 칸이 윤리성에 입각한 공통감각과 사회적 동의를 소통의 공통적 기반으로 삼은 측면은, 미적 추상, 기술주의, 기능주의, 역사주의 등의 차원의 소통방식들과 구별되는 측면이다. 이를 통해, 그가 창출하려던 공동체는 전혀 새롭게 발명된 공동체도 아니고 과거지향적인 고정적 정체성의 공동체도 아니었다. 다원적인 현대도시문화를 의식하고 그것을 제도적 단위의 집합체인 도시로 재구성하고 재현하려고 했다.
[<와이드AR> 15호, 제2회 심원건축학술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