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부엌’의 수용과 전개
: 가사노동의 합리화 과정을 중심으로
글, 자료. 도연정 건축연구소 후암연재 대표
전통사회에서 부엌은 건축적으로 소외된 영역이었으나 근대 이후의 위상은 놀랍도록 달라졌다. 서양의 경우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부엌이 사회적 논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며, 1920~30년대가 되면 유럽의 근대건축 전시회에서 중요한 주제로 부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서양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의 부엌개량론 또한 1920~30년대에 집중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부엌’이란 시기적으로 근대기에 등장한 부엌유형이자 부엌의 근대성을 일컫는다. 서구의 부엌연구에서는 이미 ‘모던키친(the Modern Kitchen)’이란 용어로 연구된 바 있으나 국내 연구에서는 다소 생소하였다. 본 연구는 부엌의 근대적 성격을 탐구하는 과정과 근대기에 출현한 부엌의 건축적 특성을 고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서구 근대부엌에 내포된 근대성을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한국 근대부엌 수용과 전개의 내·외부적 영향관계와 한국적 특수성을 살피고자 하였다.
근대적 가사노동 개념과 서구 근대부엌의 탄생
서구 근대부엌 탄생의 주요한 배경은 가사노동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그림 1] 근대적 가사노동이란, 전통사회 집안에서 남녀 또는 대가족 하의 협업, 혹은 하인의 업무로 여겨지던 ‘집안일(housewiferie)’이 가족 중 한 명의 여성, 즉 주부의 몫으로 규정되는 개념을 말한다. ‘가사노동’을 뜻하는 단어가 옥스퍼드 사전에 등장한 것도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서구 근대사회에서는 부엌에 대한 전혀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크게 여성과 가사노동의 관계를 거부하고 제3의 방편을 모색하자는 하나의 주장이 있었고, 정반대의 경우로서 가사노동을 여성의 책임으로 인정하자는 극과 극의 제안이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그림 2]
전자의 경우는 유토피안 사회주의자들이 제안했던 ‘공동부엌’이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부엌 없는 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립된 형태의 가사노동, 즉 여성이 홀로 집안의 가사노동을 모두 책임지는 형태를 죄악시 한다는 주장에 따른다. 그러나 한때의 실험적 시도에 그쳤거나 심지어 소설 속 가상의 부엌처럼 실현 불가능한 계획안에 머물고 말았다.[그림 3]
오히려 근대부엌은 가사노동과 여성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던 후자의 논리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가사노동은 과거 하인들이 어두운 지하부엌에서 하는 힘든 노동이 아니라 전문적 지식을 갖춘 근대적 활동이며, 주부는 하녀 대신 기계를 다스리고, 가사노동에 있어 노동자가 아닌 경영자가 된다는 주장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이러한 주장은 20세기 초 미국사회에 크게 유행했던 ‘과학적 관리’의 방법론에 따라 더욱 구체화 되었으며, 일련의 부엌모델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를 테일러리즘을 수용한 합리적 가사운동이라 불렀으며, 공장 노동자의 효율성 관리와 동일한 방법으로 주부의 동작과 동선을 분석하고 수치화 해갔다. 가사노동의 합리화는 곧 가사노동의 효율성을 향상을 의미했다. 산업현장에 적용되던 테일러리즘적 효율성이 근대의 주거공간에 투영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서구 근대부엌은 여성 1인의 작업장으로서 ‘최소면적의 최대효율’이라는 계획원리를 정립하였으며, 이후 자본주의 산업사회와의 돈독한 관계 속에서 발전을 이어갔다.[그림 4]
1920~30년대 위생과 능률의 부엌
일제강점기 부엌개량론은 1920~30년대 미국·유럽의 합리적 가사운동과 근대부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주부나 여학생을 대상으로 새로운 부엌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부엌을 하인의 작업장이 아닌 주부가 관리하고 경영해야 할 전문영역으로 강조하는 양상도 유사하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부엌 전개는 서구와 비슷하였으나 한편 달랐다. 20세기 초 한국의 가정담론도 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강조했던 가정성과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한국의 경우 식민지배 전략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한국사회가 서구와 같은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므로, 일제하 가정담론은 식민지 근대국가의 여성동원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가까웠다.[그림 5]
이에 1930년대 한국사회에 강조되었던 ‘능률’이라는 키워드는 한국 근대부엌의 시작단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20년대의 부엌논의에서 ‘위생’이 주요 키워드였던 반면, 1930년대에는 ‘능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을 의미연결망 분석(Semantic Network Analysis)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그림 6] 서구 근대부엌의 핵심가치였던 ‘효율성(efficiency)’이 한국부엌에서는 어찌하여 ‘능률’이라는 역어로 선택되었는지가 먼저 주목된다.
첫째, 가장 직접적으로는 서구 근대부엌의 개념이 일본을 통해 한국사회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을 들 수 있다. 1880년대 메이지 말기에 이미 일본사회에서는 서구식 부엌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 일본도 미국의 가정과학운동처럼 테일러리즘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능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910년대 후반이 되면 능률개념을 바탕으로 한 동선의 단축, 입식화의 추구 등을 지향하기도 하였으므로, 당시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일본을 통해 서구 근대부엌을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1920년대 서구사회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키친이 파급력을 넓혀가고 있었고, 1930년대가 되면 미국에서 가정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 여성학자들의 기고문을 통해 그와 비슷한 제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둘째, 과학화의 유행에서 비롯된 능률담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은 흔히 생각하는 자연과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근대사회의 모든 합리적 가치를 통칭하는 단어로 존재했으며, 전통적 미개함을 깨우쳐줄 신문명과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다. 이때 과학의 실천에 능률이라는 단어가 동반되었고, ‘과학적 방법’을 통해 능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지만, 사실상 정확히 무엇이 과학인지를 명시한 바는 없다. 문명적 미개함을 과학으로서 깨치고 합리적인 생활을 추구하자는 무조건적 능률담론이 부엌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셋째, 생활개선운동의 전개에 따른 능률의 강조였다. 생활을 고치자는 논의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생활개선’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구체적으로는 1924년 총독부 산하의 생활개선연맹회의 결성에서 비롯된다. 생활개선운동에서 강조한 모든 일을 능률적으로 하자는 구호였으며, 부엌을 포함한 생활전반의 능률을 촉구했다. 사실상 1920년대 이후의 생활개선운동은 전시에 대비하여 자원과 물자를 아끼기 위해 허례허식을 피하고 생활을 간소화하자는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생활의 간소화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그림 7] [그림 8] [그림 9]
따라서 당시 부엌에 강조되었던 능률이라는 가치는, 서구의 근대부엌이 말하는 가사노동의 합리화, 즉 동작의 수치화와 분석, 쓸모없는 동작의 제거와 동선의 압축과 같은 효율성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주부의 성실, 근면, 절약, 연구, 노력을 강조하는 규범으로서의 능률에 가까웠다. 부엌개량론에서 식모의 존재를 맹렬히 비난했던 것에 반해, 박길룡 등이 제시한 개량부엌에서도 실제적 작업자는 식모로 상정되는 등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지 못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개량부엌에 제시된 취사·난방의 분리나 입식화덕의 설치 등 방법은 당시로서 파급적 제안이 아닐 수 없었으나, 일부 계층 부엌의 부분적 개량에 지나지 않았다. 부엌개량론은 실제적으로 부엌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식민계몽이라는 이중적 의도가 양립하였으며, 구체적 성과물이나 파급력을 갖지 못한 채 담론상의 전개에 머물렀다.
경제발전기 능률적 부엌과 아파트 부엌의 시작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주거담론은 국가재건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국가재건사업은 국민생활환경의 복구와 동시에 의식주 개량과 같은 계몽운동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 ‘신생활운동’, 1960년대 ‘재건국민운동’,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국민생활 근대화사업이었다. 주거환경의 개선과 생활방식 개조의 이중적 목적에 기반 하였으며, 주택의 가장 기능적 부분으로서 부엌개량사업이 재개되었다.[그림 10]
1960~70년대 정부 주도의 부엌개량 사업에는 국민계몽과 여성동원의 의도가 엿보인다. 부엌개량을 통해 전근대적인 생활방식을 탈피하고 서구적 생활방식을 장려하는 의도를 관찰할 수 있다. 부엌개량사업을 조국 근대화와 연결 짓거나 가정의 중요성과 여성의 의무로까지 확대해석하는 현상이 그러하다. 이전 시기 부엌개량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서구식의 부엌을 만드는 것은 ‘근대적’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능률적, 합리적’일 것을 지시했다. 서구사회에서 말했던 ‘가사노동의 합리화’라는 문구가 신문과 잡지에 자주 등장하였으며, 서구식 입식부엌은 곧 능률적 부엌이라는 인식이 한국 주거문화에 퍼져갔다. 부엌에서의 ‘능률’은 한국 부엌이 가야 할 궁극적 지향점이 되었으며, 부엌의 모든 동작과 동선을 분석하고 수치화하자는 학계의 연구도 이어졌다. ‘능률적 부엌’은 경제개발기 한국사회가 추구했던 근면, 성실, 경제, 절약 등의 문구에도 부합하였다.
한편, 농촌부엌의 개량과정에는 서구 근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공동부엌의 형태가 일시적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농촌의 부엌사용방식은 도시의 경우와 다르며 농가 주부의 가사노동 이중부담도 크다는 점을 고려하여 ‘공동취사장’을 운영했다. 농촌가정의 가사노동 합리화의 취지였으나, 어디까지나 일시적 사업에 불과하였으며 보편적인 한국 근대부엌의 한 유형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근대부엌이란 곧 개별적 부엌, 즉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핵가족 생활을 전제로 한 부엌유형을 지향했다.[그림 11]
1970~80년대 아파트를 중심으로 싱크대 보급이 증가하면서, 한국 가정의 부엌은 외형적으로 서구식 입식부엌과 더욱 닮아갔다. 서구식 부엌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없이 단기간의 개량을 목표로 추진하였다. 결과적으로 ‘서서 일하는 동작’으로 재편하여 작업의 효율성은 높일 수 있었지만, 한국적인 부엌사용방식을 전부 수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장독대와 같은 전통적 부엌부속공간의 수용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는 전통적 생활습관을 버릴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 말 ‘장독대 없애기 운동’이 대표적이다. 관주도의 급진적 주택정책은 한국인의 뿌리 깊은 생활문화를 되돌아볼 여유를 주지 못했다.
서구 근대부엌의 계획적 속성은 경제발전에 따른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가정성 가치에 더욱 힘입었다.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대부엌에 내포된 이념적·계획적 속성까지 유입되어 들어왔다. 다시 말해 외형적으로 아무리 부엌이 편리해진다 하여도 부엌이 여성 1인의 작업공간이라는 최초의 설정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 아파트 부엌을 중심으로 한 한국 근대부엌의 초기적 모델 형성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는 또한 ‘좌식과 입식’, ‘전통과 근대’, ‘합리와 비합리’라는 이분법적 특징을 보여준다. 초기의 아파트 부엌 형성에서 ‘합리화’는 가사노동의 동선이 아닌 설비의 합리화가 우선시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인식에서 부엌은 여전히 반외부공간인 전통적 주거개념에 묶여있었던 것을 볼 때, 비록 형태는 서구식을 갖추었으나 부엌을 사용하는 한국적 생활방식이나 공간인식마저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부엌과 DK, LK, LD, LDK
근대부엌이 한국적으로 정착되는 과정에는 ‘식당’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크게 작용하였다. 여기에는 DK(Dining Kitchen), LK(Living Kitchen), LD(Living Dining), LDK(Living Dining Kitchen)라는 여러 변수를 염두에 두고 1960~80년대 부엌을 아파트 평면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DK는 1955년 일본 공영주택 51C형을 통해 한국사회에 소개된 용어이며, 기본 원리는 니시야마 우조의 ‘식침분리론’(1942)에 따른다. 식침분리론이란, 의미 그대로 ‘먹는 장소와 자는 장소를 분리하여 계획하자’는 주장으로, 전후 일본 공영주택 계획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개념이다. 2개의 방과 DK가 있는 평면을 일컫는 ‘2DK’는 일본 공영주택의 원형이며 전후 일본 주거문화의 획기적 발명품으로 평가받는다.[그림 12]
한국의 경우도 식침분리와 비슷한 논의를 일제강점기 주택개량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정확히 ‘침식분리(寢食分離)’ 혹은 ‘식침분리’라는 논제가 등장하는 것은 1960년대 초의 일이었다. 대한주택공사는 1959년 한때 국민주택 표준설계에서 부엌 옆 찬마루 공간을 식당으로 쓸 수 있도록 넓게 계획한 적이 있고, 1963년에는 LK를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의 기록에도 ‘대담한 시도’로 평가하였던 이러한 유형은 입주민의 반발에 부딪혔고, 이내 좌절되었다.
1962년 마포아파트에서는 부엌과 거실을 완벽히 분리시켜 계획하는 L+K형을 취했다. 그러나 1970년 한강맨션에서 식탁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L+DK를 형성했다. 식당을 겸하는 부엌은 문으로 구획되어 있고 필요시 거실과 완전히 단절될 수 있는 형태였다. 그런데 불과 몇 년 후DK와 L의 구획형태가 점차 달라져, 1973~74년 반포주공 1단지, 1976년 잠실주공 5단지의 20~30평형대 평면을 보면 L과 DK 사이의 경계가 유리문, 아코디언식 접이문, 커트 등으로 다양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976년 사례에서는 부엌과 거실 사이를 단순히 천정의 아치 정도로 구분하거나, 아예 문을 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부엌이 거실에서 보이지 않도록 평면상의 꺾인 위치에 계획한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가 되면 거실과 DK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없어지고 오늘날과 같은 LDK평면이 만들어진다. 즉 DK와 L(거실)간 경계의 변화는 1970년대의 초중반을 거치면서 ‘단절-유연-소멸’의 짧은 과도기를 거쳤다. 1980년대 이후의 단계를 LDK형 부엌이라 명명한다.
식당의 측면에서 보자면, LDK형 부엌은 DK가 거실과 단절된 형태보다 거실에 개방된 형태로 이행한 결과와 같다. 1970년대 초에 등장한 거실과 단절된 DK 유형에 대한 선호도가 채 10년을 넘지 못했다는 선행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한국보다 DK를 먼저 도입한 일본의 경우, 우리와 크게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DK는 1955년 공영주택에 최초로 도입되었다. 일본주택공단은 별도의 거실을 두지 않고 DK와 방(R)만으로 구성된 nDK형을 1975년까지 지속적으로 건설하였다. 기간으로 보자면 약 20년간이다. 여기에 거실(L)을 추가한 nLDK형의 보급은 1970년대 초반까지 저조한 수준이었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으로 건설되었다. 비로소 일본 공영주택 평면에 거실(L)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 nLDK형의 보급률은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nDK를 넘어설 수 있었고, 1980년대부터 nLDK가 보편적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일본 공영주택에서 DK라는 부엌 유형, 즉 별도의 거실을 두지 않고도 부엌 겸 식당만으로 공실(公室)을 사용하는 방식은 1955년 최초 등장한 후 1970년대 중반까지 큰 거부감 없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림 13] [그림 15]
이러한 차이는 부엌과 식당을 합치는 사용방식에 대한 거부감의 차이를 짐작하게 한다. 식침분리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니시야마 우조가 적용하고자 한 것은 전통주거공간에 없던 식당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서민생활에 존재하였던 식사문화를 응용한 것이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전통적으로 온돌, 마루, 부엌이라는 주거공간 구분이 뚜렷했으며, 식사는 항상 고급의 공간에서 행했다. 근대부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배선동선 단축문제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부엌을 거실과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은 부엌에 대한 보수적인 공간인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파트를 모델로 서구식 주거 근대화를 지향하였다 하더라도 DK가 완전히 수용되는 데에는 부엌에 대한 전통적 공간인식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반면 거실의 경우, 등장단계에서부터 부엌과는 차별된 공간적 위계를 내포했다. 마포아파트 거주민을 대상으로 거실을 부르는 명칭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1971년 1차 조사는 ‘마루, 거실, 응접실, 마루방, 큰방, 가운데 방, 현관방, 바깥방’ 등으로 다양했다. 그중에서 마루와 거실의 순으로 부르는 비율이 높았고, 이는 1978년 2차 조사에서도 같은 결과로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한국 주택에서 마루는 생활상의 기능과 공간적 측면에서 신성 공간의 성격이 강했다. 지속적으로 거실을 마루로 인식했던 경향을 볼 때, 거실은 마루의 공간적 위계를 이어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전통적으로 방에서 행하던 식사를, 집 안 어딘가에 따로 장소로 옮겨야 했다면, 상대적으로 공간적 위계가 높았던 거실이 부엌보다 선호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거실과 단절된 DK는 근대부엌의 능률이란 가치에는 적합하였지만, 부엌에 대한 보수적 공간인식까지 쉽게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근대부엌의 능률을 유지하면서도 식사장소로서의 공간적 위계를 보완해주는 방법으로 ‘거실에 개방된 형태의 DK’를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LDK형 부엌은 이러한 절충과정 끝에 한국 아파트에 정착한 근대부엌이라 할 수 있다.
선행연구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실이 ‘마루’의 위계를 이어받고 전통적 인식의 연장선에서 발달해 온 것이라면, 부엌은 능률이라는 근대적 가치에 의해 ‘주방’의 새로운 위상을 얻게 되었다. 식당은 고급공간에서의 식사 전통과 근대적 능률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위치로서, 짧은 기간 안에 거실과 부엌의 균형점을 찾아주었다. LDK형 부엌에서는 더 이상 가족의 식사가 필요에 따라 부엌, 방, 거실을 오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비로소 온전한 식침분리의 생활방식도 정착할 수 있었다. 식당은 한국 근대부엌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부엌에 대한 분리와 통합의 이중적 요구
부엌이 거실에 개방되는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 부엌의 장식성도 점차 증가했다. 특히 주택시장이 아파트 위주로 활성화되고, 모델하우스 등에서는 아파트의 상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부엌을 최신식 부엌가구와 가전으로 포장했다. 1970·80년대의 부엌이 ‘주방’이라는 명칭으로 전통부엌과 다른 점을 강조했다면, 1990년대 이후는 ‘시스템키친’이라는 차별화된 용어도 대중화되었다. 최신식의 부엌설계를 통해 현대 한국 부엌에서 가사노동의 합리화는 이제 더할 나위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그림 14]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거실·식당·부엌의 물리적 경계가 사라진 공간구성에 대해 사람들이 다시 불편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이 관찰되기 시작하는 시기가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점도 큰 의미를 가진다. 1980년대이라고 하면 식침분리가 보편화되고 거실 중심형 LDK 평면이 보편화되었다고 평가하는 시기이다. 즉, 거실(L)-식당(D)-부엌(K)간의 물리적 경계가 없어진 이후 등장한 새로운 고민으로 볼 수 있다.
주민선호도 분석을 통해 부엌과 식당이 거실 등과 적절한 시선차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에 대한주택공사(1987)의 조사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설문조사를 통한 차단의 요구정도로는, 식당에서 부엌은 비교적 완전 개방(87%), 거실에서 부엌은 시선차단(61.9%), 냄새·소리 차단(21.3%)의 순서로 조사되었다. 주된 이유로는 주부들이 시선, 냄새 등의 문제 때문에 부엌을 분리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분석, 부엌이 늘 정돈된 상태로 있어야 하는 점에 부담을 느끼거나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이유가 관찰된다.
부엌은 자칫 지저분해지기 쉬운 장소임으로, 거실 측에서 시선을 차단하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동시에 모순적으로 부엌에 서서 일하는 가족(주부)의 입장에서 거실과 개방될 필요성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고 L과 DK 사이를 다시 문으로 구획하는 1970년대 초의 L+DK 형태로 회귀한 것도 아니다. 식당은 부엌과의 동선 단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거실과의 개방감을 전제로 한국 주거에 정착하였으므로, 부엌을 다시 분리하거나 차단하는 식의 평면으로 간단히 회귀할 수 없었다. 즉, 한국 근대부엌에는 ‘분리와 통합’이라는 모순된 요구가 혼재하게 되었다.
이것을 전통적 주거공간 인식과 근대적 공간재편 사이의 작용·반작용으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LDK아파트의 부엌은 전통시대에서 완전히 위상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부엌을 타주거공간과 분리하려는 고정관념은 향후 한국 주거공간이 전개되는 여전한 동인(動因)이 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사노동 중에서도 특히 식생활과 관련된 분야의 사회화 속도가 유난히 늦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식생활과 관련한 주거공간에 대한 인식변화도 그러하리라 쉽게 예상된다. 부엌이 거실에 개방되고 화려해지는 속도와 전통적 공간인식의 변화속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실에 맞추어 부엌과 식당공간을 꾸미고자 할수록, 더러워지기 쉬운 진짜 작업공간을 가리거나 어딘가에 감추고자 하는 요구가 발생할 것이다.
가장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냄새나 오염 등 식당의 영역성에 방해가 되는 행위와 물건들을 수용하는 또 다른 부속공간의 발달이다. 예전처럼 부엌과 다른 주거공간을 완전히 구분하는 평면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눈에 띄지 않는 다른 공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면적이 제한된 도시주택의 경우라면, 새로운 방을 만드는 것보다는 전용면적에 산입되지 않는 후면공간을 발달시켜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일부 아파트에서 운용되는 보조주방이 대표적 사례가 된다.
부엌부속공간의 필요성은 지속적이며, LDK형 부엌이 거실에 더욱 개방되는 형태를 취할수록 더욱 상승한다. 이미 2010년대 이후 아파트 설계에서는 면적이 허락하는 한 DK내부에서도 취사와 식사공간의 간이벽이 등장했다. 이것은 LDK형 부엌이 보편화 될수록 일정부분을 가리고자 하는 반대의 욕구를 보여주며, 한국 근대부엌에 혼재하는 거실과의 통합과 분리에 대한 모순된 요구를 보여준다. 이것을 근대부엌 계획의 기본 원리에 대입해보면, ‘가사노동의 합리화’라는 명제에 맞지 않는다. 이를 ‘가사노동의 비합리화’라고 바꾸어 부를 수 있다면, 이는 곧 근대의 반대, 전통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부엌의 전통성과 근대성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부엌연구에서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근대부엌’이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가사노동의 합리화’ 관점에서 한국 근대부엌의 형성과정 및 특징을 분석하였다. 한국의 근대부엌은 서구 근대부엌을 탄생시킨 ‘가사노동의 합리화’라는 개념이 ‘능률’이라는 변용적 인식을 거쳐 한국 주거공간에 구현된 결과물이었다. 본 연구를 통해 선행연구에서 충분하게 다루지 못했던 근대부엌의 형성 배경과 부엌의 근대성을 살펴볼 수 있었으며, 한국 현대주거에 공존하는 전통과 근대의 구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근대부엌은 외형적으로 서구 근대부엌을 향해 달려왔지만, 오히려 비합리적이라 부정했던 부엌에 대한 전통적 개념과 사용방식에 따라 조율되기도 하였다.
‘가사노동의 합리화’가 목표했던 것과는 달리, 근대부엌에는 여전히 비합리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서구의 연구에서 지적하듯이 근대부엌의 등장만으로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도 논란 중이며, 대중적으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키친과 한국 부엌 근대화의 관련성에 대한 신화적 평가도 수정되어야 함이 옳다.
향후 한국 부엌의 계획에 있어서는 좌식과 입식, 전통과 근대, 비합리와 합리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벗어난 방법론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면형 부엌’이나 ‘가족참여형 부엌’과 같은 미래지향적 부엌연구에 있어서는 공간적 평등과 성적 평등을 동일시하는 관점도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위해서는 서구 근대부엌 계획이념에 내재하는 여성성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젠더 관점의 연구가 부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수상작 요약문에 포함된 그림 등 도판의 내용을 확인하려면 pdf로 제공되는 와이드AR 통권 66호(2019년 5-6월호)를 참고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