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심사평]

[심사평]

심사위원 이주연

(본지 부발행인, 건축비평)

 

탈식민주의와 탈근대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다(or 길 찾기)

 

한반도를 둘러 싼 작금의 사정을 들여다보노라면 시계를 한 세기 전으로 돌려놓은 것 같은 섬뜩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런 현상이 어디 요즘만의 일이겠는가 만은 주변 세력의 압박뿐 아니라 우리 사회 안의 반목과 갈등이 보여주는 현실의 암울함이 우리 시대의 앞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점에서 “이식문화”, “되받아”, “탈식민주의”, “독해” 등의 열쇠 언어를 앞에 내세운 이번 응모자의 비평적 시선은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기실 우리가 안고 있는 건강한 시민사회의 저해 요소 가운데 이른바 근/현대의 잘못된 과거를 제 때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채 누적돼 온 폐습을 건축의 시선으로 치환해 돌아보듯 흥미로운 텍스트를 접할 수 있었다.

응모자는 제출한 평문에서 제기한 문제의 바탕을 “(일제강점의 불행한 시기의) 비자발적 비구체적 상황에서 비서구권 국가를 통해 받아들인 서구건축의 양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태생적 문화의식”으로 설정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답으로 “탈식민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응모자는 이런 관점을 먼저 드러내고 이일훈의 건축에서 문제의 해석과 결론의 실마리를 도출하는 전개방식으로 평문을 완성시켜 나간다. 텍스트들 사이의 외국 인문학자나 건축이론가의 언설이 평문에서 주창하는 논지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그 언설이나 주창이 정작 우리의 텍스트로 그대로 옮아오기가 버거워 보인다. 평문 전체 텍스트의 1/3 가량을 서두에서 탈식민과 탈근대의 논지를 쟁점으로 상정해서 진단하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 현대건축 역사 안에서 그 근거와 단서를 구체적으로 들추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이일훈과 그의 건축을 소환해 거기에 대입시켜 답을 엮는다. 이일훈의 건축이 평문에서 이끌고 있는 논지에 합당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결이 다른 텍스트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평자의 자의성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이어지는 논지를 쫒아가다 보면 탈식민과 탈근대가 서로 엉키고 문제의식의 해법에 적용함직한 동시대성의 공유도 흐려지는 여지를 보이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예컨대 “불편하게 살기” “채 나눔” “로 테크” 등 이일훈의 ‘텍스트’와 ‘탈식민성’ 간의 관계항을 적확히 설정하고 있는가를 의문해보는 것이다. 본질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도…

어렵사리 이 심사평을 마무리 하는 도중 우연히 SNS를 통해 ‘스타 칼럼리스트’라는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어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그가 낸 책을 설명하는 가운데, [논어]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언급하면서 “논어는 유교적 삶의 지혜서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법을 이끌어주는 고전”이라고 말한 걸 듣게 되었다.

그가 말한 여러 견해에 따르자면 내 앞의 텍스트는 늘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읽힐 수 있는 함정을 안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함정에 노출되는 우려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독해가 가져올 폐해가 아닐까. 이렇게 텍스트를 제대로 읽으라는 김영민 교수가 방송에 나와 말한 그의 책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한국 현대건축의 좌표가 식민주의의 굴레에 머물러 있든 근대주의의 구속에서 못 벗어난 것이든 우리가 우리 건축에서 우리다운 문화적 정체성을 그나마 “간신히”라도 찾아 지속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 지혜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겹친다. 여기서 말하는 텍스트는 말이나 글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일상 속 무엇이나 해당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동의도 물론 필요하겠다.

 

 

[심사평]

심사위원 전진삼

(본지 발행인, 건축비평)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건축평단의 새 얼굴

 

지난 10년간 본지가 주최해온 건축비평상의 수상자가 금회 포함하여 4인에 불과하다. 수상자 수가 적은 것은 차치하고, 해마다 응모자의 숫자는 내리막길을 치닫다가 급기야 근년에는 연거푸 두 해에 걸쳐 응모자가 한 사람도 없는 상황을 맞기까지 했다. 정황이 이러하니 금회에 단 한 사람의 응모자가 있어 솔직히 응모작을 일견하기에 앞서 반가움이 매우 컸다.(이것이 심사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솔직히’ ‘매우’라는 표현을 남기지 않았을 터다.)

심사는 두 차례에 걸쳐서 심사위원 대면 논의를 통해 수상 가부의 윤곽을 잡았고, 돌아서서 서로가 공유한 응모작 리뷰를 바탕으로 각자 심사평을 작성하는 수순을 밟았다.

최우용이 제출한 두 편(주평론, 부평론)의 평문은 응모자의 (일본 건축에의) 관심사를 연속적으로 살필 수 있게끔 세심하게 조율된 글이라는 점에서 그 같은 글의 프레임이 한국 현대 건축의 문제점을 환기시키는 데에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살 수 있었다.

우선 부평론(‘이소자키 아라타의 프리츠커상 수상과 NPP 사업의 허상’)을 살펴보자.

그가 다루고 있는 건축디자인에 관한 2019년 국가건축정책(Next Pritzker Prize, NPP)에 대한 문제의식은 결코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난타 당한 NPP는 홈페이지의 대문 명칭을 바꾸는 것으로 잘못된 방향의 꼬리를 내린 격이니 탁상공론식 건축정책의 문제점을 붙잡고 늘어지는 글이었다면 그것이 유의미한 결론에 이른 글이었을지언정 응모자의 평문은 심사자의 흥미를 돋우지 못했을 터다. 다행히 응모자의 시선은 일본의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을 일견하면서 1995년 안도 타다오의 수상 이후 2010년 SANAA 세지마 가즈오와 니시자와 류에의 수상 사이의 15년의 간극에 담긴 건축이슈에 평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들이댄다. 그것은 이 부평론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부분(독자들의 세심한 읽기를 권한다)이고, 건축 이념형의 프레임에 갇힌 한국 현대 건축가들에게 전달하는 확실한 메시지다.

다음은 주평론(‘이일훈 건축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독해’)이다.

주평론이 설정하고 있는 ‘탈식민주의’라는 프레임은 금회 수상자의 등급을 결정하는 데에 부정적 역할을 했다. 평문의 전반부는 탈식민주의에 대한 독자의 시선몰이를 위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서구의 시각에서 출발하는 탈식민주의에 대한 이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 우리가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겪은 식민의 역사와 그로부터 한국 근·현대 건축의 발아와 성장에 이르는 지난한 시기의 탈식민주의적 건축의 탐문이 생략된 채 곧장 1990년대 초 4.3그룹의 건축 활동기로 비약하여 이일훈의 건축세계를 통해 탈식민주의적 독해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는 것은 적이 의아스럽게 읽혔다.

특히 이일훈의 건축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들이댄 (그것은 이미 건축가 본인에 의해 설파된 주징들의 나열로 더 이상 새로운 입론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켜의 논점들은 그것이 탈식민주의적 태도라기보다는 탈근대주의적 태도에 가까운 탐침이라는 점에서 최우용의 주평론은 위험하게도 한국 근·현대 건축에 관한 시공간적 단절을 의도하고 있을뿐더러 사용한 탈식민주의라는 프레임이 이일훈 건축의 독법으로 마뜩치 않다는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논쟁적 접근의 일환이라고 읽어내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우용이 글쓰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한국 현대 건축의 상황 진단능력과 부지런히 건축의 현장을 발로 밟고 쓰는 건축비평(가)의 태도에 마음이 끌렸다. 그가 건축비평상이라는 다소 거추장스런 프레임(수상을 해야 의미를 찾는 응모자 공통의 한계 등)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그의 평문이 쓸데없이 많이 무거워졌다고 보았다. 그런 중에 들이댄 ‘탈식민주의’ 관점인지라 이는 이후 시간을 갖고 응모자 스스로 보완·수정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국내에서 탈식민주의에 대한 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와 중첩된 1980년대에 2020년은 미래영화에서나 설정하는 먼 미래의 시간이었다. 이제 바로 그 때 그 시절의 먼 미래가 현재의 시간으로 다가선 시점에 이르러, 건축에서 ‘탈식민주의’의 프레임을 투영시킨 최우용은 나를 포함한 그의 앞 세대가 이러한 프레임에 관하여 일제강점기-해방공간-전쟁과 재건, 압축개발시대 등을 거쳐 오며 지속적으로 논의 구조를 만들고 건축으로 가능한 실천적 해법들을 쌓아오지 못함으로써 응모자 연배 기준으로 지난 40년 동안 이렇다할만한 성과 없이 현 시대에조차 식민주의적 준거 안에서 자기와 동 세대 한국의 건축가들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서구 지향적) 건축의 덫에 걸려들어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음은 그 자체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결과 한국 현대 건축의 현 상황은 (종잡을 수 없는 양태가 더러는 역동적으로 보일런지는 몰라도) 여전히 서구의 건축 기준으로 볼 때 일본 현대 건축이 가지고 있는 세계적 위상을 쉬이 넘겨볼 수 없다는 점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는 셈이다. 금회에 최우용이 응모한 두 편의 평문은 그런 의미에서 상호 보완적인 글쓰기로 읽힐 수 있는 선명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