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작 요약문]

甓甎-우리나라 벽돌건축의 조영원리 

글: 박성형

 

건축을 형성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각 사회의 생산력과 당시 사회 상황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건축 재료는 그만이 갖는 고유한 구축(構築) 방법과 구조(構造) 체계를 통해 형태와 공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건축 재료의 사용 범위와 구조 기술이 한정적이었고 변화 속도 또한 느렸던 과거의 건축에서는 현대건축보다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으므로, 역사건축은 건축 형식과 형태에 관한 연구 이전에 당시 사회가 주로 사용하였던 건축 재료를 통해 살펴보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건축은 선적(線的)인 나무를 구조 재료로 사용하는 가구식(架構式) 목조건축(木造建築)이 주를 이루어 왔다. 여기서 가구(架構)는 건물의 뼈대인 골조(骨組)를 의미하고, 가구식 구조는 기둥・보 등의 뼈대를 결구(結構)하여 각각의 절점(節點)을 통해 하중을 전달하는 구조를 말한다. 한국건축의 또 다른 구조 방식에는 절점 없이 단위(單位) 부재(部材)를 쌓아 올려, 상부 하중은 부재와 부재가 직접 맞닿아 지면으로 전달하는 조적식(組積式) 구조가 있으며, 대표적인 건축 재료에는 석재(石材)와 벽전(甓甎)이 있다. 또한 벽체(壁體) 형식에서 가구식은 뼈대로 지지하므로 칸막이벽(curtain wall)이 보편적이지만, 조적식은 상부 하중을 벽체가 전담하는 내력벽(bearing wall)이 보편적이다. 이렇게 두 구조를 통한 건축은 하중 전달 방식에 의한 구조 체계와 벽체의 형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각 독특한 건축 형태와 특징을 나타내고 서로 다른 공간을 창출하는데, 이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건축과 필요를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적식 구조 재료인 벽전은 나무・돌과 함께 가장 오래된 건축 재료 중 하나이며, 기와와 동일하게 인간의 특정 목적에 따라 자연물을 가공하여 만들어 낸 최초의 건축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벽전을 통한 조적식 건축은 가구식 구조와는 다르게 일정한 규격의 단위 부재를 적층(積層)하여 독특한 구축 방법과 구조 체계를 갖는데, 목조건축과 함께 벽전건축은 한국건축의 독립된 영역을 확보하며 전개해 왔다. 즉, 낙랑(樂浪)과 삼국(三國)에서는 벽전축(甓甎築) 무덤과 벽탑(甓塔) 등을 축조하였고, 한국의 전시기에 걸쳐 조적식 건축 구성 요소인 홍예(虹蜺:arch)・볼트(vault)・궁륭(穹窿) 등이 현존한다. 목조건축은 고려말 건축이 최고(最古)이지만, 벽전건축은 삼국은 물론 낙랑의 유구까지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각 시기를 연속하는 건축사(建築史)를 완성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건축사(韓國建築史)에서 벽전은 전통 양식의 일부로서 위치를 차지하며, 나무와는 다른 이질적인 재료로서 독특한 건축 의미 또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구식 목조건축에 대한 연구에 비해 조적식 건축인 벽전건축에 관한 연구는 삼국시대(三國時代)와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벽전에 나타난 무늬의 특징과 의미 해석에 관한 회화(繪畵) 분야의 연구, 또는 현대에 사용하고 있는 ‘붉은색 벽돌’의 의장(意匠) 특성과 조형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어서 한국건축에서 벽전이 갖는 구조 특징과 건축 재료적 특성, 그에 따른 건축 의미를 나타내는 데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각 시기마다 한국적 특징을 나타나고 있는 벽전건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벽전을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사용한 중국(中國)의 영향 또는 중국 건축형식의 유입(流入)으로만 설명되고, 특히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서는 벽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각 시기에 나타난 벽전의 특징과 함께 한국건축의 벽전 사용 범위를 재조명하고, 고대로부터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는 벽전 사용의 연속성을 밝혀 중국과 구별되는 벽전의 사적(史的) 위치와 건축 의미를 재조명하였다.

동시에 가구식 구조와는 달리 벽전으로 축조한 조적식 구조의 건축 특징을 연구하였다. 건축 구조 재료로서 벽전은 일정한 크기의 단위 부재로 인해 건축 평면과 입면・단면의 규모와 일정한 상관관계를 갖기 때문에, 벽전건축의 각 부분에 나타난 쌓기 방법의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건축사에서 가구식과 다른 조적식 건축을 재평가하였다.

또한 한국건축의 주를 이룬 목조건축에서의 벽전 사용과 그 범위를 고찰하고, 전형적으로 나타난 건축 특징을 연구하였다. 특히 한국건축에서는 조선후기 벽전 사용의 확대에 따른 목조건축의 벽체 형식과 구조 체계의 변화를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는데, 목조건축의 구조 재료인 나무는 쉽게 불에 타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썩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화재와 부식에 강하고 압축력에 효과적으로 지지할 수 있어 내구적(耐久的)인 건축을 축조할 수 있는 조적식 건축 재료인 벽전을 가구식 목조건축에 적극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적식과 가구식 구조가 갖는 각기 다른 구조 체계와 벽체 형식으로 인해, 조선 후기 목조건축은 형태는 물론 내부 공간까지 변화하여 특유의 건축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에서의 벽전 사용의 확대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건축과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 등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므로 한국건축에서 또 하나의 형식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벽전 관련 용어를 한국 고문헌(古文獻)을 통해 정리하고, 벽전의 건축적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하였으며, 생산방식에 따른 벽전의 특징을 도출하고, 각 사회의 벽전 생산력과 직결하는 가마[窯]의 제도를 통해 조선 후기 벽전 사용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배경 역시 살펴보았다.

 

  1. 용어‘甓甎’ :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사용한 ‘연와'(煉瓦)・‘전'(塼)・‘벽돌'(壁乭) 등의 벽전 관련 용어를 대신하여 한국 고문헌의 고찰을 통해 ‘벽전(甓甎)’ 용어의 사용을 제안하였다. 즉, 고려 말 이전의 문헌에서는 주로 ‘전(塼)’과 ‘전(磚)’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고려 말 또는 조선 전기에 ‘벽(甓)’과 ‘전(甎)’ 용어가 출현하였으며, 그 이후 각종 문헌에서는 ‘벽전’을 대표적으로 사용하였다.

‘벽전’은 벽체를 축조하는 벽전인 ‘벽(甓)’과 바닥을 포장하는 벽전인 ‘전(甎)’이 합쳐진 용어이므로, 일반적인 벽전 용도뿐만 아니라 건축 재료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으며, 현재에도 충분히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용어이다. 특히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벽(甓)’・‘전(甎)’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였고, 일반적인 벽전을 지칭할 경우에는 ‘벽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벽전’은 조선 후기 사회에 정착한 용어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벽전’은 조선 후기와 현재와의 연속성을 설정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인 것이다. 또한 ‘벽전’은 당시 한국에서만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으므로, 벽전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중국의 ‘전(磚)’과는 구별되는, 한국의 독자성을 찾을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1. 한국 벽전의 발생 : 한국에서 벽전은 기와와 동일하게 목재와 석재를 빗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덤에서부터 기원하였다. 낙랑(樂浪:B.C.108~A.D.313)의 초기 무덤 형식은 주요 구조체를 나무로 축조한 귀틀무덤이었지만 지하수와 빗물이 스며들어 쉽게 썩고 붕괴하므로 내부 주검과 껴묻거리[副葬品]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귀틀을 벽전으로 덮어 보호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시기는 1세기 후반에서 늦어도 3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高句麗:B.C.37~A.D.668)에서는 적석무덤인 태왕릉(太王陵)과 천추총(千秋塚)의 각 단 윗면을 두께 2㎝의 붉은색 벽전을 덮고 빗물을 막아 적석무덤의 붕괴를 방지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환원(還元) 소성에 의한 낙랑의 회흑색 벽전과는 다른, 독자적인 산화(酸化) 소성 방법에 의한 붉은색 벽전을 생산・사용하였으며, 적석무덤의 축조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이므로 그 이전부터 붉은색 벽전은 빗물을 막기 위해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벽전 유구는 한국건축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므로, 한국 최초의 벽전은 구조체를 축조하기 위한 목적보다 기와와 동일하게 빗물을 막는 방수(防水) 목적으로 발생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에서도 “대개 옛적에 돌로 목재를 덮어 썩는 것을 막았던 까닭으로 기와와 벽전이 발생한 것이다”라고 하여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1. 한국건축의 벽전 사용과 그 의미 : 조선후기 이전의 벽전은 주로 왕궁이나 절[寺]과 같이 위계가 높은 상위 계층의 건축이나 종교 건축에서 일부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통해 벽전이 갖는 의미는 위계를 나타내거나 종교의 상징성을 담고 있는 숭고한 의미의 건축 재료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 중 특히 『구당서(舊唐書)』에서 ‘그들(고구려인)이 거처하는 곳은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는데, 절과 신의 사당 및 왕궁과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한다’라고 하였는데, 기와의 예이지만 이를 통해 생산 방법과 그 특징이 유사한 벽전 역시 동일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의 벽전에는 기하학 무늬와 함께 연꽃・봉황・용・도깨비・산경치・보상화 등 주로 왕실・불교와 관련하는 완결된 무늬를 새겼고, 목조건축의 바닥과 벽체・기단 등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무늬를 새긴 벽전을 사용한 건축은 일반 건축과는 다른, 당시 사회에서의 위계와 권위・장엄을 나타내는 건축이었으며, 이때 벽전은 권위와 장엄을 표현하거나 의미하는 건축재료였던 것이다.

이러한 벽전은 상위 계층을 위한 벽전축(甓甎築) 무덤과 불교의 신앙 중심인 벽탑(甓塔) 축조에 사용하였고, 낙랑토성에서는 벽전으로 축조한 수고(水庫)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목조건축에서는 기단과 벽체・바닥에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 외에서도 보도(步道)・배수로(排水路)・계단 등에 사용하여 한국건축에서 벽전은 매우 넓은 범위에, 다양하게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건축사에서 벽전은 나무・돌・기와와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축 재료로서 자리매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고려에서는 일반 백성들까지 사요(私窯)를 설치하여 기와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벽전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함경남도 혜산(惠山)과 삼수(三水)를 중심으로 험한 산지에 벽성(甓城)을 축조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려에 이르러 한국의 벽전 생산과 그 사용이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최초의 벽성 축조는 벽전의 사용과 생산・축조 방법의 발달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계승한 조선 전기에는 벽전의 사용이 크게 위축되어 왕실과 연관한 아주 특별한 건축에만 사용하였을 뿐인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크게 다섯 가지로 추정할 수 있었다.

조선은 고려에서 숭상한 불교를 배척하고, 철저하게 주자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교정치를 표방하였으므로,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예학(禮學)에 의해 벽전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유교 윤리에 입각한 효(孝)사상은 부모를 길지 명당에 안치하려는 음택풍수(陰宅風水)의 확대를 초래하였는데, 벽전은 석회로 부착하면 수고(水庫)를 만들 수 있는 특징이 있으므로 건축재료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벽전은 ‘밀폐(密閉)’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부모를 안장하는 무덤에 벽전을 사용하면 지기(地氣)와 수맥(水脈)을 차단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벽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풍수지리사상은 신라 말기에 성행하여 각 시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벽전축 무덤을 축조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관념으로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만의 특수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 궁궐이나 일반 살림집에서 벽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관념에 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죽은 자를 위한 묘(廟) 건축에서는 음(陰)의 공간인 내부를 외부 양기(陽氣)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벽전을 사용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유교의 수직 윤리에 따른 사대사상(事大思想)으로 인해 종주국인 중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벽전은 조선의 건축재료가 아니고, 또 국력이 중국보다 약한 조선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관념이 팽배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벽전의 생산기술과 가마 제도가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벽전 생산에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벽전은 그 사용이 크게 줄었고, 그에 따라 생산기술은 물론 벽전의 건축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벽전 축조 방법 등의 건축 기술을 축적하지 못한 것이다.

벽전을 제작하는 흙의 성질 또한 큰 요인이다. 조선의 흙은 중국과 달리 수분이 많고 흙의 입자가 굵어, 소성 때에 휨이나 뒤틀림・균열 현상이 쉽게 발생한다. 때문에 중국보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벽전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일반적 사용은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요인에 의해 조선전기에는 벽전의 사용 범위가 크게 줄었지만 기존 주장과 같이 벽전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즉, 조선 전기에도 꾸준한 벽전 사용 주장들이 제기되었으며, 실제로 화재를 막기 위한 방화장(防火墻)과 묘(廟) 건축에서 양기를 막기 위한 벽체, 성균관・어실(御室)・정자각(丁字閣) 등의 바닥 포장에 벽전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하였다. 또한 고려를 이어 조선전기에서도 벽성을 축조하였고, 종묘의 신로(神路)・월대(月臺) 등 외부 공간 바닥에도 사용하였으며, 벽전을 사용한 목조건축으로 동관왕묘(東關王廟) 정전(正殿)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목재 수급의 불균형과 북학파(北學派)의 보다 적극적인 주장에 의해 새로운 건축 재료의 필요성이 사회 전반에 걸쳐 대두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1794~1796년, 화성성역에서 벽전을 가장 광범위하게 계획적으로 사용하여 다양한 벽전쌓기와 건축 형식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화성의 영향은 조선 후기 사회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궁궐은 물론 사대부의 살림집에까지 다양하게 벽전을 사용하게 되었다. 즉, 벽전으로 축조한 굴뚝과 문・꽃담은 물론 심벽(心壁)・평벽(平壁)・내심벽외평벽 형식의 벽체를 축조한 목조건축과, 지붕은 목조이지만 벽체는 내력벽을 갖는 새로운 형식의 건축들을 축조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사회에 벽전을 급속도로 파급할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승염식(昇焰式) 가마인 벽요(甓窯)로 인해 적은 땔감으로도 많은 양의 벽전을 생산할 수 있었던 까닭인데, 이는 결국 조선 후기의 벽전 생산력 발달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사를 통틀어 유독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만 무늬 없는 벽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유교에서 숭상하는 절제・간결・소박의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엄격한 예제(禮制)를 회복하기 위한 조선에서는 화려・장엄을 위주로 하는 종교 건축을 대신하여 유교의 합리성과 질서 존중의 정신을 반영한 절제된 단순미와 단정・검약한 건축조형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만 무늬 없는 벽전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시공(施工)과도 연관하는데, 완결된 무늬가 있는 경우에는 무늬의 의미와 상징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벽전을 가공하여 사용할 수 없지만, 무늬가 없는 벽전은 화성의 벽전쌓기 특징과 같이 시공 때에 가공하여 축조하고, 미세한 치수를 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벽전은 불교의 장엄을 위한 의장적인 목적보다,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벽전은 종교의 장엄과 상위 계층의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것에서,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의미로 변화하였으며, 이는 곧 벽전 사용의 보편화와 관계할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1. 벽전 형태와 무늬 : 한국에서 사용한 벽전은 장방형과 정방형 벽전이 주를 이루는데, 장방형 벽전은 일반 벽체나 바닥의 포장, 정방형은 바닥을 포장하는 데 주로 사용하였다. 특히 신라 벽탑에서 정방형 벽전은 옥개 모서리 축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동관왕묘에서는 모서리를 안정적으로 축조하기 위해 장방형 벽전과 동시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사다리꼴 벽전은 주로 벽전축 무덤에서 사용하였는데, 설계 과정을 통해 제작한 벽체와 궁륭의 곡률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벽전이며, 이와 동일한 벽전은 조선후기 홍예 축조에 사용한 홍예벽(虹蜺甓)이다. 그 밖에 벽전의 두께가 서로 달라 사다리꼴 벽전을 이룬 경우도 있는데, 이 벽전은 주로 외부에 석회 줄눈이 드러나지 않도록 뒤쪽에서 벽전을 접합하는 축조 방법에 사용한다. 그러나 화성에서는 사다리꼴 벽전을 대신하여 일반 장방형 벽전의 뒤쪽을 뾰족이 가공하여 석회 줄눈이 나타나지 않도록 축조하였다.

이외 고려 죽죽리(竹竹里) 절터 기단에 사용한 육각 벽전, 고구려 벽탑에서 원기둥을 표현하기 위한 원형 벽전, 신라 벽탑의 옥개에 사용한 곡면 벽전과 절반만 경사를 둔 특수한 형태의 벽전들은 벽전건축의 형태와 축조방법에 적합하도록 정방형・장방형 벽전과는 별도로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신라 벽탑 축조에서는 하중을 크게 받는 부분에 철물(鐵物)을 이용하여 벽전과 벽전을 연결하였으며, 날벽전(墼甓甎)에 철물을 미리 연결하여 제작한 벽전도 발견되었다. 낙랑 벽전축 무덤과 고구려에서는 직선 벽체를 축조할 경우에 벽전 자체에 촉과 촉구멍을 만든 모자벽전(母子甓甎)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석회 없이 벽전을 연결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백제 벽전축 무덤과 신라 벽탑, 고려 장곡사(長谷寺) 바닥을 포장한 벽전에는 벽전의 사용 위치를 표시하였는데, 이를 통해 벽전건축은 축조 이전에 이미 치밀한 설계 과정을 거쳤고, 그에 따라 벽전을 생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백제・신라 벽전건축의 영향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 시대에는 그 당시 사회의 종교와 관념에 부합하는 무늬를 새겨 축조하였는데, 이를 통해 현존하지 않는 벽전건축의 축조 방법을 유추할 수 있었다. 특히 백제 무령왕릉에 사용한 벽전은 각 무늬에 따라 사용 장소와 용도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축조 이전에 이미 무덤을 설계하고 각 부분에 따라 벽전을 생산한 것이다. 이 때 각각의 무늬는 기호 또는 부호의 역할을 한다.

또한 각 나라의 벽전 무늬는 시대성과 민족성을 강하게 표출하는 양식적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벽전의 제작 시기를 유추할 수 있고, 각 나라 간의 영향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대표적으로 중국 양(梁:502~557)의 벽전 무늬 개념은 무령왕릉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실제적인 연꽃무늬는 크게 다르다. 또한 두 개의 벽전이 하나의 연꽃무늬를 이루는 개념은 무령왕릉의 벽전에서 신라의 임하사(臨河寺)터 벽탑과 고려의 신륵사(神勒寺) 벽탑의 벽전까지 이어지고 있어, 그 영향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1. 한국 목조건축의 벽전 사용

목조건축에서 벽전은 삼국에서부터 벽체와 기단・바닥 등에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주로 바닥을 포장한 유구를 살펴볼 수 있었지만, 백제에서는 기단과 벽체에까지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신라에서는 한국 특유의 기단 형식인 벽체석연(甓砌石緣)이 시작되었으며, 목조건축의 내부 바닥을 벽전으로 포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으로 정착하였다. 특히 한국 최초로 벽성을 축조한 고려에서는 삼국의 벽전 사용을 바탕으로, 벽전으로 축조한 목조건축의 벽체와 벽체석연 기단 형식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한국 목조건축의 벽전 사용은 조선 특히 벽전을 확대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 매우 다양한 형식의 벽체를 벽전으로 축조하여 기존 목조건축과 매우 다른 건축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건축의 축조 재료는 분명 목조건축의 가구식 구조 재료인 나무가 대표적이지만, 이러한 벽전 사용은 한국 목조건축의 형식 변화 또는 각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건축 형식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한국건축에서 조적식 건축 재료인 벽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8~19세기를 전후하여 벽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서는 서까래와 들보 등으로 축조한 목조지붕을 축조하고, 기둥과 인방 등의 목조 부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벽전으로만 축조한 내력벽을 갖는 건축 형식이 출현하였으며, 화성(華城) 남수문(南水門) 포사(舖舍), 화성행궁(華城行宮) 무고행각(武庫行閣)의 화약고(火藥庫), 서울 번사창(飜沙廠), 윤승구(尹勝求) 가옥 창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벽전으로 축조한 내력벽을 갖는 일반 건축은 상부 하중을 목조 기둥이 아닌 벽체가 지지하므로 벽전건축으로도 볼 수 있는데, 하중 전달 방식에서는 2차원적인 선적(線的) 부재가 절점(節點)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에서 부재와 부재가 직접 맞닿아 상부 하중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건축 형식은 조선 후기 사회가 요구한 조적식 건축이 일반 건축 형식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한국건축에서 가구식 건축에 의해 가려져 왔던 조적식 건축이 일반 건축 형식으로 새롭게 부각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건축 형태에서는 일반 목조건축과 큰 차이를 갖는데, 깊게 돌출된 처마와 짙은 음영을 만드는 처마 밑 공간은 한국 목조건축이 갖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목조 지붕과 벽전 내력벽을 축조한 건축에서 벽체는 빗물에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처마는 길게 돌출될 필요가 없다. 또한 서까래가 돌출하지 않는 것은 입면에서 ½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건축의 형태를 좌우하는 요소인 지붕의 역할이 감소되고 벽체 부분이 중요한 건축 형태 요소로 부각하여 목조건축의 가구(架構) 보다 벽체에 의한 볼륨(volume)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결국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은 기존 가구식 축조 방법에서 조적식으로 변화한 것이고, 그에 따라 하중 전달은 물론 형태까지도 변화하였다. 또한 내부 공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기존 심벽과는 달리 4면의 벽체를 완전히 밀폐시킬 수 있는 벽전으로 축조하기 때문에, 더욱 폐쇄된 내부 공간을 형성할 수 있으며, 좌우 측벽에는 조창(照窓)을 뚫기 때문에 직사광선을 유입할 수 있다. 따라서 내부 공간은 도둑과 동물・화재로부터 안전한 공간이며 직사광선의 유입에 의해 공간의 인식 체계가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한국건축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건축 형식은 목재의 부족으로 나타난, 조선후기 사회가 요구한 새로운 건축형식이었으며, 구조 체계와 형태・내부 공간 등에서 한국건축의 가장 큰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가구식 축조 방법에 의해 주목을 받지 못했던 조적식 축조 방법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반 건축에까지 확대되어 나타난 건축 형식으로 평가할 수 있으므로 한국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갖고 있는 건축형식인 것이며, 더 나아가 현재와 연관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목조건축 형식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와이드AR> 9호, 제1회 심원건축학술상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