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놀이, 그 서막의 열림

[김혜영_2기]

 

 

부제: 길을 잃을 수 있는 용기와 설레는 첫 만남

 

처음 가보는 길을 잘 찾으시나요? 저는 소위 말하는 길치입니다. 아주 지독했습니다.

자주 길을 잃다 보면, 자신에게서 몇몇의 반응을 추릴 수 있습니다. 하나, 태연하게 걷습니다. (잃은 듯, 잃지 않은, 잃은 것 같은 길) 어딘지 몰라도 그냥 무작정 걷다 보면 또 다른 목적지를 발견하게 되지요. , 멈추고 두리번댑니다. 이윽고 원래 가려고 했던 길을 고불고불 찾아 계획대로 다시 걷습니다. 일반적 반응입니다. , 뒤돌아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아… 여기가 아닌가?’ 짧은 고민 끝에 시작점을 향해 돌아갑니다.

저희 동네에 오래된 지하상가가 있습니다. 출입구의 번호가 무려 서른셋까지 매겨져 있답니다. 갓 구구단을 외울 법한 나이서부터 눈요기와 먹거리의 천국이었던 거대한 그 고래 뱃속이 어떤 과정으로 번식하며 변화하는지 눈으로 확인하며 자랐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이십 대가 되어서도 그 곳에서 길을 잃습니다. 벌써 길의 형상이 몸에 배어 익숙하지만 순간 유혹거리에 현혹되면 십중팔구 다른 길 위에 서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서’라도 있으면 다행인 게지요. 제가 꼭 방향인지감각에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목적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그 드넓고 화려한 고래 뱃속을 천방지축 헤집으면, 애초에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망각한 채 그냥 눈이 휘둥그레져 걷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제 삶에서 선택권은 언제나 제게 있었습니다. 건축을 공부하게 된 것도, 학교를 선택하고,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며, 찾아 듣고 익히는 것 역시, 주체가 되어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베어온 습관적인 선택권. 그 결과가 좋던 나쁘던 간에 온전히 제게 주어지는 책임감. 그렇게 몸소 깨달아 익숙해진 책임감으로 오로지 저만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힘겨운 시간들. 작은 균열을 통해 약함이 스물하게라도 내비치면 그 견고하다고 믿고 산 것이 와르르 깨어질까, 조심스럽게 닫고, 열며, 벽과 날을 세우며 그렇게 싸매 놨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그 견고함이 무너졌습니다. 아니, 물렁해졌습니다. 큰 충격과 타격에 맞부딪혀 파괴되고, 부서졌다면 새로운 방패를 만들 (또 다른) 방황을 찾았겠지만, 보다 더 견고하고 따뜻한 망에 덮여 내부적 갈등과 자괴감으로 물컹해진 그것 때문에, 어찌할 바 몰랐습니다. 단 몇 년의 허약함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유약한 핑계 뒤에 숨어 지내며 더 이상은 감당 못할 습관이라며 도망가고자 했던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방황은 짝사랑의 아릿한 감정과 비슷합니다. 방황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준 당신들에게 고맙습니다. 아직도 최종 합격자발표가 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깊은 곳에서 솟구치던 뜨거운 눈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게 해준 그 순간, 그 눈물로 채워진 원동력이 아직도 저를 방황할 수 있게 만듭니다.

자신이 세운 원칙은 힘이 세다. 자아를 이루는 원칙은 삶의 주제가 되고 동기가 된다.

무엇을 선택하는 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왜 선택하는 가이다.

세상은 무엇을 선택해야 좋다고 가지가지로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준으로 내가 하는 것이 선택이다.

진정 원한다면, 꼭 해야 한다. 꼭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다.”

『김진애, 왜 공부하는가』 중에서

 

[김혜영, 2011, ‘아모르 화티(amor fati), 내 삶과의 연애’, 저널리즘스쿨과 나]